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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유문정(劉文靜) vs 배적(裴寂): 당나라초기 권신간의 권력다툼

by 중은우시 2015. 6. 16.

글: 종승호(宗承灝)


수나라 말기,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은 태원(太原)의 최고군사 및 행정장관을 맡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그는 배적과 유문정을 알게 된다. 배적은 당시에 조정이 지방에 파견한 재무주관이었고, 주로 물자조달업무를 맡아서 실권이 있었다.


이연은 사람을 아주 잘 알아보았다. 그는 배적이 이용할만하다고 여긴다. 이용하려면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어야 했다. 배적은 권력욕이 아주 강하며, 약점도 적지 않았다. 최대의 문제는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도박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연은 매번 옛날이야기나 나누자는 핑계를 대고, 며칠 건너 한번씩 배적을 집으로 불러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했다. 어떤 때는 즐겁게 마시면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매번 배적이 돈을 따면 수양제의 명의로 일부 물자를 이연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수나라 대업중기에서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할 때까지, 십여년의 기간동안 이연부자는 배적에게 적지 않은 노력을 쏟는다. 배적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연이 거병하자, 배적은 즉시 궁녀 500인, 상등미 구만곡, 잡채 오만단, 병갑 40만령을 군용으로 보내준다. 주게 되면 결국 보답을 받는다. 이 거래의 결과는 윈윈이었다.


유문정은 배적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 유문정이 진양령(晋陽令)으로 있을 때, 배적은 진양행궁(晋陽行宮)의 궁감(宮監)으로 있었다. 한 도시에 거주하고, 모두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서로 아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친구가 된다.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한 후 장안으로 진공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 좋았다. 한 명은 이연의 오른팔, 한 명은 이연의 왼팔이었다. 함께 고생하며 당군이 관중으로 진입하도록 협력했다.


만일 재능만을 따진다면 유문정은 배적보다 훨씬 뛰어났다. 다만 관료사회에서 살아남고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따진다면 배적이 유문정보다 훨씬 뛰어났다. 대당의 기업을 창립하는 과정에서, 유문정은 확실히 적지 않은 공이 있었다. 사해가 안정되자 인심이 흔들린다. 원래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자던 좋은 친구이지만, 환난은 같이 하지만 부귀는 함께 누리지 못한다.


유문정은 이세민의 사람이다. 이세민을 통하여 이연과 알게 되고 태원의거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적은 이연의 친한 친구이다. 함께 술마시고 도박하던 세월동안 맺어진 감정이 아주 두터웠다. 즉, 배적은 이연의 사람이다. 비교하여 말하자면, 유문정이 '2호인물'로 지낼 수 있었던 것만해도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유문정은 머리를 잘 쓰고, 지혜와 모략은 배적보다 뛰어났지만, 그의 EQ는 배적보다 한참 떨어졌다. 그의 성격은 잘난척하기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아지면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수시로 배적과 고하를 비교했다. 그와 같이 총명한 사람이 자신이 배적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연의 조치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때의 배적은 득의만면하고 있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연은 배적이라는 옛친구에 대한 은총이 대단했다. 매일 어선을 그에게 내려보내 먹게 했다. 배적을 부를 때는 한번도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배감(裴監)'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이는 배적이 태원에 있을 때의 직무였다. 이를 보면, 이연이 그를 얼마나 친밀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이뿐아니라, 나중에는 이연이 조회에 나가면 반드시 배적을 자신과 같은 자리에 앉도록 했다. 조회가 끝난 후에는 배적을 불러 함께 궁으로 들어가서 한담을 나누거나 일을 논의했다. 조정의 사무에 대하여 당고조 이연은 배적이 하는 말이라면 모조리 그대로 따랐다. 이런 상황은 유문정이 신경을 심각하게 건드리게 된다. 배적은 이연의 은총하에 바람을 부르면 바람이, 비를 부르면 비가 내리는 형국이 된다. 그러나 현실의 유문정은 그의 아래에 처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일은 수습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결국 그는 목숨을 잃는다.


유문정은 태원거병의 첫모의자이자 기획자이다. 사서에는 그가 상당히 지모가 있다고 적고 있다. 그렇지않다면 당시에 그를 "당시 사람중 으뜸(時人之冠)"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당서>에는 그에 대하여, "위자의(偉姿儀), 유기간(有器干)"이라고 적고 있다. 즉 그는 의표가 당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처리나 사람을 대하는데에서는 자신의 재주를 믿고 오만했던 멍청이였던 것이다.


