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호청천(鼎湖聽泉)
기실 희극소설이나 TV드라마연속극에서 소정방은 가장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수당시대 인물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는 <수당연의(隋唐演義)>의 일곱번째 호한(好漢) 나성(羅成)과 원수지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열하고 독랄한 수단으로 나성과 나성의 부친 나예(羅藝)를 죽인다. 기실 역사상 나성이라는 사람은 아예 없다. 소정방은 거의 전신 설인귀(薛仁貴)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당나라의 명장이다. 그의 최대공적은 바로 서돌궐(西突厥)과 백제(百濟)를 멸망시킨 것이다. 절대로 설인귀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보여준 위풍에 뒤지지 않는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소정방은 기주(冀州) 무읍(武邑) 사람이다. 그는 말그대로 소년영웅이고, 어려서부터 담량과 견식이 남달랐으며 용맹하고 싸움을 잘했다. 그래서 그는 토비들의 극성이었다. 십여세때 부친을 따라 토비를 토벌하는데 선봉에 서서 돌진하곤 했다. "부친이 죽자, 군수는 다시 소정방에게 병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적의 우두머리 장금칭(張金秤)을 군남(郡南)에서 격파하고 자기 손으로 장금칭을 참하고, 다시 양공경(楊公卿)을 군서(郡西)에서 격파하고 20여리를 쫒아가 그 무리를 죽이고 취하니 그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의지한다."(<구당서>)
소정방은 어른이 된 후에 수당영웅 두건덕(竇建德), 유흑달(劉黑闥)을 따라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다. 나중에 천고명장 이정(李靖)의 관문제자(關門弟子, 마지막 제자)가 된다. 그 이후에는 더더욱 당나라의 적국에서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전공이 혁혁했다. "정관 초기, 광도부절충(匡道府折沖)으로 이정을 따라 돌궐 힐리칸(頡利可汗)을 적구(磧口)에서 습격한다. 이정은 소정방으로 하여금 이백의 기병을 이끌고 선봉에 서도록 한다. 소정방은 안개 속으로 나아간다 적으로부터 1리정도에 이르러 돌연 안개가 흩어지며 적군의 장막이 보였다. 달려들어 수십백인을 죽인다. 힐리칸과 수나라공주는 낭패하여 흩어져 도망친다. 나머지 무리들은 바닥에 엎드린다. 이정의 군대가 도착하자 모조리 투항한다. 군대가 귀환한 후 소정방은 좌무후중랑장이 된다."(<구당서>)
이 일은 바로 630년에 일어났다. 소정방은 은사인 이정을 따라 동돌궐(東突厥)을 급습한다. 소수의 기병으로 안개를 틈타 쳐들어가서 힐리칸이 낭패하게 도주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다.
그해 3월 초팔일 밤, 소정방은 200의 정예기병을 선봉으로 삼아 짙은 안개속으로 급습해올 줄은 힐리칸이 꿈애도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나라사신 당검(唐儉)을 자신이 인질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군대가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를 공격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당나라사신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이 "면사금패(免死金牌)"를 가진 것쯤으로 생각했었고, 이를 통해 휴식하고 정비할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저 말을 몰아 약탈이나 하고, 사지는 발달했지만 두뇌는 단순한 그는 당검이 그저 늙은 여우 이정이 그에게 준 강한 '마취제'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당검을 보내어 인질로 잡게 한 것은 그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유인하려는 계책이었을 뿐이다. 전쟁터의 일이 어떻게 정상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겠는가. 궤계가 난무하는 법이다.
이렇게 불가일세의 힐리칸도 운세가 다했다. 이번에 그는 이전의 좋은 운을 모조리 날려버린다. 평생 총명하던 그도 한순간 방심하여 경계를 풀었었다. 소정방의 기병을 발견했을 때 당군은 동돌궐군영에서 겨우 15리(일설에는 7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힐리칸은 황급히 응전했지만, 황란(慌亂)한 중이다보니 제대로 대응할 수가 ㅇ벗었다. 결과는 묻지 않아도 알 것이다. 늙은 여우 이정에게 대패한 것이다. 여기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그 후에 다시 회복되지를 못했다.
이 전투에서 동돌궐은 약 1만의 군대를 잃는다. 그들의 1000여개 군영장막이 날아가고, 이정은 힐리칸의 아들 첩라시(疊羅施)와 10만여 돌궐인을 포로로 잡아간다. 소정방의 공은 컸고, 결국 중랑장으로 승진한다. 당나라 사신 당검도 극적으로 위험을 벗어나 생환하니 모두가 기뻐했다.
소정방이 총사령관으로 이룬 최대의 공적은 3개국가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동돌궐, 사결(思結) 그리고 백제. 그 의미는 그의 스승인 이정이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3번이나 적국의 우두머리를 생포한 것이나, 후군집(侯君集)의 전공과 비교하더라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다. 그외에 그는 총산(蔥山, 파미르)의 반란을 평정하고, 토번(吐蕃)을 토벌하는데도 참가하여, 귀신같은 용병술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재미있는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소정방의 아이러니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바로 소설과 희극에서 천년간 "간신(奸臣)"으로 욕을 먹고 있는 그가 바로 부패를 거부하고 청렴한 모범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부패에 앞장 선 사람은 바로 그의 직속상사로 소설과 야사에서 위풍당당한 정교금(程咬金)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말 재미있다.
