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소동파(蘇東坡): <소상죽석도(蕭湘竹石圖)>

by 중은우시 2016. 3. 21.

글: 가음(佳音)



2010년 설날, 중국미술관은 "50년기증작품대전"을 열었고, 전람회의 눈에 띄는 위치에 놓여진 것은 등탁(鄧拓)선생이 1960년대에 기증한 중국화의 정품인 소동파의 <소상

죽석도>가 있었다. 이 그림은 전체 전람의 중심작품이다. 대문호 소동파의 회화작품으로 현재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2폭이다. <고목괴석도(枯木怪石圖)>는 항전시기에 일본에 흘러들어갔다. <소상죽석도>는 중국내의 유일한 그림(孤本)이다. 얼마나 진귀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식(蘇軾)의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고 사천 미주(眉州) 사람이다. 북송 사단(詞壇)의 가장 걸출한 대표인물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오랫동안 실의에 빠져, 생활이 힘들었고,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있으나,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동시에 저명한 화가로서 많은 재주를 지녔으나 뜻을 펼치지 못한 고대문인과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작품에는 굴원(屈原) 이소(離騷)의 정회가 들어 있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상죽석도>는 견본(絹本)이다. 세로 28센티미터, 가로 105.6센티미터이다. 화작은 장권식(長卷式) 구도를 채용하고, 호남성 영릉현 서쪽의 소강,상강의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동정호와 멀리 연결되는 창망한 경치를 표현한다. 전체 그림은 소상이수의 교회점을 중심으로 하여, 먼산과 안개낀 물, 비바람과 가느다란 대나무, 가까운 물과 구름낀 물,, 돌과 먼산, 대나무와 나무가 강렬하게 대비된다. 화면은 단계감이 풍부하여 사람이 화폭내에서 천리강산을 보는 것같다. 


소식은 간단한 모방자가 아니다. 회화에도 자신의 이론이 있다. 그가 그린 묵죽은 머리를 위로 세우고 올려보고, 마디는 거의 없다. 미불은 일찌기 물어본 바 있다: "마디를 좋아하지 않으시나요?" 소동파가 대답한다: "대나무가 나올 때 어찌 마디를 쫓아서 나온 적이 있겠는가?" 소동파는 이렇게 생각한다: "산석(山石), 죽목(竹木), 수파(水波), 연운(煙雲)은 비록 상형(常形)은 없지만 상리(常理)는 있다. (이러한 이치는) 고인일사가 아니면 알아낼 수 없다." 그는 화가가 그리는 것은 정신이라고 주장했고, 외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소동파는 그자신의 독보적인 공력이 있는 서예바탕이 있고, 고목죽석에 필의정취를 표현해서 한 유파를 만든다. 중국문인화의 '선하(先河)'를 개창한 것이다. 임어당(林語堂)은 일찌기 소동파의 그림작품은 중국예술의 인상파라고 평가한 바 있다. 중국미술관 부관장 양홍(梁紅)은 이렇게 말한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소동파 고본의 가치는 엄청나다. 현재 예술품시장에서 송나라때 서예작품은 수억위안에 경매된다. 만일 <소상죽석도>가 현재 경매된다면 최저가격이 4억위안이다."


<소상죽석도>의 권말의 단제에 "식위신로작(軾爲莘老作)"이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이는 소동파의 글과 풍격이 일치한다. 명나라때 여릉사람인 오근(吳勤)이 고증했다. 그림은 소식이 황주에 있을 때(1080-1085)에 손신로에게 준 묵보라는 것이다. 오근은 명나라 홍무제 초년에 과거에서 경학1위를 한 바 있고, 무창, 개봉부에서 강의를 했다 나중에 중앙정부의 사관(史館)에 들어가고 그의 제자는 천하에 아주 많았다.


낙관에 나오는 '신로'는 손각(孫覺)이다. 소동파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한 진사이다. "희녕4년(1071년) 십일월, 광덕(호주)에서 오흥(절강성 오흥현)으로 옮긴다." 손각과 소동파는 정치적 관점이 같았다. 사상도 아주 근접했다. 나중에 소동파와 함께 정치적박해를 받는다. 동파집에서 여러번 신로에게 주는 작품을 언급한 바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처음 황정견의 시문을 본 것이 바로 손각의 집에서라고 한다. 소동파는 황정견의 재능에 놀란다. 손각은 소동파에게 그가 이름을 날리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자 소동파가 크게 웃으며 말한다: "이 사람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간다. 이름을 날리고 싶지 않아도 안된다. 왜 이름을 날려야 하는가." 나중에 손각은 황정견의 첫번째 장인이 되고, 황정견은 비록 소동파와 나이가 비슷했지만, 시종 사도관계를 유지한다.


