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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천년전 사마르칸트의 벽화(고구려사신도 포함)

by 중은우시 2017. 8. 7.

글: dagezi


1999년에서 2007년 사이에, 유엔 고고발굴팀은 중앙아시아 5개국과 인도북부의 "현장의 길"에서 중대한 발굴성과를 거둔다. 수백개의 불상, 2만평방미터의 벽화. 같은 시간, 중국북방에서도 연이어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왔던 소그드인의 북조에서의 문물들이 출토된다. 그리고 "현장의 길"의 성과와 서로 호응되었다. 이들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은 비단길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연구에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오늘 소개할 것은 중앙아시아 아프로시압궁전펵화이다.


2003년, 필자는 런던대학에서 프랑스 중앙아시아학원의 요청을 받아, 사마르칸트 고성의 고고발굴에 참가한 바 있다. 사마르칸트 고성은 1220년 징기스칸에 의해 파괴되었고, 새도시는 명나라초기 테무르칸이 새로 건립한 것이다. 우리는 남색의 베베하넌 청진사를 볼 수 있었고, 그 곁이 바로 도시의 표지인 소그드상인이 비단길 위를 걷고 있었다. 


사마르칸트라는 이 도시는 비단길에서 어떤 특징을 지녔는가? 그것은 일찌기 로마인과 장안인이 함께 그리워하던 곳이다. 로마인은 알고 있었다. 사마르칸트 낙타무리의 방울이 울리면 동방의 비단이 온 것이다. 장안인도 알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보석, 인도의 진주는 사마르칸트의 낙타방울소리와 함께 왔다. 유라시아 비단길에서, 사마르칸트는 십자로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은 아프가니스탄의 북부, 아무강과 시르강의 사이에 위치한다. 북쪽은 투르크초원이다. 남쪽은 인도이고, 동쪽은 한,당제국이다. 서쪽은 페르시아이다. 더 서쪽으로 가면 로마와 비잔틴제국이 나온다. 바로 그곳이 이런 십자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문화는 다양성이 있다. 그리스의 문화, 페르시아와 인도의 문화, 그리고 당나라의 문화가 모두 사마라칸트에 섞여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경전을 가지러 간 당승이 신강을 떠나서 인도에 도착하지 전에 기실 계속 중앙아시아 5개국을 걸어갔다. 그 가운데 사마르칸트는 가장 중요한 도시이다. 기실 <셔유기>에도 얘기하고 있다. 당승이 구구팔십일 난을 겪는데, 그중 아주 중요한 것은 바로 사자왕(獅子王)을 만나는 것이다. 그 후에 우마왕(牛魔王)을 만나고, 반사동(盤絲洞)과 비파정(琵琶精)을 만난다. 중앙아시아의 사막에서는 정말 거대한 거미와 거대한 전갈이 나온다. 그래서 당승이 겪은 고난은 완전히 소설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것이다.


당시 성당(盛唐)때, 사마르칸트인은 소그드인이라고 불리웠다. 소그드인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를 들업자. 안록산. 안록산은 바로 소그드인이다. 그의 고향은 바로 사마르칸트이다. 소그드인은 동페르시아언어를 쓴다. 그들의 인종은 동부 페르시아인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달콤하게 잘한다. 손에는 아교를 붙여서 다른 사람의 돈을 묻혀서 가져올 수 있다. 그들은 아주 성공한 상인이다. 나중에 이 종족은 중국으로 와서 대사사신(大使使臣)이 된다. 혹은 각양각색의 음악가, 예술가 혹은 장인이 된다.


사마르칸트 고성이라는 이 고고발국지역은 2천년에 걸쳐서, 소그드 본토의 청동시대부터 알렉산더대왕의 동부정벌의 그리스성까지, 그리고 다시 전 이슬람시대의 청진사(모스크)까지 여기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이 아프라시압(Afrasiabm 大使廳)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고성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 궁전건축의 비교적 중요한 주청(主廳)이다. 





당시 프랑스-우즈베키스탄 고고발굴팀 팈장은 프랑스의 거러나이였다. 거러나이는 우리 고고발굴팀을 이끌었는데, 우리 발굴팀은 주로 여자였고, 동쪽에서 아프라시압으로 들어갔다.