원래 영휘(永徽)연간에 소정방은 정교금을 따라 서돌궐 하로(賀魯)의 공격을 막으러 간다. 강대한 적군을 맞이하면서 두려움없이 단지 5백의 정예병을 이끌고(그는 평생동안 소수로 다수를 이긴 기적을 여러번 이룩한다), 적진으로 돌진하여 천여명의 적군을 참살한다. 부총사령관인 왕문도(王文度)는 소정방의 영웅적인 선전을 질투하여 그가 전공을 믿고 자신의 머리 위로 기어오를까봐 우려하여 정교금에게 더 이상 추격하지 말고 수비를 위주로 하자고 건의한다. 이유는 아군에도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소정방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는 분노를 참지 못한다. 한편으로 정교금에게 계속 진군하자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시기를 놓치고 군심을 교란시킨 왕문도를 가두어 두자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늙은 정교금은 소정방의 건의를 듣지 않는다. 나중에는 정교금이 왕문도와 같은 류가 되어 부정축재에 힘쓴다. 의기탱천한 소정방은 자신에게 나눠준 자신의 몫을 받지 않았을 뿐아니라,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도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도적을 토벌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재물을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사내대장부였다. 나중에 이 일로 인하여, 일생동안 영명했던 정교금은 말년에 흠집을 남기고 면직당한다. 죽은 후에 그의 형제 진숙보에게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마지막에 부패를 거부했던 소정방이 총사령관이 된다. 그리고 계속 하로를 토벌한다. 최종적으로 적군을 와해시키고 병력을 나누어 협공하는 전법으로 신출귀몰하게 작전을 벌여서 승리를 거둔다. 적은 수로 많은 수의 적을 이긴 것이다. 이렇게 서돌궐을 멸망시키고 서역의 근심거리를 제거한다.
소정방의 전법에서 가장 큰 특징은 병귀신속(兵貴神速)하다는 것이다. 그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투는 바로 엄청난 전격전(전쟁광인 히틀러가 소련으로 돌진한 것보다 빨랐다)이다. 이번에는 10만병력을 이끌고, 수륙 양로로 진군한다. 일단 백제에 도착하자 소정방은 정비도 하기전에 즉시 맹공을 가한다(이것은 아주 이상한 전법이다. 전신은 원래 이런 괴상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늑대같고 호랑이같은 당나라군대에 맞서서 백제병사들은 숨쉴틈도 없이 계속 공격을 당하고 궤멸한다.수천명이 피살된다. 당군은 일거에 백제의 도성으로 밀고 들어갔는데, 댑게의 도성 성문을 걸어잠그지도 못할 정도였다. 거리전투의 결과는 당연히 당군의 대승이다. 백제국왕은 백기를 내건다. 그동안 백제는 왜국의 군대에 도움을 청해서 왔지만, 역시 소정방에게 대패당한다.
마찬가지로 소정방의 사결 도만(都曼)의 반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도 병귀신속, 연속작전의 정신을 드러낸다. 1만 정병을 주야로 300리를 행군하는 속도로 신속히 총령(파미르고원) 서쪽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그외에 소정방은 고구려를 정벌하는 평양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파강(壩江, 대동강)에서 고구려를 대파한다. 그후 연전연승하고 파죽지세였다. 그 후에 평양을 포위한다. 오랫동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다시 추운 겨울이 왔다. 그래서 군대를 돌려 돌아오게 된다. 소정방은 그 후에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전투에 참가했다. 양주(凉州)로 가서 토곡혼(吐谷渾)을 다독거리고, 토번을 정벌하는 오해(烏海)전투에서 70세의 소정방은 8천의 당군으로 10만의 토번군대를 물리친다. 토번은 10만의 군대가 8천만 남는다. 토번은 이후로 기운을 차리지 못하게 된다. 76세의 소정방은 변방의 부임지에서 죽는다. 그는 국가를 위하여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흘린 것이다. 그는 댓가도 바라지 않고, 편안히 살기도 바라지 않고 높은 산과 험한 고개를 넘나들었다. 그를 필요로 하거나 곤란에 빠진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갔다. 아무런 조건없이 중앙의 지시에 따랐다. 대당의 강산을 보위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놓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각 민족을 통합시키는데 공로가 무척이나 크다. 그가 죽은 후에 마음이 약한 이치(李治, 당고종)는 크게 통곡한다. 그의 공로와 그가 받은 대우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대신들에게 왜 그런 말을 해주어서 소정방이 마땅히 얻어야할 영예를 받게 하지 않았는지를 질책한다. 마지막으로 그를 유두도독으로 추증한다. 소정방은 설인귀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일대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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