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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진군서장(進軍西藏): 1천 여군(女軍)의 티벳진입역사

by 중은우시 2016. 8. 26.

글: 봉황주간 279기





반세기이상 감추어두었던 역사가 있다. 인류행군사상, 세계여병사상 공전절후의 기적이 있다.


만일 군복을 입은 옛날 사진으로 신분을 증명하지 않으면, 모두 당숭민(唐崇敏)을 그저 보통의 산시 농촌부녀라고 여길 것이다. 그녀가 얻어들은 평가는 바로, "열심히 일하고, 시부모에 효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한 신분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관련이 있다: 진군서장.


20세기 중엽, 신중국탄생초기에 같은 시기에 두 건의 큰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한국전쟁, 6.25사변), 다른 하나는 진군서장이다. 다만 항미원조와 비교하면 인민해방군이 고원으로 진군하여 티벳을 해방시킨 역사는 반세기여동안 조용했고 침묵했다. 심지어 약간은 고독하고 비장하다.


사람들이 더욱 모르는 일은 진군서장의 행군대오가운데, 1100여명의 여병이 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대부분 북경, 성도, 중경, 서안, 정주, 남경등 자연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내륙에서 징병에 응하여 대오에 가담하여, 천리 먼 길을 걸어 티벳으로 간 것이다. 기본적으로 16.17세의 여병들인데, 가장 어린 여병은 겨우 10살이었다. 한창 나이때인에 환경이 열악한 고원에서 산소도 부족하고, 식량도 끊기고, 길도 막혔다. 무수한 눈덮인 산을 넘고 무수한 빙하를 지나고, 험악한 생존환경의 늪과 초지도 지났다.


당종민은 바로 이 천명의 진장여병중 한 명이다. 당시의 신분은 54사단의 문예/위생병이었다. 감자(甘孜)공항, 천장선(川藏)선도로공사를 마친 후에 내지로 돌아온다. 관련 자료와 증명서를 모두 잃어버려서, 당숭민은 시종 일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남편의 고향인 산서 농촌으로 와서 일했다. 여러번 마을에서 노동적극분자로 평가받았다.


당숭민은 대륙군대작가인 기효송(紀曉松)이 예전 진장여병을 인터뷰할 때, 역사의 먼지 아래에서 발굴해낸 사람이다. 그후에 기효송은 그가 최근에 출판한 <천로행군(天路行軍)>이라는 책에 실었다. 


2006년 중춘(仲春)부터 시작하여 올해 여름까지, 기효송은 이런 일을 했다. 당숭민을 포함한 100여명의 진장여병을 찾아내서, 그녀들로부터 옛날 그녀들이 티벳에 들어간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거의 '원생태'대로 정리했다. 이 반세기여동안 감추어졌던 역사는 '늦지만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1949년 12월 중순, 모택동은 소련을 방문한다.


전용열차가 만주리(滿州里)에 이르렀을 때, 처음으로 해외를 방문하는 개국지도자는 당중앙에 서신을 하나 쓴다. 국내외의 유리한 형세를 분석한 후, 진군서장의 생각을 밝힌다. 서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티벳(서장)을 해방시키는 것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고 늦어져서는 안된다. 빠르면 빠를 수록 유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야장몽다(夜長夢多)할 수 있다." 


티벳은 당시 중국내력에서 미해방된 마지막 토지였다. 시시때때로 중국지도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겨우 10여일을 사이에 두고, 모택동안 다시 모스크바에서 전보를 하나 날린다. 중앙지도자와 유백승(劉伯承), 등소평(鄧小平), 하룡(賀龍)의 3명의 서남국 지도자들에게 즉시 부대배치를 연구해서 티벳으로 진군하라고.


1950년 1월 중순, 중경의 증가암(曾家巖). 중공중앙 서남국의 제2서기이자 중국인민해방군 제2야전군사령원인 유백승은 제18군 군장 장국화(張國華), 정위 담관삼(譚冠三)등 몇몇 사장(사단장)급 이상 간부에게 당중앙, 모주석의 "진군서장"의 전략의사결정을 전달하고, 이 영광스러운 임무를 제18군에 맡긴다.