동쪽은 인도의 서사시장면이다. 반대편입구는 돌궐의 무사와 팔국의 사신이다. 북쪽의 벽에는 당고종과 무측천의 형상이 나온다. 이는 대당의 황제와 황후가 성당시기에 처음 외국에 나타난 것이다. 남쪽벽은 소그드왕이 신년에 출행하는 장면을 그렸다.





이것은 채색의 복원도이다. 그림은 약간 좁게 그린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볼 수 있다. 그 대청은 아마도 오늘날의 극장만큼 크다. 당시 그곳의 최고 높은 곳까지의 높이는 거의 4미터에 이른다. 성당때 일찌기 나무로 된 기둥과 꽃을 조각한 천정이 있었을 것이고, 햇볕이 위에서 비쳐 들어왔을 것이다. 이 사방은 각 국가의 사신이 벽에 놓여진 쇼파에 앉아서 음악과 가무를 감상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면서, 한편으로 아름다운 벽화와 사시를 보았을 것이다. 전체 배경은 남색의 청금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것은 왜 무측천과 당고종의 그림이 이곳에 그려져 있느냐는 것이다. 대당과 소그드의 관계는 일찌기 아주 긴밀했다. 그것은 631년, 당태종이 동돌궐 물리치고, 서역 36국을 손에 넣었다. 658년, 당고종은 서돌궐을 물리치고 하룻밤만에 중앙아시아 5개국은 모조리 당나라판도에 들어온다.


우리는 볼 수 있다. 이곳은 시르강이 있고, 아무강이 있다. 중간의 이 소그드지역은 강거(康居)도독부로 불리웠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호인들은 장안과 낙양에 많이 들어와 있었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서 비로소 소그드지역은 완전히 당나라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강국으로 소그드 화가는 당고종과 무측천을 칭송하려 한 것이다. 우리는 볼 수 있다. 벽화에서 당고종은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고 있다. 상림원은 성당의 야생동물원에 해당한다. 서안의 교외에 있다. 곁에는 강이 있어서 분리되는데 바로 곡강지(曲江池)이다. 현재의 대당부용원(芙蓉園)이다. 왼쪽은 무측천이 용주를 저어가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려진 것은 야외활동하는 장면이다.





왜 이 벽화는 진귀하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황제와 황후의 모습은 모두 옷을 제대로 갖춰입고 보좌에 앉아있는 모습이지 그들의 생활장면은 없다. 그런데 소그드화가는 성당의 무측천이 살아있을 시기에 우리에게 당시의 고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당고종이 사냥하는 장면을 한번 보기로 하자. 이 장면은 실제로는 당태종의 모습을 본떴다. 당태종은 당시 서역의 각 민족들에게 천가한(天可汗)으로 칭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고종은 병이 들어 골골하고 어지럼증을 앓는 모습이다. 그가 사냥을 다녔는지는 우리가 모른다. 다만 당태종은 일찌기 대당의 최고의 궁수였다. 그가 고창왕 국문태(鞫文泰)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은 활을 쏘면 백발백중이고 풀이 짧고 말이 살찌는 때가 되면 아주 뛰어난 사냥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만 당시에, 위정도 이로 인하여 그와 크게 충돌한 바 있다. 위징은 당태종에게 상림원에 가서 놀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황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되면 우리 대당은 하룻밤만에 영명한 군주를 잃게 된다고 했다. 당시에 위징은 온갖 말로 2시간여를 권하였고, 당태종은 흰색 해동청을 그의 품 안에 숨겨놓아야 했다. 그래서 이 일은 당태종을 머리아프게 했다.


표범도 있었고, 상림원에서 길렀다. 그리고 이 표범은 <책부원귀>에 따르면, 정말 사마르칸트 부근의 산에서 붙잡아 진공한 것이라고 한다.


표범이 서 있는 모습은 실제로 소그드의 또 다른 벽화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연대가 조금 뒤이다. 당현종 시기 부하라고성의 와라허샤 홍청에 있다. 여기에서 표범은 서 있는 모습이다. 이것을 영웅이 코끼리를 타고 사냥하고 있다.





성당 때 사냥문화는 실제로 귀족층에서 아주 유행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하나는 무측천의 손자인 의덕태자묘 용도벽화에 표범을 순화시키는 호인이 그려진 바 있다. 그는 아주 멋진 운표(雲豹)를 끌고 있다.





