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학인(歷史學人)
1950년 9월 15일, 한국전쟁의 국면이 완전히 바뀐다. 미군 맥아더원수의 지휘하에 미군 7만여명, 500여기의 비행기, 260척의 군함이 협력하여 인찬상륙작전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퇴로를 포위한다. 9월 16일, 낙동강전선의 한미군 10개사단이 대거 반격을 시작한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다음 날, 미국해병대는 한강남안으로 진격하고, 미국비행기는 완전히 한반도의 제공권을 장악했다. 스탈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국방부장에게 긴급히 소련공군이 출격하여 평양을 보위할 계획을 수립하라고 하며, 다른 한편으로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어 미국인이 인천에 상륙한 목적은 북한 제1집단군 및 제2집단군과 북한 후방의 연계를 차단하려는 것이니 북한은 신속히 남방에서 4개사단을 철수히켜야 하고, 한강북쪽과 동쪽에 방어선을 건립해야한다고 하였다. 인민군의 주력이 부산에서 새로운 공격을 감행하고 있던 것을 감안하여, 소련의 평양주재대사와 군사고문은 스탈린의 위의 지시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
9월 25일, 서울이 함락되고, 부산에 대한 공격도 실패로 돌아간다. 미군은 이미 대거 북진하기 시작한다. 38선을 넘은 인민군주력은 거의 모든 탱크, 대포를 잃어버렸고, 부대는 탄약과 연료가 부족했다. 거의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포위섬멸의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스탈린의 철수명령이 막 북한에 도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무장부대의 부총참모장이며 가명이 마트비야프인 소련공산당특별대표단 단장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반드시 즉시 중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최소한 중국에서 1500명이상의 운전기사를 보내주어 무기탄약과 군대운송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전쟁을 더 이상 계속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27일, 그는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외교인민위원부에 지시하여 유엔대표 마리크로 하여금 즉시 미국국무원대표와 접촉하도록 지시한다. 평화적으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련군사고문에게 전력을 다하여 북한인민군을 조직하여 인민군철수업무를 진행하도록 한다. 다만 스탈린은 명확히 했다. 반드시 모든 조치를 취하여, 북한에 있는 소련고문은 한명도 포로로 잡혀서는 안된다고. 당연히, 스탈린은 중국인이 한반도에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단지 그가 하마트비에프에게 보낸 전보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김일성에게 중국에 운전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때, '절대로 모스크바를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28일,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모스크바의 제안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한다. 다만 회의에서는 최종적으로 이렇게 결정한다. 대부분 인민군주력이 아직 철수하지 못했으므로, 서울함락후 이미 미군이 38선을 넘어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일단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남은 인민군으로는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다. 북한은 불가피하게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국 지도자들은 일치하여 소련과 중국에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요청한다. 확실히 이런 요청을 하는 것은 낙담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자신의 힘으로 국가를 통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0월 1일, 새벽 2시 50분, 스탈린은 소련대사가 보내온 김일성의 정식 구원요청을 받는다. 서신에서는 간절히 스탈린이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해줄 것을 간청했다. "만일 어떤 원인으로 이 일을 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중국과 기타 인민민주국가에서 조직한 국제지원부대들로 하여금 군사원조를 하도록 도와달라"
김일성의 구원요청서신을 받은지 10분후에 스탈린은 소련주북경대사에게 보낼 전보를 구두로 전달한다. 그에게 급히 모택동 혹은 주은래에게 전해달라고 한다: "조선동지의 상황은 절망스럽다." "현재의 형세를 보면, 당신들이 만일 가용한 부대를 북한에 보대 도와준다면 최소한 5,6개사단이 신속히 38선까지 밀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동지들이 당신들 부대의 엄호하에, 38선이북에서 후방역량을 조직할 것이다. 중국사단은 지원군의 신분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히 여전히 중국의 지휘관이 통솔한다." 그는 순전히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각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전혀 강요하는 뜻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일에 관하여, 나는 우리의 북한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생각도 없고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믿는다. 그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기뻐할 것이다."
이 전보가 모택동의 수중에 전달될 때, 김일성의 특사인 박헌영(朴憲永)도 구원서신을 가지고 중남해로 왔다. 모택동은 임시로 서기처지도자인 주은래, 주덕과 유소기를 불러모아 긴급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한다. 모택동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이 일은 관여해야 한다; 관여하지 않으면, 미군침략자는 더욱 창궐하여, 북한에 대해서건, 중국에 대해서건, 전체 동방에 대해서건, 모두 불리하다. 다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누구든 알고 있다. 리스크를 안아야 한다. 이 리스크가 도대체 얼마나 클 것인지, 이 문제가 회의에서 논쟁할 주요 내용이 되어야 한다."