유문정은 수나라때 진양현령으로 있으면서, 이밀(李密)과 친척관계이어서 나중에 이밀이 모반을 일으킬 때 그도 연루된다. 그래서 태원감옥에 갇힌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이세민이 감옥으로 달려가서 그를 만난다. 유문정은 그 기회에 이세민과 태원에서 거병하여, 빈틈을 노려 장안으로 진격하자고 논의한다. 이세민이 그를 감옥에서 구해주자, 유문정은 다시 기획에 참여하여, 수양제가 이연의 곁에 심어둔 이목을 죽여버리고, 이연의 거병을 완성시킨다. 장안으로 진군하기 전에, 그는 다시 밖으로 돌궐과 연락하여, 후고지우(後顧之憂)를 없애는 군사 및 외교전략을 제시한다. 그리고 친히 돌궐에 사신으로 가서 이 임무를 깔끔하게 완성한다. 그래서 대당이 개국하는데 유문정의 공로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본인이 대당제일공신이라고 자부하는데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외신의 2위로 밀린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이 상처는 그를 죽이는 상처였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 이 말은 틀리지 않다.


이때 천하는 아직 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즉 이연이 장안을 빼앗은지 얼마 되지 않아, 수나라말기에 반란을 일으킨 또 다른 호족 설거(薛擧)가 장안과 지척인 부풍(扶風)까지 쳐들어 온다. 이 설거는 이연과 같이 대업13년(617년)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금방 병력 수십만을 거느리게 되어, 농서의 땅을 거의 완전히 지배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대단한 명호를 붙이는데, 바로 서진패왕(西秦覇王)이다. 이는 완전히 항우의 "서초패왕"을 본뜬 것이다. 패왕을 본뜨겠다는 의미가 숨어 있다.


유문정이 배적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서진패왕' 설거의 군대는 당나라의 영지인 경주(涇州)로 진공한다. 당고조 이연은 진왕 이세민을 원수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명한다. 유문정은 이세민의 원수부 장사로 임명되어 이세민과 함께 설거를 토벌하러 간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첫번째 전투에서 대당의 군대가 대패한 것이다. 하마터먼 관중도 지켜내지 못할 뻔했다. 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세민이 전선에 도착한 후 깊은 도랑을 파고, 높은 보루를 쌓으며 상대방과의 전투를 서두르지 않았다. 양초의 우세를 이용하여 설거를 서서히 무너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세민은 병이 든다. 할 수 없이 유문정에게 대신 지휘하도록 맡긴다. 이세민은 유문정에게 "가볍게 출전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유문정은 공을 탐하는 마음에 주동적으로 전투에 나섰다가 대패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당군의 손실을 참혹했고 피가 흘러 강을 이룬다. 설거는 심지어 승기를 틈타 장안까지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설거가 중병에 걸려서 할 수 없이 철군하게 된다.


이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유문정을 면직시킨다. 그리고 그에게 내린 작위와 식읍을 박탈한다. 패전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유문정은 꼬리를 말고 지낸다. 무덕원년(618년) 추석을 전후하여 설거는 병사한다. 그의 아들 설인고(薛仁杲)가 뒤를 잇는다. 이세민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설거의 아들 설인고를 토벌하러 떠난다. 유문정도 다시 군대를 따라 출정한다. 두 사람은 모두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이세민은 이전 전투에서 실패한 교훈을 살려, 정예병을 기르고 방어를 굳게 하며 싸우지 않았다. 먼저 적군과 60여일을 대치하여, 적군의 양식이 바닥나게 만든다. 설인고는 대세가 기운 것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성을 열고 나와 투항한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이세민은 당연히 상을 받고 태위, 섬동도대행대가 되어, 포주 및 황하이북의 병마는 모두 그의 지휘를 받게 된다.


이때 이세민은 자신의 친밀한 전우를 잊지 않았다. 조정에서 유문정을 적극 추천한다. 당고조 이연은 유문정의 작위와 봉읍을 모두 회복시켜 준다. 그리고 그를 민부상서에 임명한다. 그리고 섬동도행대 좌복야에 임명한다. 다만 원래의 재상지위는 다시 얻지 못한다. 이 가장 중요한 직위를 잃은 것은 유문정에 있어서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것과 비슷했다.


기복을 겪으면서도, 유문정은 배적에 대한 태도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미워하게 된다. 결국은 조당에서 이연의 눈아래에서 서로 다투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조회에서 배적이 의견을 내면, 유문정은 바로 반대한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주 배적을 말로 모욕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갈등은 갈수록 커진다. 이연은 눈으로 보면사 마음 속으로 분노한다. 유문정에게 불만과 염증을 느끼게 된다. 배적 본인도 유문정의 이런 행위에 아주 화가 난다. 그러나 그는 속이 깊었다. 그래서 착실한 척하면서 음모를 꾸민다. 매번 유문정이 자신을 인신공격하면, 그는 못들은 척하며 그저 봄바람이 얼굴에 불어오는 것처럼 행동한다. 많은 경우 이런 사람이 가장 무서운 사람이다. 가만히 있으면 모르되, 한번 울면 바로 사람이 목숨이 날아간다.