그리고, 바로 무측천의 아들인 이현 장회태자묘의 벽화에서도 대형 사냥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기실 이는 성당의 황제와 황후의 생활에 아주 가까운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얘기해야할 것은 이런 그림의 배후에는 하나의 iconology가 있다는 것이다. 즉, 소그드화가가 왜 이렇게 성당의 황제를 칭송했는가? 왜 이런 장면을 뽑았는가. 그가 적을 죽이는 장면도 아니고, 영웅스럽게 전투를 벌이는 장면도 아니고, 왜 이런 사냥장면이었을까? 왜냐하면 이는 페르시아문화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는 제왕이 그의 문치무공(文治武功)을 드러낼 때, 그가 멧돼지를 사냥하거나 사자를 사냥하거나 표범을 사냥하는 장면을 그린다. 이는 페르시아문화권의 아이콘인 언어이다. 


무측전이 용주를 타는 것은 고고학자들 사이에 여러가지로 말들이 많다. 왜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과 용주를 그렸을까?





고고발굴팀장인 거러나이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은 사막국가이다. 당연히 분수를 그리워하고, 나무그늘을 그리워하고,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그리워한다. 그들은 이런 강남분위기의 이국정서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캉마타이는 이렇게 말한다. 남쪽 벽에는 페르시아의 신년이 그려져 있다. 페르시아의 신년을 당나라에 대응시키면 바로 단오절이 된다. 그는 이것을 무측천이 종자(棕子)를 던지는 자세라고 본다. 종자를 던져서 굴원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탈리아 버전이다. 필자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나는 어찌하여 굴원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궁녀의 머리모양은 쌍환망선계(雙環望仙)이다. 초당의 머리모양이다. 무측천 본인은 궁녀일 때 이런 머리모양을 한 적이 있다. 즉 아주 정확하게 그렸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비파, 목두장(木頭), 운화금(雲和琴)이다.





운화금은 중국에서 아주 보기 드문 문물이다. 초당의 상리수석곽(上李壽石槨)의 선각(線刻)에서 한번 나타난 적이 있고, 아스타나 초당시기 장예신(張禮臣)의 벽화에서 한번 나타난 적이 있다. 다만 세번째 사례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나타난 것이다. 국가박물관의 손기 선생은 이를 전문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소그드의 화가는 당시 아주 정확하게 이러한 세부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는 말했다. 용주는 아주 이상하다. 이 용주는 우리가 본 적이 없다. 무측천은 구명정같은 작은 배에 탔을 리가 없다. 최소한 2층높이의 서화화방(畵舫)같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 용은 중앙아시아의 용이다. 그것은 황금을 수호하는 Griffin이다. 즉 매의 입, 사자의 몸을 가진  짐승(鷹嘴獅身獸)을 용으로 한 것이다. 그들은 중국의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 문물을 본 것은 중앙아시아에서 출토된 토하트 이 샤진의 유적이다. 이 유적지에서는 상아로 된 활통이 나왔는데, 역시 응취사신수의 모습이다.





이 회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한번 얘기해보자. 그것은 불교세계의 불국정토를 얘기한다. 수나라와 당나라초기에 돈황과 크자르에서 모두 여러번 출토된 바 있다. 물고기도 있고, 원앙도 있고, 작은 연꽃이 살짝 뾰족하게 봉오리를 내미는 것도 있다. 각양각색의 수생동물도 있다. 어떤 때에는 연꽃 위에 동자가 있기도 하다. 





이것은 중국의 언어이다. 불교라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또한 중앙아시아의 화가가 보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광경을 황후와 연결시킨 것이다.


우리는 다시 남쪽벽의 소그드왕출행도를 보기로 하자.





우리가 보는 것은 황금색의 소묘(小廟)이다. 안에는 3명이 발끝을 들고 있는데, 마치 발레를 추는 것같다. 그것은 그들의 신이다. 그들이 신은 비교적 힘들다. 어쩔 수가 없다.





가장 앞에 걸어가는 것은 이상하게도 황제가 아니다. 국왕도 아니다. 황후이다. 황후는 돌궐의 공주이다. 그녀는 소그드에 시집와서 황후가 되었다. 황후의 지위는 아주 높다. 그래서 그녀가 가장 앞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탄 것은 코끼리이다. 국왕은 말을 탔다. 


