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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목석도(木石圖)>는 소식(蘇軾)의 진적(眞迹)인가?

by 중은우시 2018. 12. 6.

글: 강보군(姜寶君)





2018년 11월 26일 저녁, 크리스티 2018가을경매에서 북송의 대문호 소식의 <목석도>(일명 <고목괴석도>)가 4.636억홍콩달러에 낙찰되어, 중국고대서화의 최고기록을 갱신하게 되었다.


<목석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한 그루의 고목과 하나의 형상이 괴이한 돌이 있고, 돌의 뒤에는 몇 그루의 키작은 대나무가 있다. 전체 그림은 "약어용기복지세(若魚龍起伏之勢)"를 보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소식의 낙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의 뒤에 유양좌(劉良佐), 미불(米芾)등의 제발(題跋)이 있다. 그것은 아주 보기 드문 "소미합벽(蘇米合璧)"의 작품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그림의 진귀함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목석도>는 소식의 유일한 진적이라고 말한다. 기실 국내에서, 몇 폭의 소식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역대이래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그 몇 건의 작품은 모두 <목석도>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한다. 이는 <목석도>의 지난한 여정과도 큰 관계가 있다; 이 수권(手卷)에 나타난 41매의 소장인은 각각 남송, 원, 명의 소장가들이다. 유독 청대에는 아무런 문헌기록이 없다. 북양정부시기에 이르러 이 그림은 다시 나타난다. 1937년 이 그림은 다시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 일본의 저명한 소장가인 아베 후사지로(阿部房次郞)가 소장하게 된다. 80여년후, 이 고화는 마침내 중국으로 되돌아왔다.


<목석도>가 엄청난 가격에 낙찰된 후, 그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크게 일어난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이것의 유전, 제발등 각도에서 논쟁을 벌였다. 청화대학의 담성광(談晟光) 박사는 북송시기의 역사어경(語境)을 환원시키는 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일찌기 금년 8월, <목석도>가 크리스티 가을경매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예술계에는 붐이 일어난다. 당시 마침 <묵죽소사>를 쓰고 있던 청화대학 건축학원 담성광 교수는 이 소식을 듣고 아주 격동한다. 15년전, 그는 소식의 그림에 대한 석사논문을 쓰면서, 참조할만한 자료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처리했다. 지금 <목석도>가 나타나니, 담성광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연을 만나서, 그는 홍콩으로 가서 근거리에서 <목석도> 원작을 감상할 수 있었다. 원작을 친밀하게 접촉해본 후, 그는 이 그림에 대하여 더욱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가장 소식의 원작에 근접한 것이다. 최소한 현재 우리는 그것이 위작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담성광은 이 그림의 제발 및 소장인등 방면의 논쟁은 차치하고, 직접 <목석도>라는 이 그림 자체를 얘기한다. <목석도>의 화면은 아주 간단하다. 한 그루의 고목이 형상이 괴이한 돌의 옆에 서 있다. 괴석의 뒤에는 몇 그루의 키작은 대나무가 뻗어 나와 있다. 이것은 아주 전형적인 '고목묵죽(枯木墨竹)"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소식은 자주 유사한 주제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한 흥미와 발전을 가져오는데 중요한 추진역할을 했다.


소식이 묵죽을 좋아한 것은 동시대의 예술가인 문동(文同, 1018-1079)의 영향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아는 성어인 "흉유성죽(胸有成竹)"은 바로 소식이 문동이 그린 대나무에 대한 평가에서 나왔다. 묵죽은 당나라때 흥성하는데, "묵죽이 흥기한 것은 강렬한 선도(仙道)의 관념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문동과 소식은 마찬가지로 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대나무는 수천년전에 용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동진때의 갈홍의 <신선전>과 <후한서.방술열전>에 모두 이런 "죽룡거화(竹龍巨化)"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동한 여남(지금의 하남성에 속함) 사람인 비장방(費長房)은 선옹(仙翁)에게 선도를 배우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선옹은  그에게 대나무지팡이를 하나 주었고, 비장방은 그것을 타고 곧 집으로 되돌아 온다. 그는 선옹의 말에 따라, 대나무지팡이를 대나무숲 속에 던져 넣었고, 비장방이 뒤돌아보니, 지팡이는 용이 되어 날아갔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여러 시문에서 언급된다.