예술상의 비범한 조예를 제외하고도 <소상죽석도>의 가장 고귀한 점은 그것이 전해져 내려온 신세내력이 그림 속에 원,명의 26명이 포함되어 있고, 모두 합쳐서 3000자의 발문이 있다. 이 발문의 어떤 것은 있었던 일을 적었고, 어떤 것은 감상을 적었으며, 어떤 것은 단지 찬탄의 정을 표현했다. 근 천년동안 <소상죽석도>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보존된데는 역대서화감상가들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26명이 발문은 원(元)나라에서 시작하여, 명나라 가정(嘉靖)연간까지 이어진다. 도권은 원나라때부터 금릉 이가(李家)에 근 2세기동안 전해져 내려오며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았다. 오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림의 유전역사는 이 발문을 보고 알게 된 것이다.


원혜종 원통2년(1334년), 호남서화수장가 양원상(楊元祥)은 그림에 처음 글을 남긴 문인이다. 15년전에 양원상은 상중고가(湘中故家)에서 소식의 이 그림을 본다. 현재 고가는 이 그림을 팔려고 한다. 양원상은 남경 양태 두덕보에게 추천해서 구매하게 한다. 그리고 글을 남긴다. 상중고가가 어떻게 이 그림을 얻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명나라 홍무초년(1370년), 양대 이병중은 두씨에게서 이 그림을 구매한다. 그리고 보물을 얻은 것처럼 여긴다. 이병중의 아들 이종선은 새로 표구한 후 집안에 보관시킨다. 이종선은 이때부터 부친의 뜻을 받들어 이 보물을 굳게 소장한다. 전설에 따르면, 양나라 소명태자가 일찌기 양대의 법정사 누각에서 독서를 했다고 한다. 후인은 이 글읽기를 좋아하고 문장이 뒤어난 태자를 기리기 위하여 사묘의 옆에 2층짜리 누각을 만들었고, 문의 편액에는 "소명태자"독서루라고 쓴다. 원나라때는 "소문서원(昭文書院)으로 개칭한다. 이때부터 <소상죽석도>는 금릉 양대의 이 지방에 남게 된다.


명나라 가정37년(1370년), 금릉이가의 전인인 이갑봉(李甲峰)은 이 그림을 가지고 강양(江陽)으로 간다. 여기서우연히 나이 근 70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이곳을 지나던 명나라의 문학가 양신(楊愼, 호는 升庵)을 만난다. 그때 양신은 그림에 자신이 그림을 감상한 칠언발문을 썼다. 양신의 글은 <소상죽석도>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므로 그 발문 자체가 진귀한 예술적 가치를 가진다. 국무원 고적정리출판소조의 위탁을 받아 양신의 저작을 정리하던 왕문재(王文才)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국내에 현존하는 승암의 친필중 첫손 꼽을 만한 진품이다." 양신은 명나라때 "대예의"사건으로 황제에게 30년간 유배당한다. 바로 그가 소동파의 그림에 글을 쓸 때 운남순무는 다시 밀지를 받아 그를 체포한다. 다음 해 칠월, 양신은 영창(지금의 운남성 보산)에서 사망한다.


명나라 홍무초기에 이병중이 이 그림을 구입한 후, 아들 이종선에게 전해지고, 가정연간의 이갑봉은 이미 8대후손이다. 금릉이가는 이 그림을 얻은 후 대대로 전해내려가며 전세진보로 여겼다. 그 기간은 근 이백년이 된다. 나중에 그림은 시정으로 흘러들어갔는데, 누가 운좋게 이 그림을 가져갔는지는 지금 우리가 알 수는 없다.


근대에 이르러, <소상죽석도>의 개인소장가는 2명이다. 첫번째는 북양군벌 오패부(吳佩孚)의 비서 백견부(白堅夫)이다. 북양군벌 통치시기에, 백견부는 북경 풍우루 골동품점에서 소동파의 2폭의 그림을 사간다. 하나는 <고목괴석도>이고, 하나는 <소상죽석도>이다. 전자는 풍우루이 주인이 산동의 한 수장가에게 사온 것이고, 후자는 풍우루의 소장품이었다. 항전시기에 백견부는 <고목괴석도>를 일본인에게 팔아버려, <소상죽석도>는 중국내에 남은 유일한 소동파의 그림이 된다.


1961년, 백견부는 경제가 곤란하여, <소상죽석도>를 팔기로 결정한다. 그는 상해로 갔지만 팔지 못하고, 나중에 다시 북경으로 간다. 백견부는 <소상죽석도>를 그가 잘알면서 국가문물국 문물처 처장으로 있던 장형(張珩)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감정과정에서 전문가는 이를 진품이 아니라고 감정한다. 백견부는 화가나서 그림을 가지고 떠나버린다.