우리는 알고 있다. 코끼리는 타기 어렵다는 것을. 이 코끼리는 어디서 왔을까? 중앙아시아에는 코끼리가 없다. 코끼리는 북인도에서 온 것이다. 당시 북인도는 백흉노(白匈奴)라는 국가가 지배하고 있었다. 뒤에 걸어가는 것은 기실 바로 두 명의 백흉노의 사신이다. 그들은 흉노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혼혈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화"된 대하의 현지인과 이주해간 흉노부락과 서로 피가 섞인 후대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초원민족에서 북인도의 소왕궁으로 변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당시에 확실히 호화스러웠다는 것은 알고 있다. 보라 그들은 금과 은으로 몸을 장식하고 있다.


그들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필자의 생각으로 대사(大使)의 권장(權杖)이다. 다만 고고발굴팀장인 거러나이는 거위머리를 때리는 것, 즉 거위를 죽이는 무기라고 말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건 너무 살풍경하지 않은가. 다만 우리는 뒤에 4마리의 흰거위를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게 거위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내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것은 타조이다. 왜냐하면 신강의 칠과성은반에도 타조가 나온다. 타조는 중앙아시아 특산이다. 그들이 걷는 모습은 타조이다. 나는 말했다. 중앙아시아인은 아주 교활하다. 우리 중국인은 아주 성실하게 돼지머리, 소머리를 잘라서 받들고 묘당으로 간다. 다만 중앙아시아인은 제물을 살아있는 채로 데려가고 거기서 죽인다.





뒤에는 흑색의 공안마(空鞍馬)가 있다. 이것도 제물이다. 이 주인은 이미 사망한지 1년이 되었고, 그 후에 안장이 비어있는 말은 죽여버린다. 


뒤에 있는 2명은 어던 사람인가? 아주 재미있다. 배화교(拜火敎)의 제사(祭司)이다. 왜 그들 둘을 제사라고 하는가? 우리는 볼 수 있다. 6월의 여름에 그들은 아주 두터운 마스크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성화단의 앞에서 조작할 때는 타액이 성화안에 들어가서 성화를 오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입에 마스크를 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은 당연히 당고종과 같은 크기의 거대한 소그드왕이다. 그의 말 다리에는 호접결(蝴蝶結)이 매어져 있다. 당연히 이 안장이 비어있는 말도 호접결이 매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마도 그의 부친이 일찌기 탔던 말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여자들이 모두 호접결을 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희한한 일도 아니다. 다만 당나라때, 그것은 페르시아 왕가만 할 수 있는 표지였다. 아무나 호접결을 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호접결을 맸다면 그것은 참월(僭越)이다.





우리는 동인도사서의 장면도 보도록 하자. 왼쪽과 오른쪽은 기실 서로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궁전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왼쪽과 오른쪽은 깨서 열었다. 우리가 보는 상황은 왼쪽에 쪼그리고 앉은 사람고 앉아 있는 사람이다. 중간에는 '남구(藍球)'가 있고, 곁에는 기마무사가 있다.





우선, 비결은 그 '남구"에 있다. 이 '남구'는 파란 구슬이 아니라 혼천의(渾天儀)이다. 앉아 있는 사람은 스승이고 그는 그리스인이다. 흰 겉옷을 입고 있다. 역시 맨발이다. 그는 프톨레미로, 동인도의 학생에게 천문을 가르치는 것이다. 확실히 당시 인도의 천문학은 그리스계통이다.


오른쪽은 뚱뚱한 사내아이들이다. 그것은 인도판의 큐피트이다. 기실 그는 하나의 큐피드이다. 다만 그는 한 무리로 변신하여 화살을 쏘는 것이다. 그는 아무렇게나 쏜다. 어쨌든 사랑은 맹목적이니까.





그들은 누구에게 쏘는가? 인도의 신 크리슈나(Krishna)이다. 크리슈나는 그들에게 마구 화살을 맞은 후에 졸지에 수십명의 소모는 여자들을 사랑하게 된다. 모두 비슷하게 생겼고, 그가 매번 사랑하는 여자는 서로 다르다. 아주 비참한 사랑이야기이다.