대나무의 특수한 의미로 인하여, 묵죽의 형성과 유전은 아마도 도교의 기우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일지기 명확히 기록된 바도 있다. 당현종 개원19년(731), 소부감 풍소정이 용을 그려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빈다. 당목종 장경3년(823) 여름, 경조에 가뭄이 들었는데, 한유는 죽림신에게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며 <제곡강룡>과 <제죽림신문>의 두 글을 쓴다. 대나무와 용의 사이에는 천연적인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죽순(竹筍)은 '용손(龍孫)'이라고 불린다. 나중에 점점 예술작품들에서 대나무로 용을 대신하게 된다.


문동은 호가 석실선생(石室先生)이고, 석실은 바로 선실(仙室)이라는 뜻이다. 그는 도사들과 교유하고, 단약을 복용했다. 문동은 아주 경건했다. 그래서 대나무그림을 그린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소식은 어떤가? 담성광에 따르면, 비록 소식은 불교사상의 영향을 아주 깊이 받았지만, 실ㅈ로 어려서부터 도교에 심취해 있었다. 소식이 8살때, 도사 장역간(張易簡)을 스승으로 모신다. 어른이 된 후, 소식의 사상에는 아주 짙은 도교적 경향을 띄고 있다. 그리고 여러 도사들과의 왕래도 유지한다. 이 <목석도>는 바로 소식이 진강(鎭江)의 한 풍(馮)씨성의 도사에게 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목도 아주 강한 선도 관념이 들어 있다. 북송때, "장건승사과황하원(張騫乘槎過黃河源)"의 신화전설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황하원은 '천하(天河)'로 인식된다. 마른 나룻배는 용의 화신으로 본다(용의 뿔 모양은 고목과 비슷하다). 북송때 문동의 손을 거쳐 고목과 묵죽은 선도사상의 표현형식이 되고, 소식은 그것을 정형화시킨다.


1080년,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소식은 황주로 유배를 간다. 한번은 미불이 황주를 지나다가 소식을 보러 간다. "처음에 공을 만나니, 술을 얼큰하게 마신 후 말했다: 그대가 이 종이를 벽에 붙여주시오. 관음지였다. 그리고는 두 그루의 대나무, 한그루의 고목, 하나의 괴석을 그린다. 그리고 주었다." 고목, 괴석과 대나무는 소식이 실의했을 때 그림으로 그려서 가슴속의 울적함을 풀던 것이었다.


계속 창작하면서, 소식이 고목묵죽도를 그릴 때, '이전에 없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동시대의 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소식은 비록 문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화법은 문동과 차이가 있었다. 소식은 흥이 일어났을 때 그리는 방식으로 대나무를 그렸다. 그래서 당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평론한다: 장난스럽게 붓을 놀려 고목과 대나무 돌을 그리는데 비록 일시에 그려내지만 고금의 화풍을 벗어나서, 스스로 하나의 화풍을 이루었다.


담성광은 말한다. "위의 말로 <목석도>를 형용하면 아주 적절하다. 다만 아직은 이를 가지고 이것이 소동파의 원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목석도>를 고목묵죽을 주제로 한 그림의 전승에서 관찰해보면, 이 그림이 소동파의 원작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식이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휘종은 조서를 내려, 소식의 "편지지자(片紙只字), 분훼물존(焚毁勿存)" 즉 글자 한자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남기지 말라고 한다. '소학'은 북송말기에 거대한 난제를 만난다. 1127년, 금군이 개봉을 함락시킨 후, 소식등의 문집, 묵적을 많이 수집한다. 그후 금나라때의 북방은 '소학'의 중심지가 된다. 남송은 정주이학의 주요진지로 후세에 소위 '소학성어북(蘇學盛於北), 정학성어남(程學盛於南)"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왕정균(王庭筠, 1151 혹은 1156-1202)은 금나라때 가장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의 시와 묵죽은 모두 소식을 배웟다. 그도 "금원(金源)의 소동파"라고 칭해진다. 왕정균은 예술사상에서 아주 유명한 <유죽고사도(幽竹枯槎圖)>(현재 일본교토유린관에서 소장를 그렸다. 그것은 송,금,원시기 고목묵죽을 주제로한 승상계하(承上啓下)의 중요한 그림작품이다.