이 때의 티벳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요원하고 신비로왔다. 근대에, 제국주의세력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티벳도 침범을 받았다. 티벳인민은 전국 각 민족의 지지하에, 제국주의침략에 반항하고, 제국주의 및 그 친제국주의분자의 여러가지 분열활동을 분쇄시켜, 중국의 통일을 유지했다. 그러나, 인민해방전쟁이 전국을 석권할 때, 티벳지방당국의 반동세력은 영미등 제국주의세력과 결탁을 강화하고, 1949년 7월에는 "구한사건(驅漢事件)"을 만들어, 제국주의와 티벳지방세력의 음모를 드러낸다. 이는 중앙의 티벳문제해결의 결심을 강화시켰다.


내륙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티벳은 특수한 지리적 위치와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진군서장은 정치가 군사보다 중요하고, 보급이 전투보다 중요하다. 그외에 티벳해방과 내륙해방의 다른 점은 부대가 들어간 후 장기간 티벳을 건설하고,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일련의 의료, 문예, 통신, 군수등 업무를 수행할 여병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여병을 모집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다. 


진정으로 티벳고원의 기후와 환경을 아는 대다수의 가장은 자신의 자녀가 병사가 되어 티벳에 진입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다만 1950년의 중국대지에서 격렬한 혁명의 음악이 이미 무수한 청년의 뜨거운 심장에 불을 붙였다. 군대에 들어가 항미원조를 하는 것은 당시 도시청년들이 바라마지않던 바램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인원수는 한도가 있었다. 혁명의  나팔소리는 젊은이들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고, 눈길을 티벳으로 돌렸다. "나는 티벳에 들어가겠다"는 목소리는 "나는 한국으로 들어가겠다"는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크게 울렸다. 어린 소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티벳으로 들어가는 대오에 1100여명의 여병이 포함되게 된 것이다.


역사를 펼쳐보면, 티벳은 토번(吐藩)이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장안에서 두 명의 공주가 간다. 그녀들은 당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위하여 멀리 이역으로 시집갔다. 그리하여 민족단결의 역할을 한다. "아주 대단하다" 기효송은 말한다. "이는 중국여성이 자고이래로 비범한 희생정신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역사발전의 시기에서 보면, 두 공주는 비록 요원한 당나라에서 티벳으로 들어갔고, 조건은 더욱 원시적이지만, 그녀들은 천군만마의 보호하에, 시종 가마를 타고, 보호를 받았다. 걷는 일은 아주 적었다. 그녀들은 여병들처럼 군장을 매고 행군하고, 배고픔을 견뎌야할 필요가 없었다."


여병들의 티벳진입은 중국여병 혹은 중국여성이 창조해낸 인간기적이다. 행군의 고난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그것은 홍군의 장정보다 더 심했다. 인류행군사상 공전절후이다. 그것은 중국부녀가 드물게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견인불발, 불가초월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책에서는 이준침(李俊琛)이라는 여병의 이야기도 있다. 당시 이준침이 티벳에 들어갈 때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비록 몸매는 여렸지만, 강단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몸애 지닌 것도 다른 사람보다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다지 느낌이 없었지만, 눈덮인 산을 하나 오르고 나니, 그녀의 고산반응이 분명해졌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걸을 때 자신의 몸이 조여지는 것같았다. 지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곁에 있던 사람도 힘들게 숨을 쉬고 있었고, 입술은 보라색으로 바뀌고, 얼굴색은 창백해졌다. 다시 몇 개의 눈덮인 산을 넘자, 걷는 것이 힘들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가래마저도 분홍색이 된다. 따르던 의사들은 이것이 산소부족으로 인한 폐출혈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직 산소배낭이 없고, 약물도 적어서, 그저 일반적인 응급치료밖에 못했다. 어떤 사람은 걷다가 걷다가 쓰러졌다.


행군때 또 하나의 난제는 기아였다. 한번은 연일 이어지는 눈으로 산이 막히고, 후방에서의 보급도 끊어진다. 부대는 한 사람당 겨우 4량(현재의 125그램)의 대식분(代食粉만 나눠주었다. 이 배급은 상대적으로 남자병사들보다 식사량이 적은 여병들의 경우에도 배가 고파서 머리가 어지럽고, 발을 헛디딜 정도였다. 기아를 면하기 위하여, 그녀들은 야채를 뜯고, 풀뿌리를 파야 했다.


