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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사상잠화(四相簪花): 신기한 송나라때 이야기

by 중은우시 2017. 12. 10.

글: 노채(老蔡)



명나라 구영(仇英)의 <사상잠화도>



송나라때는 기이한 이야기들이 많다. 문인과 사대부들은 그런 이야기를 모아서 기록으로 남기길 좋아했다. <몽계필담보록권삼> <후산담총> <청파잡지>에는 모두 같은 이야기 하나를 적고 있다. 즉, "사상잠화"이야기이다. 왜 "사상잠화"라고 하는가? 네 사람이 있었는데 붉은 옷을 입고 머리에 꽃을 하나씩 꽂았다. 그렇게 하고서 즐겁게 친정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수호전의 일지화(一枝花) 채경(蔡慶)처럼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4사람이 머리에 작약꽃을 꽂았는데, 나중에 모두 돌아가면서 대송의 재상이 되었다. 이 일의 기이한 점은 사전에 징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래의 일을 마치 아는 것처럼 그렇게 신기한 느낌이 있다.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경력(慶歷)년간에 한기(韓琦)는 자정원(資政院) 학사(學士)의 신분으로 양주지사로 있었다. 그의 관저 후원에는 작약이 한그루 있었는데, 이것은 구할래야 구할 수 없는 기이한 꽃이었다. 작약은 네 갈래로 갈라지는데, 매 갈래마다 꽃 한 송이씩이 열린다. 이 꽃은 피는 것도 기이했다. 아래와 위는 붉고, 가운데는 노란색의 꽃술(花蘂)이 있었다. 후세인들은 이를 "금전요(金纏腰)"라고 부른다. 이는 천하에 이름을 떨친 진귀한 꽃이다. 이 이름만으로도 경사, 길상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기는 이 네 송이의 꽃을 보면볼수록 마음에 들어서, 연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4명의 귀빈을 모셔서 같이 꽃을 감상하여 4송이 꽃의 길상에 호응하도록 하고자 했다.





초청장에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곳에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대가 빨리 와서 작약이 핀 것을 보라!" 그가 초청한 것은 어떤 손님들인가? 지금으로 치면 대법원의 두 대법관이다.  한 명은 왕규(王圭), 다른 한 명은 왕안석(王安石). 당시로서는 차관급에 해당하는 직위이다. 이들은 대법원에 적은 두었지만, 양주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왕씨와 한기를 합치면 3명이 되니, 1명이 부족했다. 이리저리 생각해도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양주에서 오랫동안 무관으로 있었던 인물을 청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 날 아침, 상화회(償花會, 꽃 감상하는 모임)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 무관은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내왔다. 설사가 나서 올 수가 없다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양주에 출장와 있는 경관(京官) 중에서 한 사람을 고르려고 한다. 그러나, 양주로 출장와 있는 경관이 없었다. 어절 수없이 왕규와 왕안석의 직속상사인 진승지(陳升之)를 선택해서 상화회의 인원을 맞추게 된다.


상회회는 주인과 손님들의 우호적이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일라이트는 걸음을 옮겨 중당(中堂)으로 가서 4명이 각각 꽃 한송이씩을 꺽어 머리에 비녀처럼 꽂는 것이다. 요즘 같았으면 일시에 플래시가 터지고 바로 SNS에 소식을 전했을 것이다. 민간에는 이런 얘기가 돌았다. 어느 지방이든 이 꽃이 피면 그 지방에서 재상이 나온다고. 이 '금전요'보다 더욱 기이한 것은 바로 이 민간의 소문이다. 그 소문대로 된 것이다. 그후 30년간, 이 4명은 과연 연이어 재상에 오른다. 이것이 바로 후대문인묵객들이 즐겨 얘기하는 "사상잠화"의 이야기이다.


그 무관은 재수가 없었다. 그것도 운명이다. 네 거라면 네가 가지려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이고, 네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연(機緣)(이고, 천기(天機)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걸 당신은 믿는가? 내 생각에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후세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겨주었다는 것이다. 또한 양주에서 작약을 감상하는 문화고사를 남겼다는 것이다. 신기하고 아름답다. 송나라때는 머리에 꽃을 꽂는게 유행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머리에 꽃을 꽂기를 즐겼다. 이것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유행이었다. 또한 송나라때 사람들이 아름다운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렇게 자연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문화현상은 전승되질 못했다. 후대에는 속물근성으로 가득하게 금,은으로 바뀐다. 이는 모두 상품경제가 가져온 것인데, 굳이 얘기할 것도 없다.


