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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북탑산(北塔山)전투: 해방후 중국과 몽골의 유일한 전투

by 중은우시 2018. 8. 2.

글: 구축함(驅逐艦)hd


북탑산은 신강지역 동북부의 산이다. 그 위치는 개략 알타이산과 준가르분지의 사이에 있다. 이 산은 서북에서 동남방향으로 흐르며, 길이는 약 80킬로미터, 너비는 약 25-50킬로미터이다. 면적은 2,400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최고봉의 높이는 약 3300미터이다. 이곳의 주위는 황량한 사막이고, 산의 지형도 복잡하고, 골짜기가 종횡으로 나이고, 나무가 무성하다. 그외에 이 산봉우리는 중국과 몽골간의 경계선이 된다. 산봉우리의 서쪽도로는 중국과 몽골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자고이래로 이곳은 소수민족 유목지구이다. 청나라때부터 지금까지 시종 중국에 속했다. 건국후, 이곳에는 목장이 건설되었다. 이름은 신강군구팔일목장이다. 현재 이 목장은 이미 북탑산목장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신강생산건설병단 제6사의 관할이 된다. 이곳은 우량한 목장이면서 관광명승지이기도 하다. 다만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 70여년전 여기에서는 놀라운 전투가 벌어졌었다.


먼저 간단히 이 전쟁의 배경을 소개하기로 한다: 신해혁명이후, 외몽골은 제정러시아의 선동하에 울란바투르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1912년 봄, 외몽골은 병력을 보내어 신강지구로 진입한다. 외몽골의 부대는 먼저 과포다(科布多)를 점령하고 다시 1913년 부터 신강의 알타이지구를 공격했다.신강주둔군은 침입을 격퇴했지만 실지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저 현상만 유지할 뿐이었다. 그후 쌍방은 여러번 규모가 크지 않은 전투를 벌인다. 외몽골은 소련의 지지하에 전혀 거리낌없이 신강지역의 많은 지역으로 진입한다. 신강의 주둔군은 계속하여 막아냈다. 그리하여 외몽골은 그다지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한다. 2차대전발발후 소련은 동쪽을 신경쓸 여지가 없었고, 외몽골은 잠시 조용해진다. 다만, 2차대전이 끝나자 소련은 다시 외몽골을 도와서, 신강지역의 영토를 침입하고자 한다. 


1947년, 당시 신강지구의 수비군 최고지휘관은 송희렴(宋希濂) 중장이었다. 그의 직무는 신강경비사령부 총사령관이다. 송희렴 장군은 신강지역의 많은 자료를 읽어본 후, 기병5군의 기병연대를 파견한다. 이 기병연대는 연대장 마희진(馬希珍)의 지휘하에 북탑산의 최고봉에 주둔한다. 마연대장은 산에 오른 후, 신속히 돌과 목재로 아주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다. 언제든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그해 6월, 외몽골의 변방군은 돌연 두 명의 대표를 파견한다. 사복을 입고 북탑산으로 와서 마연대장을 만난다. 이 두 사람은 이렇게 얘기했다. 이 땅은 몽골국의 영토라면서 마연대장의 부대에게 48시간내로 북탑산에서 철수하도록 요구한다. 마연대장은 즉시 거절한다. 쌍방은 이렇게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마지막으로 마연대장은 상부에 전보를 보내어 지시를 기다린다. 신강경비사령부가 이 전보를 받은 것은 이미 며칠이 지난 후였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주둔군은 외몽골를 저평가했다. 그후에 발생할 격렬한 전투를 전혀 생각지 못했다.


1947년 6월 5일 새벽, 외몽골은 1개 영(營)을 파견하고 거기에는 포병연대도 들어있었다. 개략 500명이다. 이들은 북탑산 최고봉 부근의 주둔군에게 공격을 감행한다. 외몽골군대는 한편으로 맹렬히 포화를 주둔군의 군영으로 쏘면서, 한편으로 5대의 5개의 붉은 별이 그려진 비행기가 수비군의 방어선을 저공비행하며 폭격했다. 다만 북탑산의 수비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수류탄과 경무기로 계속하여 외몽골군대의 진격을 막아낸다. 격전은 오후까지 계속된다. 마침내 외몽골군은 물러난다. 그러나 외몽골군의 포화는 심야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북탑산의 수비군은 15명이 사망하고, 외몽골군은 근 40명이 사망했다. 그날 저녁, 마연대장은 긴급히 기병5군의 군장 마정상(馬呈祥)에게 연락하여 이 사건을 보고한다. 그리고 소련이 비행기를 출동했다고 말하며, 증원을 요청한다. 6일 오전, 마군장은 일찍 송희렴장군을 만나서 증원을 요청한다. 연구검토후, 송희렴은 1개의 기병단 1500명가량을 파견하여 북탑산으로 보낸다. 동시에 자동차연대, 낙타부대를 북탑산부근으로 보내어 물자조달업무를 책임지게 한다. 그외에 송희렴은 수비군을 표창했고, 동시에 서북행원과 남경의 국방부로 전보를 보내어 이 사건의 내용을 보고한다.