바로 이 때, 조정의 형세가 변화한다. 이연은 이미 진왕부의 세력이 점점 확장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억누를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다. 지금 유문정은 이세민의 일당이고, 조정의 일부 고관들도 명백하게 이세민과 가까웠다: 방현령, 두여회, 장손무기등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진왕부의 고급막료가 되었다. 이세민은 조정의 위망이 날로 커져갔고, 세력도 신속히 발전한다. 이렇게 놔두면 꼬리를 자르기 힘든 국면이 될 것이고, 태자 이건성의 지위에 위협이 될 것이다.


당고조는 의식적으로 이세민의 수하인 일부 엘리트들을 진왕부에서 떠나 다른 지방에 부임하도록 한다. 이세민의 대신들 중에서의 영향력은 주로 전쟁에서 잘 싸운 것때문이었다. 당고조도 이 점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 후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전투에서는 당고조가 이세민이 전선에 나갈 기회를 감소시킨다. 이렇게 한 것은 점진적으로 이세민이 공을 세울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썼다. 무덕2년(619년) 유무주가 돌궐과 결탁하여 하동(지금의 산서) 일대를 침범한다. 당고조는 배적을 보내어 맞서게 하였으나, 대패한다. 진주이북의 성을 모조리 잃은 것이다; 이어서 다시 제왕 이원길이 태원을 수비하다가 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진주, 용문이 연이어 무너진다. 그러나 이연은 그래도 패군지장 배적을 그대로 쓴다. 그로 하여금 계속 하동을 진무하도록 하고, 이세민을 기용하지 않는다.


만일 유문정이 정치적으로 성숙했더라면, 당고조와 태자 이건성이 이세민을 약화시킨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스스로 이세민의 주요 심복으로서, 쉽게 제거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때 그는 더욱 조심하여 빌미를 잡히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유문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을 뿐아니라, 심지어 더욱 거리낌없이 행동한다. 한번은 유문정이 동생 유문기와 함께 술을 마셨는데, 많이 마시자, 원망을 하면서 칼을 뽑아서 기둥을 내려칠 뿐아니라, 배적의 머리를 베어버리겠다고 큰소리친다. 마침, 이때 그의 집안에는 자주 귀신이 나타나서 동생 유문기가 무당을 불러서 귀신을 몰아내고 있었다. 대신이 무당을 청하는 것은 미신이 성행하던 고대에는 금기사항이었다. 역대황제가 가장 꺼리던 행위이기도 하다. 쉽게 모반의 죄명을 뒤집어 씌울 수 있는 것이다. 유문정에게는 소첩이 있었는데, 더 이상 총애를 받지 못하자 마음 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일을 안 후에 그녀는 자신의 오빠를 통해 관청에 고발한다. 유문정의 언행을 모조리 조정에 보고하며, 유문정이 모반하려 한다고 말한다.


이연과 배적은 모두 이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찌 그냥 지나갈 것인가. 이연은 고발을 받은 후, 이 기회에 유문정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연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따. 첫째는 유문정이 이후 다시 사단을 벌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세민 진왕집단의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배적에게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이 사건을 조사하도록 시킨다. 이를 보면, 당고조는 이미 죽일 결심을 한 것이다.


유문정은 배적의 준엄한 조사를 받으면서 계속 변명하며 말했다: "당시 진양에서 거병할 때, 나와 배적은 모두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 배적은 최고권신이 되고, 나는 이런 지경에 처했다. 당시 가업을 모두 포기하고 동서로 다니며 싸웠다. 지금 강산을 얻고 나니 나는 이렇게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다. 마음 속에 확실히 약간의 불만은 있다. 그날은 술에 취해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하는 말이 입으로 나온 것이다. 모반은 분명 없었다."


당고조는 배적이 올린 심문결과를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한다: "유문정의 이 말을 들으니, 확실히 모반을 하려 했다" 일부 관리는 당고조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유문정이 감정적인 것은 맞지만, 모반할 뜻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세민도 특별히 나서서 유문정을 위하여 간청하며, 유문정을 구해주고자 한다. 당고조는 마음을 이미 정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은 듣지 않는다.


배적은 마음 속으로 유문정을 극도로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당고조의 명령을 듣자, 유문정 사건을 조사할 때, 자신의 주공이 유문정에게 손을 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글을 올려 이렇게 말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유문정의 재지와 모략은 우리 모두보다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거칠고 험악합니다. 지금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그를 남겨두면 반드시 후환이 남을 것입니다. 이 말은 당고조의 마음에 딱 들어맞았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판결서에 서명한다. 살무사(殺無赦).