그후 30년간, 먼저 한기, 이어서 진승지, 왕안석, 마지막으로 왕규가 모두 재상의 직에 오른다. 한기와 왕안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왕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진승지는 아마도 낯설 것이다. 그가 재상에 오른 것은 왕안석이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후 왕안석과 진승지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그리하여 진승지는 병을 핑계로 나중에는 부모상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삼년상을 치른다. 나중에 복귀하여 추상(樞相)을 맡았으나 병으로 사임한다. 진승지는 <송사>에서 평가가 높지 않다. "그는 아주 교활하며 술수가 많았다. 그리고 아부를 잘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는 조정에서 논의할 때 처음에는 왕안석의 의견에 따랐다. 무릇 왕안석이 주장하는 것이면 모두 좋다고 했다. 설사 자신은 내심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왕안석의 추천으로 재상이 되고나서는 왕안석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전상(筌相)"이 되었다. 전상이라 함은 통발재상이라는 뜻인데, 물고기를 잡을 때 통발을 쓰는데,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것으로 배은망덕한 것을 말한다. 진승지에 대한 악평은 아마도 신당(新黨)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정사에서 진승지는 나쁜 짓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간관으로 있을 때는 과감하게 간언을 했다. 상당히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승지와 비교하면 왕규는 지명도가 높다. 그에게는 두 명의 손녀가 있는데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인물들이다. 한 명은 외손녀로 이청조(李淸照)이다. 부친 이격비(李格非)는 왕규의 딸을 처로 삼는다. 친손녀는 바로 진회(秦檜)에게 시집가서 처가 된 왕씨(王氏)이다. 왕씨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는데, 미모에 심계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회의 나쁜 짓을 모조리 왕씨 탓으로 돌린다. 전해지는 바로는 왕씨는 마음이 사갈(蛇蝎)과 같았고, 진회는 바로 그녀의 말을 듣고서 악비를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천하에서 가장 악옥한 여자로 알려져 있다. 진회의 악행이 모조리 왕씨때문이라고 하여 천년동안 악명을 떨쳤다. 그리고 치욕적인 동상으로 만들어져 영원히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왕씨에게 과연 그런 큰 영향력이 있었을까? 진회가 조정에서는 송고종의 말을 듣고, 집에서는 왕씨의 말을 들었다는데 이렇게 핫도그나 샌드위치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있겠는가?


왕규는 사람들에게 "삼지상공(三旨相公)"이라고 불린다. 이는 그의 역사적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칭호이다. 그것은 "취성지(取聖旨), 영성지(領聖旨), 득성지(得聖旨)"이다. 즉, 황제에게 글을 올리면서는 "성지를 내려주십시오"라고 말하고, 황제가 결정을 내리면, "성지를 받사옵니다"라고 말하고, 성지를 받아 나와서 아랫사람에게 전할 때는 "성지가 내려왔다!"라고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윗사람에게 뜻을 물어본 다음에 그 뜻대로만 집행한다는 것이다. 왕규의 일처리 원칙은 한가지 였다. 모든 것은 윗사람의 뜻대로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집행할 때도 절대 윗사람의 뜻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왕규는 사조원로(四朝元老)가 되었고, 평생 아무런 걱정없이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


왕규는 과연 관료사회의 늙은 여우인가? 아니다. 왕규는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이 남달랐다. 24세에 진사제2명으로 급제하고, 대리사 평사, 통판양주를 지낸다. 이것이 바로 그가 '사상잠화'의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양주에 있어서 한기의 눈에 든 것이다. 왕규는 양주에서 관직에 있을 때, 나이가 어리다고 부하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이때 그는 부하의 머리채를 붙잡아 감옥에 집어넣고 범죄로 처리한다. 대도 왕륜(王倫)이 양주를 침범하려 할 때는 왕규가 무리를 모아서 그를 격퇴시킬 준비를 한다. 왕륜이 놀라서 양주를 돌아가게 된다. 이 왕륜이 바로 <수호전>의 백의수사 왕륜의 원형이다.


