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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이상은(李商隱)과 유중영(柳仲郢): 줄을 설 것인가 말 것인가?

by 중은우시 2017. 8. 6.

글: 맹헌실(孟憲實)


관료로서 살다보면 관료사회는 부침이 있다. 항상 이런저런 집단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너는 줄을 설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한다. 줄을 선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그 집단의 실력의 강약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실력은 변한다. 그래서 줄을 서는 결과는 확실하지 못하다. 한때 잘나가다가 평생을 질곡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확실한 것인가 그것은 '잘 처신하는 것(做人)"이다. 모든 집단에 대하여 불편부당하게 정면으로 대해주고, 은혜를 받으면 갚고, 이익 앞에서 의리를 버리지 않는다. 이런 처신원칙을 취하게 되면 고속승진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풍부정(風不定)'의 관료사회에서 '인초정(人初靜)'할 수있게 만들어준다.


당나라 중후기의 관료사회에는 두 개의 경위가 분명한 집단이 존재했다. 우당(牛黨), 이당(李黨). 이당은 이덕유(李德裕)를 우두머리로 하고, 대부분은 명문거족출신의 권력귀족자제들이다. 과거시험을 치를 때도 비교적 용이한 명경과(明經科)나 혹은 부친이나 형의 관계를 통해 관직을 얻었다. 그러나 예법을 중시하고 행동을 조심했다. 가풍이 우량하고 엄격했다. 우당은 우승유(牛僧孺)를 우두머리로 하며 대부분은 중하층관리집안 출신이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과거를 치를 때도 난이도가 가장 있는 진사과(進士科)를 거쳐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행동이 경박하고 방탕하며 기율이 없었다. 두 그룹의 당쟁은 근 백년간 지속되었으며, 역사에서는 우리당쟁(牛李黨爭)이라고 부른다.


이상은과 유중영은 이러한 당쟁의 시대에 살았다. 유중영은 이상은보다 스무살정도 많다. 두 사람은 출신이 같다. 모두 과거 진사과를 통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인생에서 서로 교차하는 부분도 있다.이상은은 일찌기 유중영의 부하로 거의 8년간 재직한 경력이 있다. 두 사람이 관료사회에 진입한 시기는 우리당쟁이 한창 진행될 때로, 이당이 조정을 장악하고 우당은 조정에서 밀려난 때였다. 우당은 조정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우당이 권토중래한다면 역시 이당을 뿌리채 뽑아버릴 것이었다. 조정의 우리 양당의 대국면하에서 유중영과 이상은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이상은


이상은의 글은 아주 유명하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썼던 그는 우당의 영호초(令狐楚)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영호초는 이상은을 막부로 불러들여서 친히 그에게 조정의 여러가지 공문을 작성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자신의 몇몇 아들과 함께 공부하고 놀게 했다. 개성2년, 이상은은 과거시험에 참가한다. 영호초의 아들인 영호도(令狐)는 그해의 주고관(主考官) 고개(高鎧)와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래서 고개의 앞에서 이상은의 재화를 크게 칭찬한다. 영호집안의 도움으로 이상은은 순조롭게 진사과에 급제할 수 있었다.


진사가 된 후, 이상은은 먼저 비서성(秘書省) 교서랑(校書郞)이 된다. 그리고는 외직으로 나가 홍농현위(弘農縣尉)가 된다. 2년후에는 과거중 쾌속승진이 가능한 제거(制擧)의 중서판발췌과에 참가한다. 이번에 합격한 것도 영호초의 지도하에 각종 공문을 쓰는 법을 배워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중서판발췌과는 중점적으로 응시자의 공문작성수준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신이 과거에 합격하는데 우당의 영호초에게 은혜를 입었다. 이치대로라면 이상은은 당연히 우당에 속해야 한다. 우리당쟁때 그는 우당에 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당진영에 투신하지는 않는 것이 처신원칙에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유혹이 나타난다.


당시 조정은 이당의 세력이 컸고, 우당은 세력이 약했다. 이덕유는 조정의 보정(輔政)으로 그와 관계가 밀접한 왕무원(王茂元)을 하양절도사(河陽節度使)에 앉힌다. 왕무원은 이상은에게 하양으로 같이 가자고 청한다. 한쪽은 자신에게 은혜가 있는 우당의 영호초부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잘나가고 있는 봉강대리 이당의 왕무원이 있다. 이상은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고통스러운 고민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종적으로 빨리 승진하고 싶은 생각이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처신원칙을 눌렀다. 그는 이당의 품에 안긴다. 하양막부로 들어가 장서기(掌書記)가 된다. 얼마후에는 시어사(侍御史)의 관직을 얻고, 왕무원의 딸을 처로 맞이한다. 관료로서 순조롭게 승진하고 있었고, 가정도 봄바람이 불었다. 이번에 우당을 버리고 이당에 들어가면서 이상은은 사업과 애정의 두 방면에서 모두 풍성한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표먼적으로 보면, 이상은은 이번에 제대로 당파에 들어갔고, 줄을 제대로 선 것이다. 다만, 이처럼 우당을 버리고 이당에 들어간 행위는 우당에서는 배은망덕한 행위로 보았고, 특히 예법과 품성을 중시하는 이당에서도 멸시를 받는다. 짧은 기간동안 잘나갔지만, 이미 일생동안 진퇴유곡이 되어 양당 모두에게 버림받는 복선을 깔게 된 것이다. 


