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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최호(崔浩): 제갈량보다 뛰어나다는 북위제일모사(北魏第一謀士)

by 중은우시 2016. 6. 18.

글: 개풍문사(凱風文史)


탁발제국의 수도 평성(平城), 동쪽 교외 교통요지에 방원 130보의 평지 위에 거대한 비림(碑林)이 세워졌다.


전후로 3백만인/차가 8년동안 이 거대한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명을 받들어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기서(奇書)를 만들었고, 제국의 영광스러운 창시자 및 그들 자손의 이야기를 기술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주 뒤에야 이 공사를 발견한다. 읽는 사람들은 그 듣도보도 못한 조상의 비사에 깜짝 놀란다. 그들은 손가락질하며 웃고 욕하며, 뜨거운 논의가 분분했다.


백마공(白馬公) 최굉(崔宏)의 큰아들 최호는 자가 백연(伯淵)이다. 그는 이 기서의 총편찬자이다. 그는 피부가 하얗고, 몸매는 섬약하며, 얼굴은 여자처럼 하얗다. 다만 황제 탁발도는 그의 신하와 백설들에게 말했다: "이 섬약한 문사를 절대 무시하지 말라, 그의 가슴 속에는 백만갑병이 들어 있다.


사실상 여러해전에 사람들은 최호를 본 적이 있디. 그때 그는 위풍당당했고, 항상 부친 최굉과 함께 황제의 수레를 타고 교외로 나가 국가의 제사를 주관했으며 돌아올 때는 길거리를 가로질러갔다. 정말 위풍이 대단했다. 나중에 그는 죄수차를 타고 형장으로 가서, 몸에 족쇄와 칼을 쓰고 넋을 읽고 있었다. 수백명이 친척과 이 일에 관련된 관리들도 그와 함께 황천으로 갔다. 수십명이 선비족 병사들은 그의 머리에 소변을 누었고, 그는 비분의 고함을 질렀다.


이 돌위의 역사는 기실 달콤한 함정이었다. 그것은 이 천상천하, 무소부지의 황가제일모사를 돌아오지 못할 길로 보냈다.


두 명의 소인이 있었다. 이 광세혈안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기억되는데, 극표(郄標)와 민담(閔湛)이다.


백마공 최굉은 팔부대인중 천부대인(天部大人)으로 지위가 높았다. 그는 청하최씨(淸河崔氏) 출신이다. 청하최씨는 북조 한족문벌사족중 제1대성이다. 어려서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한 왕조가 들어섰다 망하면 다시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던 그 시대에 전후로 전진과 후연의 황제로부터 위협을 받아 관직을 맡는다. 마지막으로 선비족 탁발규가 그를 동해가에서 잡아와서, 그를 핍박하여 대업을 같이 도모하자고 한다. 그는 가난한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의 작품을 창작한다: 예제문명의 오랑캐제국. 대위(大魏)의 국호도 모두 그가 정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장남 최호는 부친의 총명함을 이어받아, 어려서 서예로 이름을 날린다. 그러나 그는 유행하던 변체문(駢體文)에 관심이 없었고, 경사(經史), 율령(律令)과 음양현상지술(陰陽玄象之術)을 공부했다. 그는 부친의 도움없이 이십세때 저작랑이 된다. 소년득지로 의기풍발(意氣風發)했다. 그는 한족 문벌을 숭상하고, 의관을 자랑스러워했다. 태왕왕씨집안출신의 왕혜룡(王慧龍)에 대하여 모두 찬미하며 그를 '귀종(貴種)'이라고 불렀다. 비록 선비귀족 장손숭의 보복성 탄핵을 당했고, 그가 '남인을 탄복하고', '선비화를 멸시한다'고 말하고, 황제 탁발도도 명을 내려 그를 질책하였지만, 그는 여전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선비오랑캐족을 멸시했다. 또한 한족중에서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사족들도 멸시했다. 그의 두 명의 같은 집안 당제(堂弟)인 최모(崔模)와 최이(崔颐)에 대해서도 자신은 누대에 걸처 공경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들어 그들을 경멸했다. 최모는 경건한 불교신자였다. 항상 예불을 드렸다. 최호는 선왕지도를 숭당했고 오랑캐의 나라에서 온 불교를 가장 배척했다. 그래서 그를 조소한다: "이 대가리를 깨끗하지 못한 곳에 두고 꿇는 것이 오랑캐의 신이다." 최이는 최모보다는 잘 지냈다. 최모는 그를 끌어당기며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도간(최호의 아명)이 나를 우롱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최이까지 우롱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일 때문에 멸문될 때 탁발도는 이 두명의 가련한 인간을 살려두게 되었다고 한다.