왕규는 한림학사, 관각사신(館閣詞臣)으로 있었다. 이 관직은 재상으로 가는 징검다리이고, 재상이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리이다. 그때 "입저(立儲, 후계자선정)"라는 나라의 근본에 관한 대시대비(大是大非)의 문제에서 그는 원칙이 견지하고 조심스럽게 처리한다. 그리하여 천하에 유명한 "복의(濮복議)"사건에서, 즉 송영종이 자신의 작고한 부친의 체면을 살리려 할 때, 왕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당시 문인아사들의 칭찬을 듣는다. 구양수(歐陽修)는 감탄하며, "진짜 학사로다(眞學士也)"라고 말한다. 왕규가 명성을 얻은 것은 비록 문학적 재능때문이지만, 그는 양호한 개인적인 품성과 우수한 정치적인 자질, 그리고 노련하고 성숙된 일처리방식을 지녀서 재상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송패류초>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히 중추절, 송신종이 묻는다: "오늘 당직 학사가 누구인가?" 대답하기를 "왕규입니다". 황제는 불러오게 하여 술을 하사한다. 그 후에 집안연회를 여는 방식으로 그를 대접한다. 그리하여 황규는 황송하기 그지없게 된다. 문학청년이었던 황제는 이때 시흥이 일어 왕규에게 이렇게 말한다: "달빛이 맑고 아름다운데, 음악이나 여인에 심취하기보다는 그대와 문학을 토론하고 싶다." 그리하여 사장(謝莊)의 부(賦)로부터 이백(李白)의 시까지 논하고, 황제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꺼내서 왕규에게 평을 해달라고 한다. 두 사람은 문학을 논의하며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3경이후, 황제는 더욱 흥이 나서, 좌우의 궁빈(宮嬪)에게 단선(團扇, 부채), 영건(領巾, 머리띠), 군대(裙帶, 치마와 허리띠), 및 수파(手帕, 손수건)등을 가져오게 하여 왕규에게 시를 써달라고 한다. 이는 마치 요즘의 아이돌팬들 처럼 가지고 있는 것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때 왕규가 쓴 것은 황제의 물건이라는 것이다. 무슨 금양수정연, 산호필격, 옥관필등등. 왕규를 보자. 그는 아이디어가 샘처럼 솟아났다. 붓이 쉬지를 않았고 그가 쓴 시는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격조도 우아하고, 어구도 청신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너희 모두 이렇게 만족스러워하니, 어찌 학사에게 윤필비(潤筆費)를 주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궁빈들은 속속 옥비녀와 금은악세사리를 꺼내어 왕규에게 주어 그의 소매속에 넣어준다. 어떤 세심한 궁녀는 바늘과 실로 소매자락을 꿰매준다. 이 황궁의 연회는 달이 질 때까지 계속된다. 황제는 내시에게 명하여 살짝 술에 취한 왕규를 부축하여 데려가게 한다. 이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비싼 윤필작이라고 할 것이다.


또 다른 <전씨사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번 연회의 참가자는 기실 두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 명은 왕규이고, 다른 한 명은 채확(蔡確)이었다. 송신종이 궁빈을 위하여 시를 지어달라고 하자, 왕규는 재기가 민첩하여 바로 붓을 들어 써내려갔는데, 채확은 재능이 평범하여 제대로 쓰지 못해 궁빈들이 불쾌해 하면서 뒤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 학사를 누가 좋아하겠어?"


왕규는 재상의 자리에 16년간이나 아무런 일없이 지낸다. 그는 정치적인 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아니다. 이는 아마도 약간 손색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한다면, 송신종은 남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황제였다. 초기에 그는 한기가 권력을 전횡하는데 불만이 있었고, 후기에 그는 계속 믿었던 왕안석이 권력을 독단하는 것을 막았다. 희풍이후 재상의 권한은 점점 축소되었고, 황권은 팽창한다. 왕규가 몰래 소인과 결탁했다고 하는 것은 기실 그가 채확을 추천한 것을 말한다. 채확도 일대의 명신이다. 왕규에 대한 후세의 평이 좋지 않은 것은 그가 일을 하지 않은 것때문이다. 왕규가 이때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때는 신구당쟁과 변법문제로 이미 북송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이다. 왕규로서는 이를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의 "삼지상공"은 더더국 강세의 황제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은인자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철보신한 것이고, 황제가 시키는대로 했다. 이는 관료사회의 인생현학(顯學)이다. 실로 마음을 많이 써야 하고, 내심은 완전히 붕괴되었을 것이다.


"사상잠화"는 신기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송나라때 선비들이 성공하기 전에 서로 사귀는 것은 공동의 취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취향이 맞는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이들이 일단 관료사회에 들어가면 이런 관계는 무궁한 역량을 발휘한다. 이는 바로 송나라라는 특정한 시대에 "문명천자중사신(文明天子重詞臣)"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