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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문동(文同): 송나라때 대나무 그림의 일인자

by 중은우시 2017. 7. 7.

글: 강위화(姜衛華)





송나라때 묵죽(墨竹)을 그리는 화가로 첫번째로 꼽는 인물은 문동(文同)이다. 그의 팬인 소동파에 따르면, 그는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먼저 가슴에 이미 완성된 대나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胸有成竹). 소동파의 <문여가화운당곡언죽기(文與可畵篔簹谷偃竹記)>에 이렇게 쓰고 있다: "고로 대나무를 그릴 때는; 반드시 먼저 가슴에 완성된 대나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붓을 들고서 오래 쳐다보면 그리고자 하는 것이 보인다. 그때 붓을 들어서 그 그림을 따라, 붓을 떨쳐서 보이는 것을 따라가야 한다. 토끼가 일어나듯이 매가 내려앉듯이 순간적으로 지나가야 한다."


문동은 대나무를 잘 그리기 위하여, 봄이건 여름이건 가을이건 겨울이건 아니면 비가 내리건 바람이 불건, 그는 일년내내 계속하여 대나무 숲 속을 오갔다. 삼복의 더운 날에도 그는 마찬가지로 대나무의 변화에 신경을 집중해서 관찰했다. 한번은, 하늘에서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어서 천둥번개가 치고 곧 폭우가 내릴 것같았다. 사람들은 속속 집으로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집안에 앉아 있던 문동은 급히 삿갓을 집어서 머리에 쓰고는 산 속의 대나무 숲으로 달려간다. 대나무가 비바람이 불 때, 가지가 흔들리고 이파리가 흔들리면서 오가는 것을 보았다. 문동은 세심하게 대나무가 비바람을 맞아 흔들리는 모습을 마음에 새겼다.


문동은 일년내내 대나무의 세밀한 변화를 관찰하고 연구했으며, 대나무가 봄여름가을겨울에 어떻게 형태가 변화하는지를 관찰했다. 흐린 날 맑은 날 비오는 날 눈오는 날 대나무의 색깔 변화를 관찰했다. 햇변 아래에서 그리고 달빛 아래에서 대나무의 명암변화도 관찰한다. 그는 이런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그래서 대나무를 그릴 때면 화초도를 볼 필요가 없었다.





문동은 대나무를 아주 사랑했다. 그의 집 주변에는 대나무를 많이 심어놓았고, 거처하는 집을 "묵군당(墨君堂)", "죽오(竹塢)"라 칭한다. 그는 대나무의 각 생장시기의 특징을 관찰한 후 이렇게 말했다: "대나무는 죽순때부터 시작하여, 몇촌에 불과할 때부터 십여척의 높이가 될 때까지 시종 하나의 완성체이다. 우리가 대나무를 그릴 때 미리 가슴 속에 대나무를 품고 있지 않으면, 한 마디 마디, 한 잎 한 잎을 그릴 때마다 생동감있는 대나무를 그릴 수 없다. 가슴에 미리 대나무의 이미지를 품고 있어야 비로소 붓을 들어 그릴 때 제대로 그리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흉유성죽(胸有成竹)"이라 한다.


그가 대나무 그림을 잘 그린다는 명성은 갈수록 커ㅈ고, 그의 대나무 그림을 구하려는 팬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그는 그들을 상대하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게 된다고 생각하여 집안에서 이렇게 화를 내며 말했다고 한다: "이들 팬들이 보내온 비단으로 양말을 만들어 신어야 겠다."


문동이 그린 대나무 잎은 먹을 진하게 했는지 옅게 했는지를 가지고 뒷면과 앞면으로 나뉜다. 짙은 먹이면 앞면이고, 옅은 먹이면 뒷면이다. 나중에 원나라때의 이연(李衍), 오진(吳鎭)은 모두 그에게 배워서, 그 이름도 유명한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를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