더욱 큰 도전은 그 뒤에 있었다. 청춘기에 접어든 여자들에게 행군중의 '생리'는 더더욱 이들 여병들을 힘들게 했다. 여러해 후, 이들 여병은 기효송의 앞에서 당시 행군에서 가장 힘든 일이 뭐냐는 질문에 어떤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지고 설산을 오르는 것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산소부족과 배고픔이라고 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생리때 빙하를 건너는 것이라고 했다.


빙하를 건널 때, 어떤 지도원은 좋은 뜻으로 일깨워주었다. 업어주어야할 사람이 있느냐? 여병들은 모두 그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미안하고, 전우들의 짐이 되기 싫었다. 당시 여병들이 쓰는 위생지는 모두 수공으로 만든 두껍고 딱딱한 초지였다. 생리때, 그저 그것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행군시간이 비교적 길어지면 아파서 걷기가 힘들어졌다. 아예 딱딱한 피묻은 초지를 뜯어내고 경혈이 허벅지 사이로 흐르게 놔두었다. 그 결과 자주 이런 광경이 나타났다. 매번 빙하를 하나 건널 때마다, 강수면은 붉은 색으로 바뀐다. 그후에 다시 월경이 오면 이들 여병은 배가 아파서 참을 수 없게 된다. 경혈은 더 이상 붉은 색이 아니고, 가축이 풀을 먹은 후에 입안의 녹색거품모양이었다. 라싸에 도착하자, 거의 모든 티벳에 들어간 여병들은 폐경(閉經)이 된다.


티벳에 들어간 후, 여병들의 현실생활에서의 역할은 기효송이 이렇게 개괄한다: 그것은 바로 "번영, 온정, 조화를 가져왔다"


기효송은 일찌기 <해방군보>에 이들 진장여병 왕계수(王季秀)에 관한 보도를 보았다.


보도에는 오래된 사진이 하나 있다. 사진에는 티벳인민들의 중간에 두 명의 흰옷을 입은 젊은 여병이 양쪽에서 금기(錦旗)를 붙잡고 있는데, 금기에는 한어와 티벳어 두 가지 언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의 질병을 치료해준 것은 나에게 새 삶은 준 것과 같다."


티벳에 들어간 해방군 중에 두 부대가 티벳인민으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하나는 왕계수가 포함된 의료부대이고, 다른 하나는 문예부대이다. 당시 제18군 문공단의 지도원인 장균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현지 귀족과 티벳인민과 교류할 때 만일 문공단이라는 특수한 '통전대오'가 없었더라면, 티벳에서 자리를 잘 잡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당시에 티벳지구의 일부 반동분자들은 해방군의 티벳진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악의적으로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한인이 오면 양식, 가축, 여자를 빼앗아 갈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으 ㄴ한인이 오면 사묘를 불태우고, 종교를 없앨 것이라고 했다. 더욱 황당무계한 얘기는 한인은 모두 녹색 눈알에 붉은 눈썹을 지닌 살인마여서 어린아이를 잡아서 먹는다는 것이다. 이런 유언비어가 티벳의 각 지방에 전파되면서 해방군을 본 적이 없는 티벳인민은 반신반의했다. 해방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하루종일 불안에 떨었다. 문공단은 이때 큰 작용을 한다. 티벳인민의 의심을 없애기 위하여, 그들은 연출복장을 입고, 노래를 부르며, 북을 치면서 길거리를 다녔다. 이 방법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숨어 있던 티벳인민들이 반나절이 지났지만 아무도 사람을 끌고가거나 물건을 빼앗아가지 않고, 바깥에서는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요란스럽고, 한인들은 만면에 웃음을 띄고 아주 선량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 아주 예쁜 젊은 여병들이 나타나니, 무슨 살인마같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어떤 어린아이들은 집에서 뛰쳐나왔다.


