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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염민(冉閔): 민족영웅인가, 살인마왕인가?

by 중은우시 2016. 7. 9.

글: 초상풍어(草上風語)


서진(西晋) 말기의 중국북방지구는 한 마디로 말해서: 난(亂)이었다.


먼저 내란(內亂)이다. 사마(司馬)씨의 자식들은 한대 한대 내려가면서 더 못해졌지만, 권력욕은 한대 한대 내려가면서 더욱 커졌다. 16년에 걸친 "팔왕의 난"은 결국 진왕조의 정기신(精氣神)을 모조리 소모했고, 겨우 삼국의 전란에서 벗어나 있던 화하대지는 다시 더욱 큰 재난에 처하게 된다.


더 골치아픈 것은 외환(外患)이다. 중원이 빈껍데기가 되고,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저(氐), 강(羌)등 북방유목민족은 수백만의 무리가 이 틈을 타서 밀고 들어와서, 성을 빼앗고 땅알 차지했으며, 살인방화약탈을 했다. 서진의 조정은 엉망진창이 되고, 왕후공경도 사라져 버린다. 역사에서 말하는 "오호난화(五胡亂華)"의 시대이다.


동진의 소조정이 강남에 자리를 잡자, 북방의 화하민족, 특히 사대부계층은 속속 남방으로 도망친다. 앞에는 큰 강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오랑캐의 말발굽이 따라온다. 온몸이 기아의 고통과 비바람의 고통을 견디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낭패하게 민족대도망의 길에 나선 것이다. 이를 가리켜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 "의관남도(衣冠南渡)"이다.


"의관"들이 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망치자 북쪽에 남겨진 백성들은 도마 위의 고기가 된다.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외족의 폭압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오호"의 전쟁가운데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한다. 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북지창량(北地滄凉), 의관남도(衣冠南渡), 호적편지(胡狄遍地), 한가자제기욕피수도대진(漢家子弟幾欲被數屠殆盡)"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이 기세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북방의 화하민족은 씨가 말라버릴 것같았다.


그러나, 논쟁거리가 많은 한 인물이 돌연 출현하여 이 추세를 바꿔 버린다. 그는 갈족의 수중에서 정권을 빼앗고, "살호령(殺胡令)"을 추진하여, 수백만의 호인들을 축출하거나 죽여버린다. 거의 혼자의 힘으로 강적을 여러번 물리친 것이다. 그는 객관적으로 북방 화하민족의 생존권을 지켜냈다.


그가 바로 염민이다.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민족영웅"이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독부민천(獨夫民賤)"과 "살신(殺神)"이다.


갈조왕조(羯趙王朝)의 핵심장수


염민이라는 사람은 쓰기가 아주 어렵다. 사실상 붓을 들기 전에 필자는 여러번 망설였다.


후세의 그에 대한 평가는 포폄(褒貶)이 있다는 것은 그 다음문제이고, 가장 어려운 것은 겹겹이 쌓여 있는 황사를 걷어내고, 하나하나 역사의 진상을 발굴해낼 때, 여전히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그의 용기와 과감을 구가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의 냉혈과 폭력을 저주해야 하는가?


우리는 최대한 진실한 역사를 복원하고, 진실한 염민을 복원해보기로 하자.


"오호난화"의 과정은 상당히 혼란스럽다. 한족과 호족이 서로 싸웠을 뿐아니라, 오호의 사이에서도 서로 엉켜서 싸웠다. 큰 틀로 정리를 해보면 십육국의 전반기에는 두 갈래의 강대한 세력이 있었다. 즉 유연(劉淵), 유총(劉聰)을 우두머리로 하는 흉노족이 건립한 전조(前趙), 그리고 석륵(石勒), 석호(石虎)를 우두머리로 하는 갈족이 건립한 후조(後趙). 특히 석호시대의 후조는 전성기를 이루어 거의 북방을 통일했었다.