금나라가 1234년에 패망한 후, 원나라때의 북방한인은 기본적으로 북송과 금나라의 문화와 사상을 승계한다. 북방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고극공(高克恭, 1248-1310)과 이간(李衎, 1245-1320)의 예술창작은 왕정균의 영향을 받는다. 고목묵죽은 이 계보에서 이어진다. 남송이 멸망한 후, 고극공과 이간은 남쪽으로 내려가 관직을 지낸다. 그들은 예술에서 추구한 것이 왕정균으로부터의 취향이었다. 또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따라 점점 확대된다. 이와 동시에, 조맹부(趙孟頫)가 부름을 받아 북상하여, 경사에서 북인들과 만나면서 시야를 넓힌다. 그리하여 그가 나중에 예술창작에서 관념이 바뀌는 요소중 하나로 된다.


1300년 원나라때 저명한 서예가인 선우추(鮮于樞)는 왕정균의 <유죽고사도>에 발문을 쓴다. 조맹부도 발문을 1편 쓴다. 그 그림에게서 영향을 받아, 조맹부는 <수석소림도(秀石疏林圖)>를 창작한다. 그는 자제(自題)에서 후세에 유명하 "서화동원(書畵同源)"의 이론을 펼친다. 담성광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현존하는 믿을 수 있는 조맹부의 고목석죽을 주제로한 약 10건 가량의 작품에서 하나같이 서법입화(書法入畵)했다고 한다: 돌은 초서에 가까운 선으로 그리고, 고목은 필력이 강인한 전서같고, 대나무는 천천히 쓴 예서와 같다.


고목묵죽을 주제로 하는 그림은 북송의 문동, 소식과 금나라의 왕정균, 원나라의 조맹부를 거처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조맹부 이전에는 자종(恣縱)하고 법도가 없었다. 순수히 재미로 그린 것이다. 예를 들어 소식과 왕정균이 그러하다; 조맹부이후에는 예술가들이 자각적으로 서예의 선을 이용하여 이서입화(以書入畵)한다.


이런 전승체계가 있으므로 다시 세상에서 지금 소식의 작품으로 알려진 다른 작품을 보기로 하자. 그러면 <소상죽석도>(지금 중국미술관 소장. 1980년대에 진적으로 인정되었으나, 나중에 학계에서 이견이 제기됨)의 대나무와 돌을 보면, 돌은 비백(飛白)에 가깝고, 대나무는 팔푼(八分)으로 쓴 것같다. 서예성격이 아주 강하다. <육군자도권>(현재 상해박물관 소장)중 소식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고목총소>의 화면에서는 비록 서예성격이 결핍되어 있으나, 지나치게 딱딱하고 구속되어 있는 느낌이어서 송나라사람의 문헌에서 얘기한 소식의 묵죽은 '일점성월(一點成月), 일말성사(一抹成蛇)"의 스타일에 부합하지 않는다; 북경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소식의 작품으로 알려진 <고백도(古柏圖)>는 서방달 선생에 따르면, 화법이 조맹부에 가깝다고 한다. 오직 <목석도>만이 기법적인 성격이 비교적 약하고, 소식이 말한 '이저에 이런 그림이 없었다'는 것에도 부합한다. 또한 송나라사람들이 기록한 소식 묵죽의 유희성(遊戱性)에도 부합한다. 절대로 모앰부이후 묵죽의 서사성(書寫性)이 아니다.


이렇게 담성광은 창연한 느낌을 나타낸다: "전체 고목죽석을 주제로한 계보 중에서 <목석도>이 시대좌표는 의문의 여지없이 가장 이르다. 이것이 소식의 원작일지도 모른다고 믿을 이유가 있는가 없는가. 설사 소식이 원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시의 역사어경에 들어맞는다. 글래서 아주 중요한 작품이고 잘 연구할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