황숭덕(黃崇德)은 기효송의 기억에 선명한 한 여명이다. 당시 도보로 티벳에 들어가는중에 황숭덕은 특히 돋보였다. 걸은 거리가 가장 긴 여병중 하나이다. 그녀 본인은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일찌기 해발 6000미터의 설산에서 병을 앓으면서도 부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나중에 다시 여러번 변방의 가장 힘든 지방으로 가서 공연을 한다. 여기에는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초모랑마)의 대본영도 포함되어 있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며, 말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고, 사회도 잘 보았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자주 여러 시간동안 공연을 해야 했다. 티벳의 상층민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황순덕은 여러번 문공단을 따라 포달라궁, 로부린카(달라이의 여름궁전)로 가서 달라이라마를 위하여 공연했다. 그녀가 두번째로 달라이라마를 위하여 티벳족의 노래와 춤인 <송철아랍(松哲雅拉)>을 공연한 후, 달라이라마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인이 우리 티벳의 노래를 이렇게 잘 부르고, 춤을 이렇게 잘 추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몇십년 후, 바로 이들 공화국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병들은 같은 시기내에 더욱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항미원조(한국전쟁)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 진군서장은 거의 기억의 맹점이 되어 버린다.


군대작가 기효송이 이들 여병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미 반세기여가 지난 2006년이었다. 만일 2006년 4월, 기효송이 <군사역사>의 요청으로 이들 진군서장 여병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도 이 진귀한 역사를 몰랐을 것이고, 티벳에서 그때 이런 위대한 여성의 무리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이 때의 여병중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은 개략 600명 내지 800명이 된다.


지금 이들 살아있는 진장여성은 주로 사천 성도, 의빈, 북경, 서안, 귀주 중경, 남경, 정주, 상해등의 도시에 살고 있다. 기효송이 보기에, 그녀들 대부분은 잘 살고 있다. 당연히 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은 그녀들의 급여대우, 복지가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들의 정신상태와 정신경지가 좋다는 뜻이다. 그녀들은 조용히 그리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사실상, 많은 경우 외부에서도 그녀들에게 '보답'해야하는 것을 잊은 듯하다. 잊혀진 것뿐아니라, 그녀들은 자신의 티벳진입시의 고난의 행군과 생활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 예를 들어, 문공단의 여병 장도진(章道珍)은 나중에 남편 예잠(倪潛)과 함께 티벳에서 30여년간 신문업무를 했다. 그녀의 업무기풍은 동료들의 칭찬을 받았고, 티벳신문에서 '부부모범'으로 받들어진다. 1961년 3월, 어린아들 예원생은 고워에서 산소부족으로 뇌성마비가 되어 평생 불구로 살았다. 지금 장도진은 이미 74살이다. 남경에서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그녀의 가장 큰 걱정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아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외에 아들의 의료보험문제도 계속 해결되지 못하고 있어 그녀에게는 마음의 병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첫부분에 언급한 당숭민 노인은 남편이 죽은 후, 겨우 수백위안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다.


정말 웃지도 물지도 못하게 만드는 일도 있다. 바로 우준아(于俊娥)이다. 그녀는 산동출신의 여병인데, 티벳으로 진입할 때, "건괵여역사(巾幗女力士)"라는 별명을 얻었다. 강탁병참(崗托兵站)에서 임신4개월때, 그녀는 창고의 양식을 말리기 위하여 전방으로 운송하다가 무너진 창고에 깔려 중상을 입는다. 골반이 파괴되고, 입꼬리가 일그러지며, 팔이 부러진다. 사람은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강탁에는 의사도 약도 없어서 우준아는 병상에서 고통스럽게 스스로 강인하게 버티며 몇달 후에 기적처럼 아들 '소강탁'을 낳는다. 그녀는 일찌기 티벳군구의원에서 2급상이군경으로 인정받지만, 지방으로 전업된 후, 정신상태가 좋아지고, 두뇌가 맑아지면서 말도 분명해지자, 장애등급이 돌연 1등급 내려간다.


그저 이들 진장여병들은 여전히 관용적이고 통이 크다. 손상유(孫常瑜)라는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종 티벳에 들어간 이 역사가 나에게 평범하고 보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행운의 참여자이다. 동시에 수익자이다. 어떤 이익을 얻었느냐고? 의지를 달녕하고, 영혼을 정화시켰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찾아내고 확립시켰다. 나의 일생에 곤란을 이겨나갈 용기와 역량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