곁에는 늪이 있다. 이는 인도의 못으로 강남의 연못과는 조금 다르다. 다만 이 열대 못에는 새가 있고, 거북이 있고, 개구리가 있고, 작은 새도 있고, 오리도 있다. 한 사내는 바로 청소년시대의 크리슈나이다. 그는 소꼬리를 붙잡고 못 속으로 뛰어든다. 


곁에는 모친이 있다. 그의 젊은 양모이다. 영아시대의 크리슈나는 양모의 품안에서 큰 새의 습격을 받는다. 전체 이야기는 바로 인도의 사시에 나오는 상황이다. 


성당에도 인도인의 형상이 있다. 이는 초당 염립본이 그린 <직공도>이다. 그것이 나타내는 것은 당나라때 사신이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광경이다. 앞의 이 인물은 귤황색으로 부처와 닮았다. 아래는 발에는 발찌가 있다. 그는 인도인이다. 말에 타고 있는 것은 최초의 이슬람의 무하마드의 제자이다. 역시 바다에서 와서 종교를 전한다. 뒤에는 모두 해상의 공물들이다.



성당이후 운남 검천석굴에도 인도인의 형상이 있다. 뒤에는 금나라때 산서의 인도인이다. 모두 상당히 사실대로 만들었다고 느껴질 것이다. 전체는 발리우드영화에 나오는 화난 아줌마같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얘기할 것은. 기실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즉 서쪽벽의 돌궐무사와 8국사신이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소그드인, 백흉노인, 인도인과 당나라사람을 보았다. 다시 우리는 보도록 하자. 여기에는 페르시아사신이 있다. 중앙의 위치에 당나라의 사신이 있고, 뒤에는 돌궐, 토번이 있고, 그 뒤에는 고구려사신이 있다. 모두 4개국가이다.





우리는 그 광경을 보도록 하자. 이것은 상대적으로 일부 색채를 환원시킨 것이고, 상황이 비교적 명확하다. 중앙위치는 당나라 사람이다. 당시 소그드왕은 당고종의 책봉을 받았다. 당왕조의 사신이 중앙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들의 손에는 무엇을 들고 있는가? 마지막 사람의 손에는 누에고치(蠶繭)이다. 끝에서 두번재는 생사(生絲)이고, 그 앞은 백견(白絹)이다. 진 견으로는 말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은 한 필(匹) 한 필과 같이 견의 단위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곁에 머리카락이 긴 사람은 돌궐무사이다.




우리는 다시 돌궐인의 형상을 보자. 돌궐인은 어떻게 알아내는가? 그들은 모두 소변자(小辮子)를 땋고 있다. 위구르 아가씨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무술을 연마할 수 있는 호복(胡服)을 입는다. 손에는 통상 장검을 든다. 건릉과 소릉의 번신상(藩臣像)에서도 번령(飜領)의 호복을 입고 있고, 허리에는 접섭대(蹀躞帶)를 매고, 장검을 꽂았다. 이런 상황은 아주 자주 볼 수 있다.



무측천의 손자 의덕태자묘의 벽화에서도 대량의 돌궐 용모의 호장(胡將)이 의장대안에 나타난다. 확실히 그들은 돌궐계의 인물이다 계단모양의 화살통이 있다.



영태공주묘의 벽화에는 상관완아에 상당하는 여관이 있다. 그녀는 돌궐계의 번령호복을 입고 있고, 허리에는 접섭대를 차고 있다. 위에는 화도(火刀), 화석(火石), 투마(套馬)의 승자(繩子) 즉 말을 잡는 밧줄이 있다. 그리고 약간의 작은 돈주머니도 있다. 이 접섭대는 돌궐인이 발명한 것이다. 돌궐문화가 대당에 끼친 영향의 하나이다.




다시 왼쪽에 있는 세 명의 화려한 페르시아사신을 보자. 그들은 사서에 기록된 적악연나(赤鄂衍那)에서 왔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지방이다. 그들은 망명한 페르시아왕자 발루치가 파견한 사신이다.