먼저, 전쟁국면은 미국군대가 장비와 화력에서 엄청난 우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아니라, 미군은 지휘와 전술에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적으로부터 획득한 각양각색의 각종 장비로 무장한 중국인민해방군이 미국인을 섬멸하고 축출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주은래가 열거한 숫자에 따르면, 미국의 1개군은 구경70밀리이상이 대표가 1000여문, 동시에 탱크가 근 500량이며, 해방군은 평균 1개군이 이런 대포 36문을 가지고 있다. 동북변방군의 1개군은 최대 290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탱크는 없다. 게다가 미군은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다. 해방군의 제1차공군이 1951년 2월에 비로소 겨우 300기의 비행기를 가지고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장비와 화력에서 이처럼 차이가 큰 조건하에서 대미전투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이 유리할 것인가?
다음으로, 여러해동안의 전쟁을 겪은 후, 인민들이 막 평화와 안정을 찾았는데, 국가가 이제 막 경제를 전면적으로 회복하고 건설하는 시기를 맞았는데, 북한에 출병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이면, 미국이 중국에 선전포고할 심각한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만일 한반도작전에서 빨리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양군대치국면이 형성된다고 하더라도, 미국은 반드시 더욱 심하게 중국개륙에 대한 공중타격과 해상침범을 진행할 것이다. 그 결과는 불가피하게 중국이 이미 시작한 경제건설계획을 파괴하게 될 것이고, 국내정치의 공황을 가져올 수 있다.
확실히, 2개월전과 비교하면, 한국전쟁의 국면변화는 중공중앙지도자내부에서 출병조건에 대하여 훨씬 조심스러워졌고, 걱정도 많아졌다. 모택동을 제외하고, 참여자들은 거의 모두 신속히 출병하는데 대하여 그다지 큰 자신감이 없었다. 당연히, 모택동은 여전히 믿고 있었다.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출병하는 것이 출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관건은 소련이 해방군과 미군장비와 화력의 차이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느냐이다. 해방전쟁의 승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후방이 가깝고, 병력이 많다는 큰 우세를 지니고 있다. 단지 소련의 장비가 적시에 운송되어 온다면, 공군의 엄호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된다면, 미국군대를 물리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만일 북한이 승리하면 미국이 감히 중국에 대거 진격할 수 있겠는가?
모택동의 논리는 비록 참가한 지도자들의 염려를 완전히 해소시켜주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더욱 유력한 출병반대이유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모택동이 다음날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출병문제를 추가로 연구하고 결정하기로 한다. 이어서 그는 밤을 새워 두 통의 전보를 작성한다. 한통은 동북군구사령원 겸 정치위원 고강(高崗)과 당시 동북변방군의 제13집단군사령원 등화(鄧華)에게 보낸 것으로 동북변방군이 사전이 준비작업을 마치라고 명령하고, 수시로 명령을 받으면 한반도에 들어가 작전을 벌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른 1통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는 명확히 설명한다: "우리는 지원군의 명목으로 일부군대를 한반도경내로 파견하여 미군 및 그의 주구인 이승만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북한동지를 돕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진입하여 작전을 벌이는데 가장 관건적인 문제는 "중국군대가 한반도ㄴ에서 미국군대를 섬멸할 수 있느냐, 효과적으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소련의 장비원조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모택동은 미군과 해방군의 화포와 기타 중무기상의 차이를 열거한 후, 길다란 목록을 열거한다. 소련에 신속히 무기장비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매군이 500-600문의 화포를 보유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다만, 그는 출병을 지연시킬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현재의 상황하에서, 우리는 먼저 모은 12개사단을 10월 15일에 출동하기로 결정했다.북한의 적당한 지역(반드시 38선은 아니다)에 도달한 후, "한편으로 38선이북으로 진입한 전국과 전투를 벌이며, 제1시기에는 방어전만을 하며 소수의 적을 섬멸하며 각 방면의 상황을 확실히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무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우리 군에 장비한다. 그 후에 북한동지들과 반격을 거행한다." 실전에서 적군의 4배인 병력으로 1배반 내지 2배반인 적군의 화력을 상대하니, "깨끗하고 철저하게 적을 섬멸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10월 2일 거행된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놀라운 일을 당한다.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현재 북한에 출병하는 것에 대하여 회의와 반대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지휘관들이 거의 일치하여 미군과 전투를 벌이는데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이기지 못하면 왜 출병하는가. 모택동도 마침내 망설이기 시작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군사지휘관중에서 오직 팽덕회만이 북경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명확히 팽덕회를 불러서 그의 의견을 들어보겠다고 말한다. 다만 밤을 새워 초안했던 전보는 어쨌든 발송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스탈린에게 답변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모택동은 3일 소련대사 니콜라스 바실리야비치 로션을 만나기로 한다. 그리고 구술로 전보내용을 전한다: "우리는 원래 적이 38선이북으로 진격할 때 8개사단의 지원군을 보내어 북한의 동지들을 도우려고 했다. 다만, 전면적으로 고려한 후, 우리는 현재 이 행동이 아마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 몇개사단으로는 한반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우리군의 장비는 너무 형편없고, 미국군대와전투시에 승리할 자신이 없다), 적은 아마도 우리를 후퇴하도록 밀어부칠 것이다. 둘째, 이렇게 하면 아마도 미국과 중국의 공개적인 충돌을 불러올 것이다. 그 결과 소련도 전쟁에 끌려들어올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진다." 그러므로, "중공중앙의 여러 동지들은 이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만일 우리가 몇개 사단을 파견하고, 적들이 우리가 후퇴하도록 밀어부치면, 동시에 미국과 중국의 공개충돌이 일어나면, 우리의 전체 평화건설계획은 철저히 파괴되고, 이는 국내의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살 것이다(인민이 전쟁으로 받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우리는 평화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재 가장 좋은 것은 인내심을 가지는 것이다.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역량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야 적과의 작전시기상 비교적 유리할 수 있다." 당연히 모택동은 내심으로 이렇게 하는데 대하여 불안감이 컸다. 그리하여 그는 전보의 끝에 특별히 표시한다; "이 문제에 관하여 아직 최종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우리의 초보적인 전보이다. 우리는 당신과 협의하기를 희망한다."