최호의 오만과 편견은 그를 고독한 군자로 남을 수밖에 없게 운명지웠다. 어떤 사람은 그를 숭배했지만,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고독했던 노황제 탁발규를 제외하고는. 이 전쟁으로 성장한 제국의 창업자는 할 일이 없으면 그가 종이 위에서 하는 말들을 듣는 걸 좋아했다. 그러나 황제는 어찌되었건 늙었다. 늙으면서 포악해진다. 부성촉영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거의 미쳐버린다. 심지어 어느 대신은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끌고나와 목을 벤다. 일시에 좌우는 모두 도망치고 여러 신하들도 두려움에 떨었다. 오로지 최호만이 궁궐에 남아서 황제를 모신다. 어떤 날은 밤을 새우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매번 그럴 때면, 노황제는 보기 드문 따스한 정을 보여주었고, 죽을 이 고독한 젊은이에게 내려주어 먹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최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간당(奸黨)이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조정에는 오로지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편"과 "간당." 여러 신하들이 보기에 최호는 이미 "우리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황제도 결국 숙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둘째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큰아들은 다시 둘째아들을 죽이고 황위를 계승한다. 여러 신하들은 최호가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큰아들인 명원제는 그의 부친보다도 더 점성가 최호를 총애한다.심지어 후궁에 돌연 토끼가 나타난 일에 대하여도 최호에게 묻는다. 최호는 점을 친 다음에 오랑캐가 미녀를 바칠 징조라고 얘기했고, 실제 그렇게 되었다.


당연히 최호의 능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소위 국가의 대사는 제사와 전쟁이다. 이 두 가지에 그는 모두 관여했고, 두 가지에 모두 뛰어났다. 그는 부친을 모시고 황제의 수레에 타서 교외로 제사를 지내러 나갔을 뿐아니라, 군국대사에서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압도했다. 415년 심한 가뭄이 있을 때, 그는 여러 신하들이 천도하자는 주장을 막아내는데 성공했고; 417년, 유유의 북벌때 가는 길을 빌려 진(秦)을 치겠다고 했을 때 그는 완고하게 여러 신하들이 유유와 전쟁을 시작하자는 주장을 막아낸다. 그는 남쪽 사람이 멀리 군대를 끌고 원정을 가는 것이므로 장안을 함락시키더라도 지켜내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 비록 황제가 결국 그의 말을 듣지는 않았지만, 용병에 실패한 후, "최호의 계책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말했다.


사실은 증명한다. 최호가 했던 말은 다 들어맞았다. 모두 그의 말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 중신들은 말했다. 선각자 최호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하루는 사관(史官)이 와서 보고한다. 하늘에 횽혹(熒惑)의 별이 아무 일없이 없어졌는데, 이 별이 어디로 가면 그 곳이 멸망한다고 했다. 조정은 깜짝 놀랐고, 임금의 앞에서 아뢰는 대신들은 이렇게 말했다: 최호만이 별이 어디로 갔는지찾아낼 수 있습니다.


최호는 조당에서 <좌씨춘추>를 꺼내어 역사의 사례를 운용하여 에측을 한다. 팔월후, 과연 그가 얘기한대로 진나라에서 형혹이 발견된다. 금방 국왕 요흥(姚興)이 죽고, 두 아들은 싸우기 시작한다. 삼년후, 유유가 진을 멸망시킨다. 여러 신하들은 이후에 그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그는 하늘의 일까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최호를 건드리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작은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최호의 처는 태원곽씨(太原郭氏) 출신이다. 그 집안은 청하최씨(淸河崔氏)에 비견되는 명문거족이다. 아쉽게도 그녀는 너무 일찍 죽는다. 장모는 최호의 집안과 사위의 재능을 아껴서 작은 딸을 그에게 다시 시집보낸다. 그러나 신앙문제로 최호는 이 작은 부인이 매일 읽은 불경을 빼앗아서 불태워버리고, 화장실에 집어던진다.


그러나 스님, 도사 및 선비, 한인중에서 불교도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스님의 머리를 잘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러해 이후 그는 선비족조정을 움직여 파란만장한 오랑캐신을 없애는 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도사들은 그가 노자장자의 책이 거짓이라는 말에 불만을 품는다. 그는 말했다. 노자는 공자의 스승이다. 절대로 이런 인정에 어긋나는 패륜적인 책을 쓸 리가 없다. 그의 적은 갈수록 많아지고, 친구는 겨우 명원제만 남는다. 나중에 놀랍게도 구겸지(寇謙之) 한 명이 더 는다.


