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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당명황행촉도(唐明皇幸蜀圖)>: 당현종 피난의 진실한 기록

by 중은우시 2013. 11. 24.

글: 도몽청(陶夢淸) 

 

 

 

안사의 난으로 당현종은 축(蜀, 사천)까지 피난을 간다. 당시의 정경은 얼마나 낭패스러웠을까? 사서에 상세한 기록은 없다. 왜냐하면 황제가 피난가는 것은 추한 일이므로, 후세에 전하기 껄끄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역사의 구석을 찾아보면, 그래도 당현종 피난의 몇 가지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전문가는 말한다. 지금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 소장하고 있는 <당명황행촉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당현종이 당시 촉으로 피난간 진실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당명황행촉도>의 작자는 당나라때의 화가인 이소도(李昭道)이다. 이소도는 당현종 시대에 살았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는 당현종과 함께 촉으로 갔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렇게 생동적인 역사화면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당명황은 바로 당현종이다. 황제의 어가가 광림하는 것을 '행'이라 한다. 화면에서, 그려진 것은 황제가 한 무리의 인마를 이끌고 피난가는 광경이다. 왜 '행촉(幸蜀)"이라 했을까? 원래 황제의 체면을 고려하여, 완곡하게 피난을 '행촉'으로 미화한 것이다.

 

<담영황행촉도>는 현제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견본(絹本), 설색(設色), 세로 55.9센티미터, 가로 81센티미터이다. 작자는 당나라때 화가 이소도이며, 그림에서 묘사한 것은 안사의 난때, 당현종이 한 무리의 인마를 이끌고 험준한 산과 언덕을 넘어 촉의 땅으로 피난가는 광경이다.

 

전체 그림은 산수가 위주이고, 인물과 말이 보조적으로 그려져있다. 전형적인 당나라때의 청록산수화 작품이다. 화면에 비록 봄기운이 완연하고, 나무들이 녹색으로 변했지만, 봉우리와 산이 첩첩이 겹쳐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여, 생동감있게, '촉도난(蜀道難), 난어상청천(難於上靑天)"(촉으로 가는 길은 어렵다.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다)는 지형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험준한 산봉우리의 사이로 한 무리의 인마가 우측의 산속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대오의 중간에는 한 무리의 여자가 있고, 그녀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유모(帷帽) 혹은 개두(蓋頭)를 쓰고 있다. 바지복장을 입고 말에 타고 있다. 장거리를 온 모습이다. 낙타의 등에 실린 호피를 보면, 그녀들이 보통집안의 여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오를 이끄는 사람은 붉은 옷을 입은 남자이다. 나머지 사람들이 말에 흐느적거리는 모습으로 타고 있으며, 피곤함에 지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붉은 옷의 남자는 기우가 헌앙하고, 신태가 안상하며, 허리를 곧게 펴고 말 위에 타고 있어, 위엄있는 모습이다. 자세히 관찰하면, 그가 탄 말도 다른 말들과 다르다. 말의 체형도 건장하고 아름다우며, 말갈기도 세 개를 잘라서 꼬아놓은 모습이다. 이런 장식방법은 당태종의 소릉육준(昭陵六駿)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당나라때 어마(御馬)의 특수한 장식으로 "삼종(三鬃)"이라 부른다.

 