이상은은 우당을 버리고 이당에 들어가면서 잠시 순조롭게 승진했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왕무원이 사망하고, 이상은은 기댈 곳이 없어지자 장안으로 돌아와서 다시 기회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장안의 이당 거두들은 견리망의(見利忘義)한 이상은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상은은 장안에서 사방을 쑤셨지만 모두 막히고 마음에 드는 관직을 얻지 못하였다. 그저 천리 먼 곳인 계주(桂州)에서 이당 정아(鄭亞)의 막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선종 대중초년, 우당이 득세하면서 영호도는 조정에서 보정이 된다. 우당은 이당세력에 타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정아는 순주(循州)의 자사로 쫓겨난다. 이상은도 순주라는 추운 지방으로 따라갔다. 여러해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도 못하다가 대중3년이 되어 장안으로 돌아와서도 조정의 관직을 얻지 못하고, 잠시 경조윤 노홍정에게 의탁한다.


대중4년, 영호도가 재상이 되고, 우당의 세력이 흥성한다. 이상은의 처지는 더욱 궁핍하게 된다. 이제 희망을 거는 것은 다시 당을 바꾸어 처지를 개선하는 것이다. 이번에 그는 이당을 나와 우당으로 들어간다. 그는 여러번 영호도에게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호소했으나, 영호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외지로 나가는 노홍정을 따라 서주(徐州)로 간다. 노홍정이 서주에서 막부를 해산한 후에, 이상은은 다시 갈 곳이 없어진다. 그는 다시 영호도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영호도는 이번에 옛정을 생각해서 그의 요청을 받아준다. 그러나 이상은이 예전이 우당을 배신하고 이당에 투신한 배반행위를 고려하여, 영호도는 겨우 태학박사(太學博士)라는 실권이 없는 허직(虛職)을 줬을 뿐이다.


태학학사는 큰 뜻을 품고 있는 이상은이 만족할만한 관직이 아니었다. 이때 계속 그의 재화를 아끼던 유중영이 검남동천절도사로 부임한다. 이상은은 유중영의 요청을 받아 동천막부에 들어간다. 동천에 있는 동안, 이상은은 사방에 청탁하여, 조정에 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번에 그는 눈길을 조정에 들어가 보정으로 있는 하동절도사 노균(盧鈞)을 향한다. 그에게 시를 써 보내면서 자신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노균은 일찌기 영호도에게 배척당한 바 있으며, 다시 우당의 영호도에 투신한 이상은을 더욱 멸시했다. 그를 위하여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이상은은 동천에서 막부가 해산될때까지 동천에 머문다. 그후에는 정주 형양으로 옮겨갔다가 얼마후 우울하게 죽는다.


좌우봉원(左右逢源)의 유중영


똑같은 당쟁환경을 맞이해서, 이상은이 우당에 갔다가 이당에 가는 투기식 줄서기를 하는 것과는 달리, 유중영은 불편부당한 처신을 하고, 끝까지 일관한다.


이상은과 마찬가지로, 진사급제후, 유중영은 먼저 비서성에 들어가 교서랑이 된다. 얼마후 우당의 거두인 우승유를 따라 강하(江夏)로 부임하고, 우승유의 비호하에 관료로서 순탄한 길을 걷는다. 하층에서 단련한 후에 조정에 들어간다. 간의대부의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양당이익이 관련된 "오상옥(吳湘獄)"사건을 처리하면서, 공평무사하고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사건을 처리한다. 그리하여 이덕유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비록 최종처리결과는 우당에 유리하게 되었지만, 이덕유는 "이를 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가 공평무사하다는 것을 알아서, 그를 중시한다." 그후에는 이덕유가 유중영을 더욱 지위가 높고 권한도 중한 경조윤의 자리로 추천한다. 임명이 내려오자, 유중영은 이덕유의 집으로 가서 감사인사를 한다. 그리고 이전에 우승유의 은혜에 보답했던 것과 마찬가지로,이덕유가 발탁해준 은정에 보답하겠다고 말한다.


비록 이덕유의 인정을 받았고 추천을 받았지만, 유중영은 구체적인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사건 자체의 시비곡직을 근거로 처리했다. 간단하게 이덕유의 입장을 쫓지는 않았다. 유중영은 이부에서 관리선발평가업무를 할 때 이덕유로부터 압력을 받은 바 있다. 이덕유는 관료집안에서 태어나 과거에 참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관리선발시 진사출신의 관리들을 억눌렀다. 그러나 유중영은 이덕유의 압력을 버텨내면서, 사심없이 처리했고, 진사출신의 관리들도 비교적 공평하게 임용될 수 있었다.