423년, 영명한 군주 명원제가 요절한다. 나이 31살이다. 여러 신하들은 최호를 집으로 쫓아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임자인 탁발도는 당시 13,4세였다. 이 소년은 동궁에 있을 때 최호와 함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나중에 그는 최호의 극력 추천하에 태자에 오르고 대통을 이을 수 있었다. 그는 최호에게 큰 관직을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반드시 "우리편"의 의견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강경한 선비귀족의 '우리편'의 입장을. 탁발도는 부견처럼 영웅의 기개가 있는 황제였다. 그러나 부견처럼 관용적이거나 연약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정치자의 정명함을 보여준다: 최호의 일체 관직을 면직시킨다. 다만 그가 백마공의 작위는 그냥 이어받게 해준다.


그러나, 최호의 품에는 자잘한 일들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천도와 인간치도의 상호관계만이 있을 뿐이었다. 면직후 그는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서 마르크스의 글에 나오는 집시들처럼 기과한 천문학실험에 빠져있었다. 그는 하루종일 금,든,동,철을 기물에 놓아두고, 파랗게 변하게 하며, 밤이 되면 기이한 천상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동중서로부터 전해지는 천인동구, 천인감응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재난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 때문이다. 사람이 아래에서 덕을 잃으면, 하늘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하늘의 일은 항상 같고 백대가 내려가도 변하지 않는다." 이런 이론은 어린 황제 탁발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하여 틱발도는 여러번 최호의 집으로 가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살펴보았다. 최호는 허리띠를 제대로 매지 않거나, 혹은 형편없는 차나 식사로 이 일국의 군주를 쫓아버리곤 했다.


이년후, 탁발도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호를 다시 불러들여, 국가의 제사를 주관하게 한다. 그리고 군국대사에도 참여하게 한다. 이 새 군주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최호는 그의 무당, 선지자 혹은 천문학자로서의 놀라운 재능을 마음껏 펼친다. 그러나 그후의 27년간, 그는 탁발도와 아침 저녁으로 함께 하며 떨어져 있지 않았다. 수석참모로서, 그는 탁발도의 천하통일의 거대한 꿈을 성사시켜주었다. 그는 군사방면에서 성공하였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는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주 꿈에서 귀신을 만나 경전의 뜻에 대하여 논쟁을 벌이는데, 거기서 주공, 공자의 요점을 얻었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운 이래,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허망하고 잘못된 경전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어지러운 것을 정리해서 학문을 구하고 경전에 새로 주석을 달기로 하고, 또한 정확한 천문역서를 쓰겠다고 결정한다. 여기에 그는 북방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7번이나 그의 동료들의 의견에 반대하고, 매번 결국은 그의 의견이 맞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는 그를 싸우기 좋아하는 수탉처럼 조당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쪼아대는 것같았다. 탁발도는 여전히 내가 하고싶은대로 한다는 식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최호의 손을 끌어당기며, 그에게 정복된 오랑캐의 신하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들었다는 최백연(崔伯淵)이 바로 이 사람이다." 혹은 그는 높은 곳에 앉아서 고뇌하면서, "최호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이 한탄스럽다"고 탄식했다.


최호의 7번에 걸친 걸출한 반대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대하국을 공격하는 의사결정때, 중신 장손숭에 맞서서 천상으로 대하에 병력을 일으키는게 정확하다고 주장하고, 군대를 따라다니는 술사 조예등이 헛소리하여 군심을 동요시키는 것에 분노하여 공격한다. 마찬가지로 천문연구를 하는 동료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만들었다; 유연을 공격하는 전략에서, 내외의 여러 신하들간에 의견이 맞지 않았다. 장연등 술사들과 성상의 길흉을 논쟁하고, 보태후와 짜고치는 연극을 했다. 북량을 공격하는 문제에서, 홍농왕 해근등 삼십여명과 얼굴을 붉히며 논쟁한다. 심지어 상서 이순이 뇌물을 받았다고 모욕한다. 전쟁후 이순은 피살된다. 443년, 다시 유연을 토벌할 때 그는 대장 유결과 계속 의견이 맞선다. 그리하여 유결은 '최호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게 되고, 작전중에 여러 장수들을 잘못 이끌었다고 말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군은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외에 그는 전후로 3번에 걸쳐 황제와 여러 신하들이 유송을 정벌하는데 반대한다. 그래서 한때 황제는 그가 적과 내통하지 않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글을 올려 자신의 청백함을 밝힌다: 천지귀신이 모두 안다. 나는 국가의 만세 복지를 위하여 계책을 낸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한 나라와 같다. 전성기가 오게 되면 그때부터 하락하게 된다. 여기에는 성극이쇠의 만고진리가 있을 뿐아니라 또한 한 사람이 무적이 되면 그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철리를 담고 있다.