소위 "삼종"은 말의 목에 있는 털에 세 개의 돌기가 있는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삼종마는 당현종 전용의 어마이다. 송나라때 사람인 섭몽득(葉夢得)의 두 필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산수의 가운데 한 무리의 인마가 있고 그 안에서 앞장 선 사람이 탄 것은 삼종조야백(三鬃照夜白)이다. 이 말은 "작은 다리가 보이자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약간 놀랐다. <당명황행촉도>의 화면을 보면, 상황이 확실히 그러하다. 당현종이 탄 말은 작은 다리앞까지 왔고, 말굽을 딛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자세히 관찰하면, 화면에 나오는 당명황은 액운을 당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황제의 체면과 존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탄 준마는 산길을 가는데 익숙치 않고, 작은 다리를 만나자 마음 속에 두려움이 들어 말굽을 들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다리를 지나면 물자를 운송하는 대오가 있다. 그들은 어렵사리 기구한 산길을 걸어와서 냇물가의 평지까지 온 것이다. 그래서 바로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화면에 어떤 사람은 냇가에서 쉬고 있고, 어떤 사람은 바지를 걷고서 혼자 냇가에 있다. 어떤 사람은 바위에 기대어 앉아 있고, 손으로 발바닥을 문지르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당나귀, 낙타의 등에 실은 무거운 화물을 내려놓아 당나귀, 낙타가 편히 쉴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다시 하나의 작은 다리를 지나면, 더욱 기구하고 지나기 어려운 잔도(棧道)가 아논다. 산봉우리를 따라 바라보면 구불구불한 잔도가 있는데, 흰구름이 휘두르고 있는 산허리속으로 들어간다. 산은 뾰족하고 높아서 조금만 부주의하면 만장심연으로 뜰어질 수 있다. 또 다른 한 켠에는 짐을 진 부친이 아이를  데리고 다시 길을 나서는 대오의 뒤에 서 있다. 그들이 멀리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의복의 색깔이나 모자로 볼 때, 그들은 모두 보통백성이다. 깊은 산에서 이런 광경을 보게 되니 호기심에 이들 인마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당명황행촉도>의 화면 위쪽에는 청나라 건륭제가 쓴 시사(詩詞)가 있다: "청록관산형(靑綠關山逈), 기구도로장(崎嶇道路長), 객인각결속(客人各結束), 행리자주상(行李自周詳), 총위명화리(總爲名和利), 나사노화망(那辭勞和忙), 연진실성명(年陳失姓名), 북송근호당(北宋近乎唐)."(푸른 산길은 멀기만 하고, 구불구불 험준한 길은 길기도 하다. 사람들은 각각 짐을 묶었고, 자신의 짐은 자신이 잘 알 것이다. 모두 명성과 이익을 위한 것이니, 힘든 일이라고 어찌 마다할 것인가. 세월이 오래되어 성명은 알 수 없지만, 북송때 아니면 당나라에 가까운 때의 그림일 것이다.)

 

사실상, 청궁에서 쓴 <석거보급>에는 이 그림을 <관산행려도(關山行旅圖)>라고 하였다. 건륭의 시에서도 당명황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왜 나중에 이름을 바꾼 것일까? 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북송때, 송휘종은 이사훈(李思訓)과 이소도 부자의 그림을 아주 좋아해서 청하에 두 사람의 그림을 구한다. 다만 이 그림은 너무나 불길(不吉)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숨기게 된다. 건륭황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 <관산행려도>가 원래 대명이 자자한 소리장군(小李將軍)의 <당명황행촉도>라는 것을 몰랐고, 그는 그저 상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시사를 남긴 것이다.

 

<당명황행촉도>의 좌우구석에는 각각 "호량호씨(濠梁胡氏)"와 "상부도서(相府圖書)"라는 붉은 도장 2개가 찍혀 있다.  그 위치가 병렬적이고 마주하고 있는데, 모두 명나라초기 재상 호유용(胡惟庸)의 도장이다. 이 그림에 가장 먼저 찍힌 수장인기(收藏印記)이다.

 

이소도는 자가 희준(希俊)으로, 감숙 천수사람이다. 그는 당나라 종실출신으로, 저명한 화가 이사훈의 아들이다. 이사훈은 일찌기 무위대장군을 지냈고, 전공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다. 세상에서는 "대리장군"이라고 부른다. 그의 아들 이소도는 비록 관직이 태자중사에 이르렀고, 장군을 지낸 적은 없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의 부친의 명호를 따라 "소리장군"이라고 부른다. 이소도의 붓은 가늘며 섬세하다. 장려한 산하를 묘사하는데 뛰어났을 뿐아니라, 산림간의 인물, 마필도 세심하게 그려냈다. 역대평론가들이 "비록 콩같은 사람 마디같은 말이라도 눈썹과 수염이 나타난다(雖豆人寸馬, 亦鬚眉必現)"