원래 가정37년(1558년), 명나라때 양신이 사천 노주(강양)에서 <소상죽석도>에 발문을 쓴 외에 일찌기 또 다른 원나라때 사람이 소동파의 벽화를 임모(臨摹)한 <풍우죽지도(風雨竹枝圖)>에도 발문을 써준다. 두 폭의 그림은 모두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두 폭의 그림을 같은 한폭의 그림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소상죽석도>도 소동파의 진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백견부는 심양고궁박물원 양인개(楊仁鎧) 선생이 북경에서 회의를 하기 위해 왔다가 양신을 찾는다. 양인개는 그에게 등탁을 추천해준다.


등탁은 중국의 저명한 학자로 인민일보사 사장 겸 편집장을 지냈다. 그는 신문, 문학, 역사의 여러 방면에 조예가 있을 뿐아니라, 문화재애호가, 수장가이며 감상가였다.


마침 등탁도 백견부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한번은 등탁이 외지로 출장갔다 돌아오는데, 영보재의 화가 허린려가 그에게 말해준다. 며칠전에 사천에서 온 노선생이 소동파의 <소상죽석도>를 가지고 영보재로 와서 가격을 물었다고. 손님이 가격을 비교적 높게 불러서, 영보재는 돈을 마련할 수 없었고, 그 손님은 가버렸다고. 등탁은 허린려에게 그 손님이 어디로 갔는지 물어본다.


<소상죽석도>는 업계내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그림의 진위는 일시의 난제가 된다. 소동파의 그림은 예전에는 책에서만 보았지 그림은 보지 못했었다. 소동파의 진품은 분명히 희세의 진보이므로 확실히 알아보아야 한다. 바로 이 때, 화가 주회민(周懷民)이 등탁에게 말한다. 그의 집에 일본에서 출판된 화책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소동파의 <고목괴석도>가 인쇄되어 있다고. 등탁은 즉시 주회민의 집으로 가서 한편으로 자세히 이 1척되 되지 않는 인쇄품을 보면서, 한편으로 주회민이 소개하는 소동파그림의 특징을 듣는다.


이 날, 화가 허린려는 백견부 및 <소상죽석도>를 가지고 등탁을 찾는다. 백견부의 역사적 배경이 특수하고, 당시는 특수한 시대임을 감안하여, 허린려는 단지 그림만 소개하고, 그림을 파는 주인은 소개하지 않았다. 그림을 펼치니, "준일한 구름의 기운이 화면에서 뿜어나오고, 화면의 언덕, 두 개의 괴석, 몇 개의 성긴 대나무, 좌우의 물과 산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상강과 소수가 서로 합쳐서 동정으로 밀리 이어지는 것같이 경치가 창망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탁 트이게 해주었다. 배회하며 응시하는데 차마 떠나기 싫었다." 등탁이 나중에 스스로 그림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소동파<소상석죽도권제발>>이라는 글에 쓴 내용이다.


등탁을 오랫동안 감상하고서 흥분하여 백견부에게 말한다: 당시의 이 그림은 나도 진위를 판별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진귀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연구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아주 좋아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있습니다. 노선생께서는 얼마면 되겠습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백선생은 격동하여 말한다: "당신이 보존해주면 저는 안심하겠습니다. 관건은 제가 지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등탁이 말한다: "고서에 기재된 소동파의 전세그림은 <고목괴석도>와 <소상죽석도> 두폭 뿐입니다. 만일 내가 그 중의 한 폭을 소장한다면, 그것은 나의 행운입니다."


백견부는 등탁이 이 그림을 아주 중시하는 것을 보자, 자신이 '지음'을 만났다고 여기고 가격은 금방 합의된다. 쌍방은 5000위안(일설에는 3000위안)으로 정한다. 당시에 5000위안은 적은 돈이 아니다. 등탁은 그 자리에서 2000위안을 주고, 나머지 3000위안은 3일내에 모조리 지급한다. 이 돈을 모으기 위하여, 등탁은 영보재의 경리와 화사를 모셔서 개인이 소장하던 그림중에 24폭을 골라서, 화사의 가격평가를 거쳐 3000위안을 마련한 것이다. 등탁은 <소상죽석도>의 마지막 개인소장가가 된다.


이 그림을 소장한 후, 소동파 그림과 관련된 것이라면 등탁은 모두 진지하게 연구한다. 그림의 진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그는 여러 화가, 서화감상가를 모셔서 함께 연구하고 판별했다. 일부 정계의 큰 인물들 예를 들어, 진백달, 강생, 저명한 화가인 오작인(吳作人), 황주(黃胄) 그리고 등탁의 지인인 소경광(蕭勁光), 부종(傅鍾)등이 모두 와서 감상한다.