탁발도가 비록 여러 신하들에게 최호의 지모는 아무도 따라갈 수 없고, 예측은 틀린 적이 없다고 말하고, 성지를 내려 국가기관에서 만일 큰 일을 결정하기 어려우면 먼저 최호에게 의견을 물어보라고 하였지만, 그가 부견을 배워 대강의 북쪽에 군사를 모았을 때, 최호가 항상 자기를 말리는 것을 보았다. 이 모략이 뛰어나고 직위가 높은 한족인 사도(사도는 이미 최고직급의 관직이다)가 설마 남인(한족)을 돕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러해동안 탁발도는 신하들이 최호를 모함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그도 잘 알았다. 아무도 이 백마공의 큰아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해에 최호는 승리자 탁발도를 모시고 태원으로 간다. 여러 신하들은 높은 언덕에 올라 만리산천을 내려다본다. 황제는 최호가 자랑스럽게 동료들에게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오등군현의 시비를 논하고, 진시황과 한무제의 잘못을 따졌다. 얼마나 대단한 호기인가. 황제는 한 가지 일을 잊지 않았다. 최호가 소년시절에 자신을 모사 장량과 비교했던 일을: 자신의 계모는 장량에 못지 않다. 옛 학문을 연구하는데에서는 장량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최호는 마치 찔러도 들어갈 틈이 없는 알과도 같았다. 그는 청렴하고 조심스러웠다. 서예창작에서도 <급구장(急救章)>의 "풍한강(馮漢强)"을 "풍대강(馮代强)"으로 바꿔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를 통하여 그는 비록 '한'족이지만 마음은 항상 '대(代, 즉 魏)'를 향해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결점 혹은 구멍은 바로 그의 장점의 연장이다. 대위국의 군대가 연이어 승리를 거둘 때, 최호라는 이 귀찮은 인물을 적당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그렇게 역사를 좋아하고 한 마음으로 '대'를 향하고 있으니, 그로 하여금 40년전에 다 쓰지 못한 국사 <대기(代記)>를 다시 쓰도록 했다. 이는 최호로 하여금 군대에서 몸을 빼도록 하였을 뿐아니라, 이때부터 '난대'에 몸이 묶이게 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한인지식인을 머리가 허옇게 될 때까지 글만 쓰게 만들고, 또한 사십년전의 그 혈안은 그들로 하여금 지나치제 잘난척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십년전에 최굉(崔宏)의 동료이자 친구인 등연(鄧淵)은 명을 받들어 가요 <대가>를 참조하여 국사 <대기> 삼십권을 쓴다. 그러나 그는 사관실록의 전통을 보호하였을 뿐, 역사를 쓰는 것 자체가 국가행동이라는 것은 잊었다. 어쨌든 황실의 체면을 세워주어야 했는데, 그의 <대기>에는 동생이 형수를 취하고, 조카가 이모를 취하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취하는 스캔들까지도 다 기록해놓았다.


이런 과거는 원래 씨족사회에서 집권국가로 들어선 선비족에게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때, 한화를 시작한지 이미 여러해가 된 선비족으로서는 그런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탁발규는 생활작풍의 문제를 핑계삼아 등연의 목을 벤다. 현재 손자인 탁발도가 다시 최호를 불러서, "조상의 유지, 과인의 업적이 영원히 남아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대만이 이 중임을 담당할 수있다. 사실대로 기록하라. 최호는 당연히 등연의 일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그는 이 새로운 일을 회피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환호작약했다


원래 이는 바로 최호가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사업이다. 이 사업은 군대를 따라서 계책을 세우고, 여러번 놀라운 공로를 세우는 것보다 더 그의 마음에 들었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여러 군웅들이 발호할 때 천하는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위진이래 비록 짧은 기간동안 통일된 적은 있었지만, 얼마후에는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오호난화(五胡亂華). 최호가 보기에, 요순,주자공자의 일맥이 전승되는 화하의 도통이 아직 타락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가족의 힘때문이다. 주나라의 도가 퇴락하자 공자는 <춘추>를 쓴다. 현재는 그가 마침내 성인과 같이 인륜의 정사에 대하여 영원히 남을 기록을 남겨야 할 때이다.