무덕2년(619년) 구월 초엿새, 유문정은 처결당한다. 가산은 모조리 몰수당한다. 유문정은 형장에서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한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주구는 팽당하고, 하늘의 새가 없어지면 활은 창고에 들어간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유문정의 비참한 결말은 그의 성격적인 원인도 있지만, 더 많은 것은 관료사회의 잠규칙 때문이다. 배적은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양패구상이다. <구당서.고조기>의 기재를 보면, "태종은 진양령 유문정과 처음에 모의했다"고 적었다. 이세민이 당사를 쓰면서 자신이 '처음 모의했다"는 공을 차지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유문정'이 그와 함께 이 '처음 모의'한 공을 차지한 것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문정의 죽음이 이세민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를.


무덕5년(622년),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건성을 죽이고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얼마 후, 당고조 이연은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이세민이 황제위를 차지한다. 그가 당태종이다. 등극후,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이세민은 이연이 중용했던 일부 노신을 핵심자리에 배치한다. 배적도 마찬가지로 중용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한다. 배적의 명은 정말 좋다고. 이세민 부자로부터 모두 총애를 받았다고. 이세민으로 하여금 유문정이라는 사람까지 잊게 만들었다고. 그들은 잘못 본 것이다. 이세민의 장부에는 아직도 배적이 적혀 있다. 이세민은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이 도박꾼이 모든 것을 날리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린 것이다.


정관3년(629년) 황실의 존중을 받던 불교승려 법아(法雅)가 궁중에서 강경(講經)하면서, 요언(妖言)을 말했다고 체포된다. 이 법아가 무슨 말을 했을까? 그는 경사에 전염병이 돌 것이라고 한 것이다. 천자의 눈아래에서 이런 말을 하여 인심을 미혹시킨다니. 이세민은 두여회로 하여금 친히 심문하라고 한다. 법아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이 심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외의 수확을 거둔다. 배적을 연루시킬 수있었던 것이다. 원래 법아가 말한 이 말은 사적으로 이전에 배적에게 말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유문정의 복수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세민은 손을 쓰기로 결심한다. 배적을 불러와서 직접 대질시킨다. 배적은 솔직했다.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이세민은 이 기회를 틈타 배적의 관직을 박탈하고, 식읍의 절반을 삭감한다. 그리고 그를 경사에서 똧아내어 조적으로 돌아가게 한다. 배적이라는 대당의 최고권신은 이렇게 고향으로 쫓겨난다. 돌아가는 길에, 배적의 마음은 아주 불안정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태원거병때 배적은 저투입고수익을 얻었다고. 이연부자와 일종의 거래를 했다고. 그라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도 마찬가지로 직업도박꾼이다. 그가 건 것은 목숨이다. 그는 확실히 이 도박에서 이겼고 그는 잘 나갔다. 원래 배적의 인생은 이렇게 시골에서 끝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다시 가지고 논다.


배적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 원래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러나 돌연 신행(信行)이라는 미치광이가 온다. 그는 배적의 가동(家僮)에게 이렇게 말한다: '배공은 천분(天分)이 있다. 황제가 되어야 한다" 말을 마치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어간다. 이 말이 배적의 귀에 들어간다. 그는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미치광이 신행을 찾게 한다. 그러나 찾아본 결과는 신행이 이미 죽었다는 것이었다.


배적은 이 일이 당태종의 귀에 들어갈까 겁내서, 가노 공명(恭命)에게 그 말을 전한 가동을 죽이라고 한다. 그는 사람을 잘못 쓴 것이다. 가노 공명은 몰래 가동을 살려보내주었다. 공명은 주인의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배적이 거둔 봉호의 백여만전도 다 써버린다. 배적은 그를 붙잡아 죄를 물으려 하나, 공명은 당태종에게로 도망가서 이 일을 고해 바친다. 이세민은 배적을 사형에 처하고, 나중에는 유배형으로 낮춰준다. 원래 그를 비교적 먼 교주(지금의 월남 하노이시)로 보내고자 했으나 실행하지 않고 정주(靜州, 지금의 영하 영녕현)로 유배보낸다.


배적이 정주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지의 일부 강족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이 내건 구호는 "반란은 백성이 주인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배적을 황제로 앉히기 위함이다" 이런 미친 말은 이세민도 믿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우리 이씨집안은 배적에게 재조지은이 있는데, 그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배적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하여, 친히 가병을 이끌고 이들 강족의 반란을 진압한다.


소식이 장안에 전해지자, 이세민은 탄식하며 말한다: "배적은 비록 재주없고 공도 없지만, 그래도 옛 신하이다. 그가 새외에서 죽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겠다." 긜고 명을 내려 60세의 배적을 다시 부른다. 그러나 이때 배적은 이미 이런 고생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장안에 도착하기 전에 도중에 죽고 만다. 초당의 권신 배적은 이렇게 목숨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