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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수당(隋唐)은 고구려(高句麗)를 치는데 왜 100년이나 걸렸는가?

by 중은우시 2017. 10. 19.

글: 쌍미묘(雙尾猫)


고구려를 얘기하자면, 부득이 이국가와 수,당의 양대제국간의 반세기여에 걸친 전쟁을 얘기해야 한다. 그중 수왕조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국내모순이 발발하여 2세만에 멸망했다.(황태주 양동, 수공제 양유는 재위기간이 짧고 괴뢰황제에 속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얼마나 정복하기 어려웠는가? 중원왕조가 근 1세기에 걸쳐서 공격해서야 비로소 고구려를 없앨 수 있었단 말인가? 본문에서는 주로 환경의 각도에서 수당 두 왕조가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겪었던 어려움을 설명하고자 한다.


1. 큰 비가 공격에 미친 경향


먼저 강수량을 얘기하자면, 북방은 남방보다 강수량이 적지만, 고구려는 바다에 면해 있고, 위치가 동북아에 치우쳐 있으며, 기후는 온대계절풍기후에 속한다. 그래서 여름, 가을에는 강수량이 다른 북방지역보다는 훨씬 많다. 오늘날 요동반도 일대지구의 연간 강수량은 1000밀리미터에 달한다. 하물며 1천여년전에는 더욱 습윤한 기후였다.


큰 비는 직접적으로 수나라의 제1차 고구려정복전쟁의 실패를 초래한다. 즉 그 공처가 황제인 수문제가 일으킨 고구려정복전쟁이다. 수나라는 진(陳)을 평정한 후, 고구려는 축성공사를 벌이고, 양초를 비축하며, 변방을 침입했다. 그리하여 수나라는 불안해 한다. 그래서 수문제는 일찌기 고구려에 경고를 내린다. 그리고 진후주(陳後主)의 병풍을 고구려에 보내어 경고하기도 한다. 다만 고구려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고 변방을 침범했다 (<삼국사기.20권 고구려본기8>), "구년, 왕이 말갈의 무리 만여명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한다. 영주총관 위가 이를 격퇴한다"(<수서.열전제46>), "다음 해, 원은 말갈의 무리 만여기를 이끌고 요서를 침범한다. 영주총관 위가 맞이하여 쫓아냈다."


고구려를 혼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문제의 스타일이 아니다. 수문제는 장강의 천험을 가지고 국토도 고구려보다 훨씬 큰 남쪽의 진(145군 568현)도 멸망시켰는데, 하물며 고구려 정도야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수문제는 실패한다. 큰 비와 장기간의 큰비로 인한 전염병이 유행하여, 그는 부득이 병력을 퇴각시켜야 했다. <수서.권2.제기제2>, "을사, 한왕 양을 행군원수로 하고, 수륙 삼십만으로 고려를 벌하다", <수서.권10.열전제10> "십팔년, 요동의 전투를 일으키다. 양을 행군원수로 하여 무리를 이끌고 요수에 이르다. 질병을 만나 불리하여 돌아왔다. 육월, 병인, 조서를 내려 고려왕 원의 관직을 폐한다. 한왕 양의 군사가 유관에 이르렀는데, 강물이 넘쳐 물자운송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군중에 양식이 부족하고 다시 전염병이 돌았다. 주라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갔으나 역시 바람을 맞아 배가 많이 침몰했다. 가을, 구월, 기축, 병력을 되돌린다.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고려왕 원은 놀라고 두려워 사신을 보내 사죄한다. 글을 올려 이렇게 말한다. "요동분토신원(遼東糞土臣元)" 황상은 그리하여 병력을 퇴각시킨다." 이 기록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육월 조서를 내려 전쟁을 선포하고 구월에 퇴각했다. 중간은 바로 여름, 가을의 시기이다. 바로 비가 많이 내리는 시절이다. 그때 하늘은 이미 추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상 수나라가 요동을 공격할 때만 비로 목욕한게 아니라, 조위가 요동의 공손씨정권을 정벌할 때도 역시 큰 비의 영향으로 실패한 바 있다.


2. 습지대가 가져다준 천연장벽





강수외에 요동의 지형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지질연구에서의 발견과 역사기록에 따르면, 요동만 북부의 하요하(下遼河 , 동서요하가 만나는 곳 이하의 요하 하단부)평원은 제4기빙하기후게에 해수의 침습을 받은 후, 바다에 연한 부분은 물에 잠긴다. 저명한 요서주랑은 동한때 비로소 해면위로 올라왔다. 아직 물에 잠기지 않은 근해부분은 배수가 불량하여, 큰 소택(沼澤, 늪)이 된다. 서한시대 요동군에 속한 각 군의 방위를 말하자면, 지금의 요녕 흑산이남, 태안이서, 북진이동의 근해지구는 전혀 성읍(城邑)이 없다. 그때는 그저 큰 늪지대였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진나라말기, 당나라초기의 요서, 요동간에 왕래한 기록에서도 알아볼 수가 있다. 당나라사람이 묘사한 요하하류는 "늪에 진흙이 많아서 수레와 말이 다니지 못한다." "요동이서는 물로 수백리의 도로가 망가졌다." 