이 세명이 사신은 직급이 매우 높다. 왜 그런가? 우리는 그들의 연주금포(連珠錦袍)에서 멧돼지머리와 공작을 볼 수 있고, 또 하나의 신수(神獸)를 볼 수 있다. 모두 알 수 있을 것이다. 수당의 의관제도는 "의관금수(衣冠禽獸)"이다. 금(禽)의 부분은 문관이고, 수(獸)의 부분은 무관이다. 이는 페르시아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멧돼지 머리는 아주 재미있다. 검은 멧돼지이다. 분홍색의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아니다. 이 양자는 구분이 된다. 위구르말에서 "챠오스야"는 집에서 기르는 돼지를 가리키고, 욕하는 말이다. 즉 멍청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검은 멧돼지는 서역인민, 중앙아시아인민이 아주 숭배하는 전신의 이미지이다. 그 이름은 Tunguz이다. 준가르퉁구스, 퉁구스는 바로 검은 멧돼지라는 뜻이다.


중앙아시아의 벽화에 검은 멧돼지가 전신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저팔계라는 천봉원수는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페르시아의 전신을 대표한다.





페르시아는 사신으로 왜 대원수, 대승상과 대제사를 사마르칸트로 보냈는가? 그들은 목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최후의 페르시아조정은 아랍인의 침입으로 공격받았고, 그들은 방법이 없어서 아프가니스탄지역으로 망명한다. 그 후에 바로 사마르칸트로 온다. 그 누에고치를 가져온 당나라사신과 만난 것이다. 왜 그랬는가? 당나라에 출병을 부탁하려 한 것이다. 


사실상, 당고종과 무측천도 확실히 병력을 일으켰다. 그들의 병마는 장안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쇄엽성(碎葉城)에서 출발한다. 바로 이백이 나중에 태어난 곳이다. 당시는 쇄엽성에서 병력을 일으켜 페르시아왕자를 도와서 70년간 저항한다.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는 발루치성이 있는데, 이 비극의 영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 광경은 각 국가의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어서 아래의 토번사신과 고구려사신을 보자. 토번사신의 표지는 머리에 머리띠를 두른 것이다. 이 머리띠도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련도(步輦圖)>의 가르 동찬, 토번의 재상은 매우 총명하다. 그도 머리에 머리띠를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입은 것이 소그드의 금포라는 것이다. 아마도 당태종이 그에게 하사한 것일 것이다. 번객금포(藩客錦袍)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고구려사신이 나타난다. 고구려사신은 머리에 두 개의 새털을 꽂는다. 조우관(鳥羽冠)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뒤에는 이들 특별히 긴 장모(長矛)와 귀면(鬼面)의 전고(戰鼓)가 있는데 고구려의 특산이다. 아마도 고구려가 아닐 수도 있다. 혹은 통일신라여도 좋다. 어쨌든 당나라때 한반도의 특산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사신이 성당때 머나먼 우즈베키스탄에 등장하기 대문에, 일거에 한국인들의 애국열정에 불을 붙였다. 현재 사마르칸트로 가는 한국인은 아주 많다. 기본적으로 원래의 일본관광객을 눌러버렸다.


그들도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의 보호작업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확실히 수천리밖에서 성당시기에 고구려사신이 있었으므로, 그것은 전체 한민족에게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소프트실력이 있을 때 바로 두 개의 도상이지만, 그것은 천년의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가 현재 보는 아프로시압의 서쪽벽 벽화는 상반부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알지 못한다. 아마도 위에는 사자보좌가 있었을 것이다. 사자보좌의 위에는 아마도 여신 나나가 있었을 것이다. 이 추측은 러시아의 마르샤크 교수가 내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마르칸트고성에서 멀지 않은 편치긍특성(片治肯特城)에서 대량의 나나여신이 손에 일월을 쥐고 사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나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거러나이교수는 그 사자보좌상의 위에는 소그드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책봉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여러 사절단이 축하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당시의 한 제기(題記)에 근거한 것이다. 거기에도 당고종의 책봉을 받은 것을 쓰고 있다. 그래서 소그드왕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독일의 마르크스 모드 교수는 새로운 의견을 내놓는다. 그는 서쪽 벽화의 창작연대는 아마도 638년일 것이라고 본다. 당시 돌궐이 아직 소그드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두 개의 중아시아신을 사자상 위에 그렸다. 그후에 곁에는 동돌궐칸과 서돌궐칸이 같이 앉아 있다. 왜냐하면 돌궐인이 서쪽 벽에 비교적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아마도 중요할 것이고, 그래서 아마도 돌궐벽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