염민은 내황(內黃,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내황현) 사람이다. 한족이며 어릴 때의 자는 극노(棘奴)이다. 그의 부친인 염량(冉良)은 '걸활군(乞活軍)"에 참가하여 호인들과 전투를 했다. 비록 패전하여 포로로 잡혔지만 용맹했다. 그래서 석호가 양자로 삼았으며 이름을 석첨(石瞻)으로 바꾼다. 나이 겨우 12살인 염민은 부친을 따라 석민(石閔)으로 개명한다.


"걸활군"은 당시 반관(半官)의 한족난민집단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생존을 위하여 싸웠다. 혹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발버둥을 쳤던 유민무장세력이다.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뭉쳐서 도망치며 먹을 것을 구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당시 북방백성들의 열악한 생존환경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석민은 어려서부터 놀라운 군사적 재능을 보인다. 그리하여 석호의 인정을 받는다. 그래서 친손자처럼 그를 키운다. 석민이 처음으로 그의 재능을 드러낸 것은 패전때였다. 각로의 우군이 모두 궤멸하여 도망치는데, 유독 어린 석민이 이끄는 부대만이 아무런 손실없이 전리품을 가지고 귀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괄목상대한다.


그후의 세월동안 석민은 병력을 이끌고 여기저기서 전투에 나선다. 1년내내 며칠 쉬지도 못했다. 비유하자면 아침에는 닭보다 먼저 일어나고, 저녁에는 닭보다 늦게 잤다. 후조를 위하여 그의 청춘세월을 모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찌기 사람을 이끌고 면음(沔陰, 지금의 호북성 수현)으로 북벌하겠다고 쳐들어온 동진군과 맞싸워서 동진의 장수 채회(蔡懷)를 참살한다. 이어서 말을 계속 달려 낙양으로 가서 반란을 일으킨 양독(梁犢)군대를 토벌한다. 그 공으로 정로장군(征虜將軍)에 봉해진다.


석호가 죽은 후 막내아들 석세(石世)가 즉위한다. 석민은 석호의 또 다른 아들인 석준(石遵)에게 황위를 빼앗자고 권유하여 큰 공을 세우고 무흥공(武興公), 도독중외제군사, 보국대장군에 봉해진다. 그리고 석민은 다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병력을 이끌고 석준에게 위협이 되던 패왕(沛王) 석충(石沖)을 토벌한다. 그리고 석충의 수하 3만을 산채로 묻어버린다.


이 때까지만 해도 석민은 스스로를 석호의 친손자로 여겼고, '호한일가친(胡漢一家親)"의 행복한 물결에 도취되어 있었다. 전혀 '살호'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설두(大舌頭)" 석준이 말나오는 김에 했던 한 마디 농담은 그 자신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아니라, 석민의 인생궤적도 바뀌게 된다.


탈위전에 성패를 알 수 없었던 석준은 석민의 어깨를 치며 말한다: 잘해 보자. 일이 성사되면 너를 태자로 삼겠다!


자신을 외인이라 여기지 않던 석민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기꺼이 온갖 더러운 일, 힘든 일을 모조리 맡아서 했다. 그러나 성사된 후, 그는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태자는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신중해야 한다. 경솔하게 하다가는 문제가 터진다. 듣는 사람이 신경쓰지 않으면 몰라도  진지하게 들으면 실말하게 된다. 실망에 빠진 석민은 자신의 공로가 큰 것을 무기로 삼아 조정을 통제하려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자신의 편을 만든다. 이렇게 석준과 계속 멀어지고, 갈등은 날로 심해진다.


개인은원이 민족학살로 발전하다.


관계가 껄끄러워지면 시간을 끄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석준은 "친본가(親本家)"의 의양왕 석감(石鑒), 낙평왕 석포(石苞), 여양왕 석곤(石琨)등을 불러 가족회의를 연다. 여기서 말안듣는 외인인 석민을 제거하자고 제안하고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정태후(鄭太后, 석호의 황후)는 이렇게 말한다: "극노(석민)의 공로가 이렇게 큰데, 약간의 작은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되는 것이지, 왜 반드시 죽이려고 하느냐?"