 

이사훈, 이소도 부자는 청록산수에 능했고, 중국회화사상 '청록산수'의 창시자이다. 소위 청록산수라 함은 산수화에 농후한 청록을 진하게 칠하고, 회화방법은 구륵(勾勒)을 위주로 하며 붓은 세밀번쇄(細密煩瑣)하며, 색깔은 석청, 석록을 위주로 한다. 어떤 때에는 중점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금분(金粉)을 바른다. 그리하여 화면에 금벽휘황의 장식효과를 나타낸다.

 

<당명황행촉도>는 바로 전형적인 청록산수이다. 색깔은 화려하고, 전체 그림의 산봉우리가 기복이 있으며, 기세가 굉위(宏偉)하다. 화가는 숭산순령을 묘사하면서, 불투명한 청록광물성 안료를 겹겹이 칠했고 그 후에 다시 분명한 묵선으로 산의 선이 분명한 윤곽을 그려냈다. 화려한 청록의 색채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당성세의 궁정기세를 연상하게 할 뿐아니라, 중국회회사의 '청록산수'의 전형적인 모델을 만들었다.

 

중국회화사상 이사훈, 이소도는 '대,소리장군'으로 합친된다. 그들이 처음 만들어낸 청록산수는 후세의 산수화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중국당나라때, 이사훈의 산수화는 '국조산수제일'로 불린다. 동시대의 저명한 화가 오도자(吳道子)와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그의 그림은 색깔에 주의했고, 자주 청록질의 땅위에 금분을 발랐고, 금벽휘황, 호화부려한 효과를 나타낸다. 한번은 당현종이 그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평가한다: "네가 그린 산수는 통신(通神)할 수 있다. 내가 밤에 물이 흐르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현재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강범누각도(江帆樓閣圖)>는 전해지는 바로 이사훈이 그린 것이다. 화면의 창취(蒼翠)한 소나무풒에 몇 간의 집이 있는데 유심염정(幽深恬靜)하다. 냇가의 도로에는 놀러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한 사람은 말을 타고 나아가고,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른다. 냇가의 건너편에는 두 사람이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데 눈을 들어 멀리 쳐다보고 있다. 그저 강과 하늘이 멀리 보이고 돛대가 몇몇이 있어 마음이 탁 트인다.

 

이소도의 청록산수는 부친 이사훈의 진전을 이었다. 후세인들은 그가 "부친의 세를 바꾸어 묘하기는 부친보다 뛰어났다"고 말한다. '청출어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부친보다도 더욱 정교하게 그렸다. 이소도의 <당명황행촉도>에서 우리는 알아볼 수 있다. 화가는 먼저 아주 세밀한 선으로 산석, 수목 및 백운등을 그리고, 다시 청록으로 색을 입히며, 붉은 색을 덧칠했다. 그 정묘한 화법은 그의 부친이 그린 <강범누각도>보다 세밀하고 정교하다.

 

구도에서, 이소도의 <당명황행촉도>는 부친 이사훈의 <강범누각도>보다 굉대웅위(宏大雄偉)하다. 전체 화면의 구릉과 계곡의 험준함, 창망한 산림의 사이에 인물, 말 그리고 나무와 돌을 배치했다. 화면은 비록 복잡하고, 구체적이고 세세하지만, 구도는 엄정하며 기복이 있다. 이는 화가가 여러 방면의 예술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준다. 감히 중국청록산수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명황행촉도>를 제외하고,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는 이소도의 또 다른 작품인 <춘산행려도>도 보관하고 있다. 이 그림은 견본, 청록설색, 세로 96.5센티미터, 가로 55.3센티미터이다. 전체 그림은 봄날의 광경을 그렸고 전체 화면은 생기발랄하고 봄날의 기운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