모택동이 보낸 3일의 답신은 스탈린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10월 5일,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은 꼬박 하루종일 토론한다. 모든 참석자들은 확신했다. 반드시 일체의 댓가를 치르고라도 소련이 직접 미국과 충돌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설사 북한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모택동이 생각을 바꾸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소련이 원래 부담할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스탈린은 그 날로 모택동에게 전보를 한통 발송한다. 그는 모택동의 우려를 하나하나 해명한다. 그렇게 하여 모택동이 안심하도록 한다.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미국은 현재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일본도 미국을 원조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만일 중국이 참전하면, 미국은 그저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만일 소극적으로 기다린다면, 중국의 역량을 남들이 믿을 수 있도록 보여줄 수도 없다. 중국으 양보를 받아낼 수 없을 뿐아니라, 미국이 대만문제에서 양보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소련이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문제는 그가 아주 선동적인 언어로 이렇게 말한다: 이미 중소간에 상호동맹조약이 체결되어 있으므로, 만일 미국이 중국에 선전포고하면, 소련은 당연히 전쟁에 끌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다만, "이게 겁낼 문제이냐? 내가 보기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합하면 미국이나 영국보다 더 강대하기 대문이다. 그리고 기타 유럽자본주의국가는 독일(현재 그는 미국에 여햐한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이다)을 빼면 무슨 중요한 군사강국이 없다. 만일 전쟁을 회피할 수 없다면, 현재 바로 한판 붙자고 해랴."
기실, 모택동도 완전히 출병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단지 군대지휘관들이 자신감을 가지느냐에 있었다. 4일, 팽덕회가 북경에 도착하여, 정치국회의에 참석한다. 회의가 끝난 후, 모택동과 담화를 하는 중에, 모택동이 회의에서 말한 "다른 사람이 국가위기의 순간에 처해 있는데, 우리는 곁에서 서 있기만 한다면 어떻게 보더라도 마음이 괴로운 일이다."라는 것에 대하여 팽덕회도 인정한다: "소련은 완전히 손을 씻었습니다. 우리는 장비에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저 북한이 망하게 놔두는 것은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다만, 모택동이 제기한 "만일 소련이 원조를 좀 더 많이 해주고, 좀 더 빨리해주면, 우리의 장비도 개선될 것인데, 이번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에 대하여, 팽덕회는 반복해서 고민한 후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원조를 어느 정도 받느냐에 있습니다. 공군이 어느 정도 엄호해줄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이 문제를 잘 해결하면, 미국과 싸워볼 수 있습니다." 팽덕회로부터 이런 대답을 듣자, 모택동은 확실히 아주 만족했다. 그는 명확히 제안한다. 소련원조와 관련한 문제는 주은래가 소련으로 가서 스탈린과 협의하여 해결할 것이다. 출병의 준비는 계속 하자. 팽덕회가 지원군의 사령권 겸 정치위원을 맡아라. 5일의 정치국회의에서, 팽뎍회는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회의의 분위기는 변화가 있었다. 이에 기하여, 모택동이 제안한다. 한편으로 지원군을 성립하여, 한반도진입작전을 위한 주도면밀한 준비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주은래, 임표를 소련에 파견하여, 출병과 부출병의 이해득실을 설명하고 최종적으로 스탈린의 의견을 물어보기로.
