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혁련정(赫連定): 중국 최후의 흉노황제

중은우시 2017. 2. 14. 00:40

글: 진옥룡(秦玉龍)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놀라운 일을 발견할 수 있다. 3세기에서 4세기 상반기까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전후 150여년간은 중국북방이 가장 혼란스러운 역사시기이다. 오늘날의 감숙 평량(平凉)에는 전후로 10명의 제왕이 나타난다. 이 10명의 제왕중에서 9명은 한인(漢人)으로 전량국(前凉國)의 9명 황제이다. 그리고 1명은 갈색 머리에 높은 코, 깊은 눈을 지닌 흉노제왕이다. 그는 사료에 기재된 중국최후의 흉노황제이다. 평량에 도읍을 했고, 토곡혼(吐谷渾)에게 멸망한다.


평량에서 황제에 오른 이 흉노인은 혁련정(?=432)이다. 아명은 직분(直獖)이며, 흉노 철불부(鐵弗部) 사람이다. 대하(大夏) 무열제(武烈帝) 혁련발발(赫連勃勃)의 다섯째 아들이며, 혁련창(赫連昌)의 동생이다. 오호십육국시대 하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혁련가족의 원래 성은 류(劉)이다. 부친 유위진(劉衛辰)은 일찌기 전진(前秦) 황제 부견(苻堅)에 의해 서선우(西單于)로 임명되어, 하서(河西)의 여러 부락을 통치한다. 407년, 혁련발발은 스스로 왕이 되고 국호를 대하(大夏)라 칭한다. 연호는 용승(龍升)으로 하고, 성을 혁련씨로 고친다. 그 뜻은 "제실징혁(帝室徵赫), 상여천련(上與天連)"이라는 것이다. 백관을 설치하고, 통만성(지금의 섬서성 정변 홍돈계향 백성자촌)을 수도로 정한다. 하나라는 십육국시기 마지막으로 나타난 정권이고, 407년 혁련발발이 천왕대선우(天王大單于)를 칭한 때로부터 계산하여 431년 북위(선비족 탁발규가 건립한 북방정권)의 속국인 토곡혼이 혁련정을 포로로 잡을 때까지 겨우 25년간 존속했다. 중국고대에 "하"를 국호로 한 나라는 아주 많다. 그러므로 역사학자들은 십육국시기의 하나라를 "혁련하" 혹은 "호하(胡夏)"라 부른다.


혁련발발은 장안을 탈취한 후, 하나라의 영토면적은 46.8만평방미터에 달한다. 남쪽으로는 진령까지, 동쪽으로는 포진까지, 서쪽으로는 진농(秦隴)까지, 북으로는 황하에 이르러 국세가 전성기에 이른다. 혁련하 정권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전쟁을 수행하다보니, 비록 광활한 토지와 인구, 가축을 보유하고 있지만 매년 이어지는 전쟁의 소모를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 여기에 혁련발발은 만년에 혼군이 되어, 참언을 들어, 장남을 폐하고 동생을 세워 형제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먼저 큰아들 혁련괴(赫連璝)는 둘째동생 주천공(酒泉公) 혁련륜(赫連倫)을 죽이고, 이어서 셋째동생 태원공(太原公) 혁련창은 다시 형 혁련괴를 죽인다. 혁련발발은 그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혁련창을 태자로 앉힌다. 이번 태자다툼으로 하나라의 두 대들보가 쓰러진다. 그리하여 하나라는 원기를 크게 상하고 나중에 북위에 멸망당하는 원인이 된다.


아명이 "분"(그 뜻은 거세한 돼지라는 뜻이다)인 하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부친이 재위할 때 평원공에 봉해지고 장안을 지킨다. 415년, 혁련발발이 병사하고, 그 아들 혁련창이 즉위한다. 동생인 혁련정은 대장군에 봉한다. 426년, 북위는 대거 하나라를 공격한다. 혁련창은 동생 혁련정을 파견하여 북위군과 장안 일대에서 대치하도록 한다. 북위는 그 빈틈을 타서 서쪽으로 정벌을 나선다. 다음 해 육월, 북위군은 대하의 도성 통만성을 함락시킨다. 혁련창은 상방(지금의 천수)로 도망친다. 428년, 북위의 대군이 상방을 포위공격하고 혁련창이 포로로 잡힌다. 혁련정은 급히 하나라의 잔여부대 수만명을 수습하여 도망친다. 평량으로 도망쳐 가서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승광(勝光)으로 고친다.


혁련정이 즉위한 후, 평량 도성을 대본영으로 하여, 역량을 모은다. 병력을 내보내 지금의 난주, 유중, 임하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대진국(大秦國)을 소탕한다. 그리고 투항한 서진의 황제 선비족 걸복모말(乞伏暮末)을 참살한다. 그후 여러번 출병하여 북위를 공격한다. 원래의 용흥지지인 통만성을 되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 실패한다. 이때의 대하국은 이미 세력이 약했고, 예전같이 않았다. 승광2년(429년) 십월, 혁련정은 음반산(지금의 평령 공동구 사십리포진 조만부근)에 올라 그의 고국을 조망하며, 곡을 한다: "만일 선제가 나에게 대업을 승계하도록 하였더라면, 어찌 오늘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만일 하늘이 나에게 시간을 준다면 나는 여러 사랑하는 신하들과 함께 하나라의 대업을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을 마치자 돌연 한 무리의 여우가 곁에서 뛰쳐나와 구슬프게 울었다. 혁련정을 명을 내려 그들을 사살하도록 하나 한 명도 붙잡지 못했다. "이는 크게 불길한 징조이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더 뭐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2년후, 승광3년(431년) 혁련정은 또 다른 호인이 건국한 정권인 북량(지금의 장액, 무위 일대)를 공격하는 도중에 토곡혼에게 포로로 잡힌다. 다음 해, 북위로 압송되어 처형당한다. 하나라는 이렇게 멸망한다. 혁련정이 평량에서 황제를 칭한 때로부터, 포로로 잡히어 목이 잘리기 까지 4년이 걸리지 않았다. 혁련정이 죽은 후, 선비 북위의 대군은 금방 북방을 통일한다. 이때부터 흉노는 중국역사무대에서 사라진다. 그의 후대는 멀리 유럽으로 도망치거나 아니면 성을 바꾸어 은거하며, 현지의 한족과 다른 소수민족과 융합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오늘날 평량에는 흉노인의 후예들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성이 혁(赫)인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부는 갈색머리카락에 넓은 이마, 큰 코와 깊은 눈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혁련정 황제와 혈연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