아마도 나무가 크면 바람도 맍이 맞는 법이어서인지, 1963년 가을, 중앙의 어느 부서에서 통보를 보낸다. "등탁이 국가문화재인 서화를 강제매입, 경쟁매입한 후 다시 매각하여 불법적으로 수천위안의 이익을 얻었다." 곧이어 북경시위는 조사팀을 만들어 이 건을 조사한다.


원래, 등탁이 그림을 산 것으로, 한 권위자에게 미움을 산다. 왕력(王力)은 반성하면서 이 건을 기록했다. 그는 말한다: 이 '권위자'는 문화재를 잘 모르는 한 지부서기를 시켜, 등탁이 문화재투기를 한다고 고발하게 시킨다. 그렇게 하여 큰 파란이 일어난다. 유소기는 엄숙히 조사해서 처리하라고 지시하였고, 거의 모든 중공중앙의 상임위원과 다른 지도자들이 모두 OK한다. 북경시위도 그를 감히 나서서 보호하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상황을 잘 아는 당시의 대인물이 주필(朱筆)로 글을 써서 등탁은 이 문제에 있어서 죄가 없을 뿐아니라 공로가 있다. 어떤 전문가는 함부로 단정하고 세력을 가지고 사람을 누르려 하며, '사청'을 핑계로 삼아 등탁을 타도하여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 장기적으로 문화재 진지를 지키며 다른 사람들이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대인물은 또한 사람을 보내어 이 사건을 조사하게 한다. 영보재의 왕대산이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유소기에게 보낸다. 유소기는 즉시 이 보고서에 동의하여, 등탁의 그림구매풍파는 끝이 난다. 이 대인물이 바로 강생(康生)이다.


나중에 어떤 문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등탁이 미움을 산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강청(江靑)이었다고. 이 이야기는 후세의 문인들이 즐겨 얘기하는 것이고, 자주 볼 수 있다. 그중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은 진귀한 문화재의 불행한 명운만이 아니라 원로급 문화재감상가들의 처지였다.


'문화재불법매매'사건이 조사완료된 후, 등탁은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더 많이 <소상죽석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다. 1963년, 등탁은 <소동파소상적숙도권제발>이라는 글을 쓴다. 그는 이렇게 판단했다. 이 그림의 창작시간은 11세기 후반기이다. 당시 북송화원은 아직 성립되지 않았고, 소동파를 대표로 하는 문인화파는 직접적인 관찰의 방법으로 객관적인 사물의 특징을 개괄하여, 자유로운 사의(寫意)로 구속을 받지 않았다. 이는 중국회화사에 심원한 영향을 미친다.


1964년, 등탁은 허린려를 모셔서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고화중에서 신경써서 고른 <소상죽석도>를 포함한 144건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보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소장인을 날인한 후, 무상으로 중국미술가협회에 기증한다. 기증활동은 아주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의식도 없었고, 증서 한 장 주지 않았다. 소동파의 <소상죽석도>는 중국미술관의 진관지보가 된다.


등탁이 기증한 이들 소장그림중에는 수권(手卷)도 있고, 책엽(冊頁)도 있고, 입축(立軸)도 있으며, 중당(中堂)도 있다. 모두 명가의 작품들이다. 중국고대십대화가에 들어가는 서문장(徐文長), 팔대산인(八大山人)의 작품도 있다. 그리고 명나라때 4대가인 심석전(沈石田), 문징명(文徵明), 당백호(唐伯虎), 구십주(仇十洲)의 작품도 있다. 하나하나가 무가지보라 할 만하다.


1966년, 문혁이 시작되면서 요문원은 강청등의 지지를 받아, <연산야화>와 <삼가촌찰기>를 비판한다. <연산야화>는 '반당흑문(反黨黑文)'으로 규정된다. 그리하여 전국을 뒤흔든 억울한 사건이 탄생한다. 등탁은 그해 5월 18일 자결한다.


문혁의 십년호겁이 끝난 후, 1984년 봄, 국가문물국은 사치류, 계공, 양인개, 유구암, 서방달등 저명한 문화재전문가를 조직하여, <소상죽석도>에 대하여 감정을 진행한다. 등탁이 보존하고 기증한 <소상죽석도>가 소동파의 진적이라고 확인한다. 등탁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개인소장을 한 것은 개인적인 애호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을 개인재산으로 여기지 않았다. 일정한 때가 되면 자연히 국가에 바칠 것이다." 그는 한 말을 지켰다. 문물감정의 대가인 계공은 이 일을 평가할 때 이렇게 말했다: "호거(豪擧)라 해도 좋고, 치거(痴擧)라 해도 좋다. 민족문화에 심후한 감정이 있는 사람에 있어서, 이 거동의 예술은 소동파의 묵죽에 못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