그래서 신석기시대부터 동한까지, 노룡고도는 중원에서 요동읠대로 진앱하는 주요통로였다. 연장성의 방향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초기에 요동,여서를 드나들려면 북로를 가야 했다. 장성의 방향도 후기 명장성과 크게 다르다. 한왕 양량(楊諒)은 유관으로 나갔는데, 오늘날의 요녕성 조양지구로 행군했다. 역시 가급적 습지를 피하려는 행동이다. 다만, 늪은 수나라군대를 괴롭히는 큰 문제였다.


3. 지형요소


요동반도가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고, 요하하류가 늪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산간지구의 구릉이 밀집되어 분포되어 있는 것도 행군의 주요 장애였다. 먼저 요동반도는 천산산맥이 남에서 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천산산맥의 최고높이는 1000미터이다. 요동의 구릉은 중국의 삼대구릉중 하나이다. 면적은 약 3.35만평방킬로미터이다. 해발고도는 약 500미터 가량이다. 요녕성 지형도와 연장성주세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만일 이런 지역에서 행군하려면 아주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고구려인의 정치중심은 외곽주위였다. 즉, 이렇게 면적이 거대한 산간구릉지구이다. 이런 지형은 반드시 행군에 물자소모를 많이 하게 만든다 


수양제의 제1차 요동정벌때, 이런 구릉지형으로 인하여 병사들이 행군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하여 몰래 행군양식을 버리고 결국은 양식이 떨어진다.


당태종의 제1차동정도 이 문제로 곤란을 겪는다. 비록 당태종은 수나라의 교훈을 받아들여 사병들의 사망이 많지는 않았지만, 전마 8천필의 손실을 입고, 다른 물자도 많이 잃는다.


고구려군은 이런 지형에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임해설원>을 본 독자라면 아마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지방에서는 쉽게 사람이 숨을 수 있고, 습격을 당하고나서도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게 쉽지가 않다.


이뿐 아니라, 고구려는 대량의 산성을 쌓는다. 수당군대가 방어망을 돌파하려면, 이들 산성을 하나하나 점령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많이 들여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장마가 도래하여 물자조달이 이뤄지지 않으면 난감하게 된다. 큰 비는 겨우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가을겨울에 산간지구의 엄동설한은 더욱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역사상, 수당 두 왕조의 제왕은 요동출병을 선택할 때의 시간과 퇴각할 때의 시간이 아주 비슷하다. 수문제가 출병한 경우를 빼고나면 기본적으로 우기가 도래하기 전에 물자를 비축해놓고, 2,3월에 출병한다. 출발시간의 곤란은 회피할 수 있다. 다만 가을겨울이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빠른 시간내에 고구려의 전지역을 점령하지 않으면 여러 산성도 골치거리로 남는다.


그래서 당태종의 전적은 상대적으로 수나라보다 휘황하다: "무릇 고려(고구려)를 정벌하면서 현도,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맥곡, 은산, 후황의 10개성을 점령하고, 요주, 개주, 암주의 3개주의 호구로 중국에 편입된 자가 칠만명이다. 신성, 건안, 주필의 3대전투로 4만여명을 참수한다."(<자치통감.권98>) "말,소 십만을 얻고, 명광개 만개를 얻는다. 고구려는 깜짝 놀라고, 후황, 은 두 개성은 스스로 무너진다. 수백리에 사람의 연기가 없었다."(<신당서.열전제145>). 다만 당태종의 고구려정벌의 전략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은 가을이전에 돌아와야 했다. "황상을 요좌지역이 일찌기 추워지고,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서 병사와 말이 오래 머물수 없고, 또한 양식이 떨어져서 계미에 병력을 돌리도록 칙령을 내린다." (<자치통감.권198>)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마지막에 당제국은 적합한 전술을 찾아낸다: 빨리 치고 빨리 빠진다. 양식을 뺏고 사람을 뺏는다. 생산에 영향을 주어 고구려의 경제를 뒤흔든다. 그 후에 해상에서 상륙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을 위주로 한다. 이렇게 하여 철저히 고구려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것은 닽태종의 아들 당고종이 그를 대신하여 집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그 시대의 전쟁은 도창궁노등 냉병기로 싸웠지만, 전숭을 결정하는 단계이고, 전략을 결졍하는 단계의 요소에는 환경과 지리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최종적으로 고구려라는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를 무너뜨린 것을 보면 당나라의 실력이 컸음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