그의 내심은 자만과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확실히 아무도 그처럼 선왕지도, 치란지적(治亂之迹)에 대하여 미친 듯이 관심을 쏟지 않았다. 사가들은 그를 이렇게 개괄한다. "호고식치(好古識治), 시복기언(時伏其言)". 그는 박학하고 말재주가 있어서 명원제도 그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그에게 소금과 술을 내렸다. 그 뜻은 그대의 말을 듣는 것은 마치 소금을 먹고 술을 먹는 맛과 같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선비귀족들이 보기에, 그가 밤새도록 황제에게 역사를 얘기하는 것은 군주에게 한족을 많이 등용하고 선비족을 배척하도록 고혹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도사 구겸지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누면서 심각하게 고대의 치란의 변천을 얘기하곤 했다


이렇게 말해도 기실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멸불운동때 최호는 일찌기 태자 즉 나중의 공제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그는 구겸지와 꿈을 꾸었다고 말하기까지 하면서 척발도를 고혹시켜 태자의 중요한 심복을 죽여버린다. 이는 태자로 하여금 최호에게 적대적이게 만들었다. 다만 최호는 그의 마음 속에 신성한 도통과 문맥이 이어지도록, 전후 이십년간 있는 힘을 다 해서 사서를 쓰게 된다. 특히 후반 십년동안 그는 일체의 사서편찬업무를 책임진다. 그리고 중서시랑 고윤, 산기시랑 장위등 뛰어난 조력자도 있었다.


그러나 .극표와 민담등 하급사관이 최호가 총편찬을 맡은 국사를 석비에 새겨 만세에 남기자고 했을 때, 조수인 고윤과 또 다른 편수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최호때문에 죽을 것이다. 한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최호는 일찌기 명원제의 면전에서 득의만면하여 강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인물들의 품성을 논한 바 있다. 그는 왕맹을 부견의 관중이라고 말했고, 모용위는 모용각의 곽광이라고 말한다. 유유는 사마덕종의 조조라고 말하며, 반드시 황위를 찬탈할 것이라고 말한다; 혁련발발은 배덕하는 소인이므로 반드시 망할 것이다. 명원제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에게 물어본다. 그렇다면 대위국의 태조황제는 어떤가? 그는 복희씨 즉 신농씨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냥 듣기에는 아부하는 소리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야만시대의 한족수령을 선비의 태조황제에 비유한 것은 "그 말이 즉 선비족은 야만족이라는 것을 직접 말한 셈이다"


인문학술의 계승자로서, 최호는 주자,공자의 학문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이 보기에 그는 지나쳤다. 그는 도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도사 구겸지는 좋아했다. 어느 정도 구겸지가 얘기한 그 통큰 말때문이조 모른다. 나는 천년절통을 잇고 있다. 그는 이 도사의 비조를 위하여 이십여편의 역사교과서를 써서 위로는 태초로 아래로는 진한변혁기까지 썼다. 대체적인 내용은 상고시대 분봉제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저 조정으로 하여금 세습명문거족의 권력지위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최호에 있어서, 사서를 쓰는 것의 의미는 이미 역사학 자체를 넘어선다. 그것은 도통 혹은 문명혈맥의 계승과 유지에 관련된다. 당연히 오호난화의 무대에서, 이미 지미렬렬해진 인륜질서와 예법규범을 새로 정비하고 회복시키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원래 역사학이 짊어져야할 것이 아닌 중임을 짊어질 수 있을까? 그는 그저 이십년간 심혈을 기울여 청하최씨를 위하여 멸문의 재난을 불러왔다. 심지어 그가 존경하고 혼인관계를 맺은 범양노씨(范陽盧氏), 태원곽씨, 하동류씨(河東柳氏)까지 연루시킨다. 이는 당시 한족문화의 계승자가 모조리 소멸된 것이다.


민담과 극표는 최호의 사서편찬 작업 중에서 중요성이 떨어지는 두 명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놀라운 사태를 일으킨다. 그들은 일찌기 황제에게 글을 올린다. 마,정,왕,가의 사대가(四大家)가 육경에 주석을 단 것은 오류가 많다. 최호의 육경에 대한 주석만큼 정교하지 못하다. 황제께서 허가를 해주셔서, 최호의 정확한 해석을 천하에 반포하게 해달라. 후세들이 연구하는 기본교과서로 삼게 해달라. 그들은 척발도에게 최호를 크게 띄워준다. 그래서 최호는 그들은 자기의 문하생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기뻐하며 황제에게 글을 올려 그들이 사서 저술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들이 쓴 것은 "취하고자 한다면, 먼저 주어라"는 고대의 방법이다.