7일, 모택동은 다시 소련대사 니콜라스 바실리야비치 로선을 만나서, 스탈린에게 전해달라고 한다. 그는 스탈린이 보낸 전보의 기본관점에 동의하고, 어느 정도 기간동안 준비한 후 9개사단을 한반도로 보내어 작전을 벌이겠다. 한반도진입작전과 소련원조의 여러가지 문제는 주은래와 임표를 소련으로 파견하여 스탈린과 상세하게 토론하게 하겠다.
8일, 모택동은 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중국인민지원군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전보로 김일성에게 알린다.
그날, 주은래와 임표는 북경에서 모스크바로 간다. 주은래는 당시에 두 가지 의견을 가지고 간다: 소련이 신속히 중국이 필요로 하는 장비를 제공할 수 있으면, 특히 공중엄호를 제공하면 출병한다; 그렇지 않으면 출병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히, 주은래와 임표의 담화는 비교적 출병의 곤란한 점에 대한 것이 많았다. 이는 코댁동이 '어느 정도 기간동안 준비한 후' 출병한다는 전보와 연결되어, 스칼린은 중국의 의도를 오해하게 된다. 반복적으로 출병의 이점을 설명했지만, 주은래를 설득하지 못하자, 흥분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큰 소리로 말한다: "그러면, 너희의 결정은 군대를 북한에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냐? 조선의 사회주의가 금방 붕괴되는데도..."
10일과 11일, 주은래와 스탈린은 거의 이틀에 걸친 회담을 가진다. 그는 모택동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은 한편으로 지원군에게 16개 지원군공군단이 공중엄호를 해주기로 약속했다. 다른 한편으로 즉시 공군을 출동시켜 엄호하는데는 곤란을 표시했다. 소련의 극동공군은 준비가 부족하여 최소한 2달 내지 2달반의 시간을 주어야 엄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더욱 많이 강조한 것이 중국에 비행기를 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스탈린에게 말했다. 그래서는 안된다, 중국측이 받아서 운행하는 것도 곤란하다. 그리고 비행사를 이용할 수도 없다. 하물며 중국측이 대금지급해야하는 문제도 남는다. 이것은 재정에 큰 곤란을 가져온다. 반드시 경제회복과 건설사업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토론을 계속하다가, 쌍방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결정한다. 부득이한 상황하에서는 북한을 포기한다. 김일성과 그 정권과 군대를 잠시 중국의 동북지구로 후퇴하여 있도록 한다. 이에 기하여 그들은 각각 북경과 평양측에 정식으로 통지한다.
주은래가 소련에 여러가지 방안을 가지고 갔지만, 모택동은 시종 출병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은래의 소련공군이 잠시 출동할 수 업으며, 잠시 출병을 하지 않는다는 통지를 받은 후, 모택동은 즉시 관련부문에 출동의 원래 계획을 잠정 중단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전보를 보내 고강과 팽덕회를 북경으로 불러서 논의한다. 그들은 비록 소련이 잠시 공군지원을 하지 못한다는데 대하여 의외라고 여기고 불만을 가지지만, 김일성이 동북에 와서 망명정부를 설립하는 것과 미국인을 압록강변에 오는 광겅에 대하여는 불안해 했다. 이는 바로 모택동이 우려하는 바였다. 반복적으로 이런 상황을 토론한 후, 정치국지도자들을 일치하여 결정한다. 한반도출병은 이미 유일한 선택이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즉시 13,14일 연이어 3통의 전보를 주은래에게 보낸다. "고강, 팽덕회 두 동지 및 기타 정치국동지들이 협의한 결과, 일치하여 우리군이 그래도 북한에 출동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결정했다." '적이 압록강변에 밀려오고, 국내국제의 반동기세가 올라가면, 모두에게 불리하다. 먼저 동북에 더욱 불리하다." 작전에 대하여는 장비가 비교적 나쁘지만, 적군을 물리치는 것은 자신있다. 소련의 장비가 오면, 우리는 공중과 지상에서 모두 우세를 점할 수 있고, 공세를 다시 취할 수 있다. 결국, 마땅히 참전해야 한다.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는 이익이 훨씬 크다. 참전하지 않으면 손실이 크다.
13일, 소련대사 로션은 모택동의 결정을 스탈린에게 보고한다. 모택동은 로션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국측의 유일한 요구는 반드시 공군엄호를 받아야 하고, 우리는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어쨌든 2달이상 늦어지면 안된다."
14일, 스탈린은 주은래의 정식 통보를 받는다. 이번에 스탈인은 마음 속에서 돌덩이를 내려놓은 것같았다. 몇년후, 진의(陳毅)는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은 당시에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렸다.그는 아주 흥분하여 정식으로 김일성에게 통지한다: "망설임과 약간의 임시조치를 취한 후에, 중국동지들이 마침내 출병하여 북한을 원조하겠다는 최종결심을 내렸다. 북한에 유리한 최종결정이 마침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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