6월 7일, 근 400명의 외몽골군이 10여대의 소련전투기와 20여문의 대포의 엄호하에 다시 한번 북탑산을 공격한다. 북탑산 수비군 100여명은 마연대장의 지휘하에 사기가 높았다. 진지에서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한번 또 한번의 외몽골군 공격을 막아낸다. 동시에 북탑산 부근의 소수민족무장부대는 우두머리인 오스만(烏斯滿)의 지휘하에 외몽골군의 진지를 급습한다. 오스만은 단창필마로 외몽골군의 기관총진지로 돌진하여 기관총사수 2명을 죽이고, 중기관총 1정을 탈취한다. 외몽골군은 계속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공세를 강화한다. 그리하여 여러번 수비군의 진지로 돌입했다. 다만 즉시 물리치곤 했다. 마지막으로 송희렴이 보낸 기병단이 마침내 전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즉시 반격을 개시한다. 외몽골군은 사상이 심각하고, 형세도 불리하여, 북탑산 북부의 높은 산으로 철수한다. 이번 전투에서 수비군은 20여명과 십여필의 전마를 잃고, 소수민족무장부대의 손실은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다. 외몽골군은 시신 30여구를 남겼고, 부상자는 그 배가 될 것이다. 중국군은 적지 않은 무기를 노획했는데, 1문의 소포, 3정의 기관총, 20여개의 소총과 2개의 권총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선통신기도 한대 빼앗았다. 소수민족무장부대가 획득한 것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국군은 외몽골군의 문서를 약간 입수했는데, 거기에는 참전부대이 편제표와 작전계획도가 들어 있었다. 통역을 통해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소련인이 외몽골군에게 북탑산을 점령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신강북부의 3구세력이 남하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송희렴은 즉각 이 문서와 소련군이 비행기를 보내어 도와준 상황을 남경의 국방부에 보고한다. 국민정부는 이를 신문과 매체를 통하여 널리 알리고, 소련과 외몽골의 침략행위를 규탄한다. 동시에 외교부서는 양국정부에 항의를 전달한다. 다만 외몽골에서는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군대가 외몽골 경내로 침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때의 장개석은 내심으로 아주 갈등이 많았다. 그는 소련이 사태를 확대하는 것도 걱정했고, 외몽골과 신강북부의 3구세력을 도와주는 것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신강은 중국에서 분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정부는 내전에서 손실이 심각해서 신강지구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신강지구에 주둔하는 부대에 전투준비를 강화하고, 수시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북탑산전투는 금방 다시 발발한다.


6월 9일, 외몽골군대는 사람을 보내 사망한 관병의 시신을 수습한다. 그런데, 수비군의 진지 앞에서 떠나지 않다가 금방 수비군의 포화에 쫓겨간다. 6월 15일, 외몽골군의 한 기병연대가 소련의 탱크와 장갑차의 엄호하에 수비구과 1시간동안 상호사격을 가했다. 쌍방 모두 수인의 사망자가 나온다. 6월 17일, 외몽골군은 대포와 탱크를 이용하여 수비군의 진지에 일제사격을 가한다. 수비군은 이들을 격퇴한다. 6월 20일, 쌍방은 수십분간 사격을 상호 가한다. 외몽골군은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다. 6월 26일, 천명이 넘은 외몽골군이 20대의 소련비행기의 엄호하에, 다시 북탑산을 공격한다. 전투는 반나절동안 지속되었고, 수비군은 50여명이 사망하고, 외몽골군은 80여명이 사망한다. 결국 외몽골군은 물러난다. 6월 27일, 소련의 60여문의 대포의 엄호하에, 천명이 넘는 외몽골군이 다시 공격한다. 수십명의 사망자를 내고는 다시 물러난다. 7월 3일, 외몽골군은 비행기와 대포를 출동하여 200여발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1700여발의 포탄을 발사한다. 다만 보병과 기병은 진지로 진입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다. 7월 5일이후, 전투는 조용해진다. 1948년, 쌍방은 전후로 수십차례의 소규모 교전을 벌이다가. 1948년 9월에 전투를 멈춘다.


1949년, 제1야전군은 팽덕회의 지휘하에 감숙의 하서주랑으로 진입한다. 주력부대는 주천, 옥문, 안서, 돈황일선에 집결한다. 신강의 신임 경비총사령관 도치악은 홍색부대가 호호탕탕하게 밀려오자 막을 수가 없다고 보고 그해 9월 7만여명의 관병을 이끌고 기의를 선포한다. 신강은 이렇게 평화적으로 해방된다.


관련자들의 이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송희렴: 신강경비사령부 총사령관. 신강을 떠난 후, 병단사령관과 천상악변구수정공서 주임을 맡는다. 마지막에 대도하부근에서 패전하여 포로가 된다.

마정상: 기병5군군장. 도치악을 따라 기의할 것을 거절하고, 신강을 떠난다. 나중에 대만으로 간다. 팽호방위부 부사령관이 된다.

마희진: 기5군의 연대장. 북탑산 수비군의 지휘관. 전후에 크게 표창을 받으나, 그 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오스만: 소수민족무장의 우두머리. 신강의 해방이후, 거병하여 신정부에 항거한다. 실패한 후 처결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