이어서 그들은 최호의 동의를 받아 그들이 막 편찬한 척발선비국사를 교통요지의 가에 있는 그 비림에 새겨서 영원히 남기는데 동의한다. 이는 직필로 역사를 쓰는 사관의 "불허미(不虛美), 불은악(不隱惡)"의 모범이라고 하였다. 확실히 고금이래로 영원무궁한 것은 없다. 이 역사의 깊은 곳에 세워진 비석진은 나중에 사관들의 피로 얼룩지게 된다. 이들 사관들은 정치와 역사의 사이에서 스스로 깨달았건 아니건 과거를 새로 구성하고, 현재를 확인하고 미래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역사의 블랙홀에 뛰어든 것이다.


왜 그런지 몰라도, 최호의 부하가 비석을 세우고 사서를 새기는 5년동안, 천자의 눈아래에서 벌어지고 부지를 백삼십보나 차지하며, 동원된 인력만 300만인/차가 되며, 밤낮으로 작업을 했는데, 천자 혹은 대신들은 한번도 이 일에 대하여 물어본 적이 없다. 남은 기록을 보면 이 조상과 현재의 영욕과 관련된 국가사업이 황제와 조정의 동의를 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이렇게 이렇게 자유롭게 키우도록 놔두었다가 어느날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 돌연 튀어나와서 소리친다: 사람들은 석비에 새겨진 과거에 지나간 일이 얼마나 추악하고 차마 볼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하여 깜짝 놀랐다. 당연히 이는 소인의 성공이 아니라, 그들 배후에 있는 고금이래로 항상 존재하는 복잡하고 애매한 우리편'의 승리이다.


최호는 수거(囚車)에 실려 형장으로 압송될 때 나이가 칠십세였다. 약관의 해부터 계산하면, 그는 이 정권을 위하여 반세기동안 꼬박 일을 했다. 이 나라가 초원의 선비정권에서 중원의 강대한 제국으로 굴기할 때까지 그의 공헌은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현재, 수십명의 선비병사는 그들의 고귀한 소변을 이 몸과 마음이 다 오췌해진 노인에게 눈다. 이는 지나간 시대에 민족융합과정에서 발생한 종족주의가 가져온 불행일 뿐아니라, 다시 한번 '우리측'이 '우리측'을 미워하는 '간당'을 교살하고 모욕한 것이다. 이 '간당'이 선지자이건 선비이건 도통을 이은 자이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이건 가릴 것이 없이.


그러나 이런 것을 주목한 사람은 적었다. 하늘의 일까지도 알고 있던 최백연이 기실 연약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족들도 잘 알지 못했다. 그때 부친 최굉의 병이 위중해졌었는데, 최호는 손톱을 깍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마당의 가운데 꿇어앉아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피를 흘렸다. 그가 하늘에 이렇게 기도했지만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부친의 명과 바꿔달라고 했지만,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한다. 보기에 그와 하늘의 관계는 그가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처럼 그다지 신기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가 죽기 직전에, 그는 당시에 실패했던 그 일을 기억해 냈을까? 그리고 당시 부친과 함께 황제의 수레에 올라 거리를 지나던 위풍당당했던 시절을 그리워했을까? 모친을 생각했을까? 그 전쟁의 시대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으로 도망치던 여인, 그녀는 항상 배를 곯으면서도 한번도 예의와 인의로 자식들을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중에 최호는 <식경서(食經敍)>를 써서 통철하게 말한다; 지금 그는 비단옷을 입고 좋은 고기를 먹고 있지만, 다시는 자로가 쌀을 등에 지고 백리를 가서 효도하던 것처럼 할 수가 없다고. 그 외에 최호는 당시 노쇠한 도무제의 곁에서 죽을 먹던 그 고독한 온정을 생각해 냈을까? 그는 아니면 다른...것을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의 그 고귀한 머리는 결국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누구도 남음 진정으로 죽일 수는 없다. 사람은 그저 자신의 마음 속의 그 도에 죽을 뿐이다. 최호는 바로 그 중의 한 명이다. 자기가 굳게 믿는 것(역사)에 의하여 유인살해당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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