나중에 유중영은 내정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들의 미움을 사서 경사에서 쫓겨나 정주자사로 간다. 그는 시종 우리당쟁에서 평형을 유지했고, 얃당에 불편부당하며 모두 교분이 있었기 대문에, 당파적인 편견은 없었다. 사건은 사건으로 처리했고, 공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양당으로부터 어느 정도 양해와 존중을 받는다. 정주자사로 좌천된 후, 유중영의 관료로서의 전도는 내리막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전후로 하남윤, 재주자사, 검남동천절도사, 흥원윤, 산서서도절도사, 멱주자사등 봉강대리와 호부시랑, 병부시랑, 제도염철전운사, 형부상서, 검교상서좌복야등 중앙요직을 지낸다.


우리당쟁의 침봉상대(針鋒相對)하는 환경하에서, 유중영은 혼자의 힘으로 양당간의 갈등을 완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당선종 대중연간에 우당이 전면적으로득세하며, 영호도가 재상이 되고 보정이 된다. 이덕유는 해남 애주로 유배가서 죽는다. 이씨의 자손은 연루되어 조정에 발을 들여놓은 자가 없었다. 유중영은 당시 제도염철전운사로 있었는데, 우당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이덕유의 조카인 이종질(李從質)을 추관(推官)으로 기용하여 그에게 소주쪽의 염철전운업무를 처리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그의 봉록으로 이씨가족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영호도는 이에 크게 불만이었다. 유중영은 글을 써서 영호도에게 보내어 해석했다: "임안불거(任安不去), 상자괴어석인(常自愧於昔人), 오영자재(吳詠自裁), 역하시어금일(亦何施於今日)" 서한의 임안은 위청의 지위가 하락하고, 곽거병이 날로 총애를 얻는 상황하에서 위청을 배신하여 떠나지 않았던 고사와 동한의 오영이 마현과 방참이라는 그에게 은혜를 베푼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어쩔 도리가 없어서 스스로 자결하고 만 고사를 언급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완곡하게 우당이 이당을 너무 심하게 타격한다는 점에 은근히 지적했다. "이태위(이덕유)는 처벌받은지 이미 오래 지났고, 그의 집안은 텅 비었으며, 제사가 끊겼다. 실로 측은하기 그지없다." 우당이 이당을 뿌리째 뽑지는 말고, 적절한 선에서 그치며 대국을 중시해달라고 한 것이다. 영호도는 그의 서신을 받아보고는 마음을 풀었고, 유중영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종질을 정원관으로 승진시켜준다.


유중영의 일생을 보면, 자신의 실력으로 과거 진사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고, 우당의 발탁을 받았으나 자신의 품행으로 이당의 인정도 받는다. 양당이익이 관련되는 중대사건을 처리할 때 그는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불편부당하게 사건 자체의 시비곡직에서 출발하여 처리하고 사적인 감정은 전혀 담지 않았다. 일찌기 자신을 발탁해준 은인에게는 은혜를 갚아주는 처신원칙을 견지했고, 거대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이덕유의 조카를 보살펴주었다. 그의 처세의 도리는 불편부당 공평무사한 평형과 냉정이 있다. 그리고 물한모금의 은혜를 우물물로 갚는 인정미가 있다. 그래서 관료사회라는 것이 부침이 심하지만, 끝까지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 비록 좌천된 적은 있지만 금방 재기할 수 있었고, 시종 무너지지 않았다. 봉강대리와 중앙요직을 골고루 역입했으며 우리당쟁의 배경하에서도 인격과 품행으로 양당의 양해를 받았고, 좌우봉원할 수 있었다.


이상은을 보면, 재능은 유중영보다 훨씬 뛰어난게 분명하다. 그러나 처신이나 인격에서는 차이가 크다. 성에 걸리는 깃발이 바뀌면 득세한 편에 줄을 섰다. 어느 파가 우세하면 그 파에 들어갔다. 갑자기 우당을 나와 이당으로 갔다가, 다시 이당을 나와 우당으로 간다. 매번 줄을 설 때마다 이익을 중시했다. 이러한 정치적 투기행위는 이미 처신의 기본원칙과 품성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관료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상사도 반복무상한 투기배를 안심하고 중용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번의 투기와 줄서기로 우당은 그를 배은망덕한 자라고 보았고, 이당은 그의 품성이 견리망의하는 인물로 보았다. 결국 양당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진퇴유곡이 되어 일생을 힘들게 산다. 비록 절대적인 재주를 지니고 있었지만,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줄을 서야 하는가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이는 관료사회에서 시시때때로 시험받는 문제이다. 이는 관료사회에서의 선택문제일 뿐아니라, 인생의 선택문제이기도 하다. 집단이 있으면 투쟁이 있다. 비록 줄서기를 선택하더라도 절대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처신원칙은 지켜야 한다. 이상은과 유중영은 모두 당나라때 사람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당나라에 특유한 것만은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