비록 여자의 마음이 약하다고 하지만, 석준이 조정신하들과 논의하지 않고, 일가들만 모아서 이 일을 논의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석민에 대하여 아직은 감정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품은 석감은 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직접 석민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회의상황을 하나하나 모조리 말해준다.


석민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리하여 대사마 이농(李農)을 납치하여(사서에는 납치라고 적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스스로 원해서인 것같고, 최소한 자의반타의반인 것같다), 약간 상의한 후 병력 3천을 궁안으로 보내어 석준을 붙잡아 그를 죽여버린다. 석민을 계속 보호했던 정태후도 함께 피살된다. 석준이 죽기 전에 이렇게 묻는다: 누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가? 사병이 대답한다: 의양왕(석감)이 황제가 되어야 합니다. 석준은 마음 속에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가가대소한다: 나까지도 이렇게 당했는데, 석준같은 멍청이가 며칠이나 버티겠는가?


석감은 바라는대로 황위에 오른다. 사실은 그가 멍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능력은 너무 높게 평가했을 뿐이다. 그는 한편으로 석민을 무덕왕(武德王), 대장군에 봉하고, 다른 한편으로 갈족 장수들을 부추겨서 석민을 공격하게 하여 차도살인하려 했다. 그러나 전후 여러번 모두 성공하지 못한다. 갈족들이 석민에게 적지 않게 죽임을 당했다. 가장 기이했던 장면은 이렇다. 용양장군 손복도등이 3천의 갈족사병을 이끌고 궁문 부근에 매복해서 석민을 습격하여 죽일 준비를 했다. 석감은 기분이 좋아서 그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짐이 높은 곳에서 보고 있다. 너희는 힘을 다하여 일을 완성해라. 보답이 있을 거라는 것은 걱정하지 말고.


그러나 석민은 실로 너무 용맹했다. 삼천의 매복병사들은 그와 수백의 호위를 어쩌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농이 이끄는 수천의 사병이 황궁을 공격한다. 석감은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즉시 방향을 바꾸어 급히 사람들에게 석민, 이농을 위하여 궁문을 열어주라고 한다. 그리고 어지를 내린다: 손복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러분은 짐을 위하여 그를 제거하라.


황명이 있으니, 석민은 더욱 기운을 내서 손복도를 죽인 후, 그는 성안에서 대거 살인을 저지른다. "봉양문에서곤화문까지 시신이 서로를 베고 쌓여 있고, 피가 흘러 도랑을 이루었다." 그를 습격하여 죽이려 한 것은 모두 갈족 사병이어서 그는 또 이런 명령을 내린다: 성안 성밖의 모든 호인중 손에 병기를 들고 있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업도(지금의 하북성 한단시 임장현) 성내의 호인들은 형세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담량이 큰 자들은 칼을 들고 성문으로 뚫고 나갔고, 담량이 작은 자들은 담장을 넘어 도망쳤다.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석민은 명령을 내린다: "최근 난당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양민은 모두 참여하지 않았으니 추궁할 것없다. 오늘부터 성문을 크게 열겠다. 나와 마음을 같이 할 자들은 남고, 나를 따르지 않을 자들은 각자 알아서 하라.


명령이 내려지자, 방원 백리의 한인은 속속 업도로 몰려든다. 밖으로 도망치는 호인으로 성문이 막여서 물샐틈도 없었다. 세상인심은 염량세태이고, 경위는 분명하다. 석민은 이때부터 호인은 자신을 위하여 일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 저명한 "살호령(殺胡令)"을 내린다.


"조(趙) 나라 사람으로 호인의 수급을 하나 참하여 봉양문으로 보낸 자는 문관은 3등을 진급시키고, 무관은 아문으로 임명하겠다."


명령이 내려지자 단 하룻만에 업도 봉양문 밖의 광장에는 수만의 호인의 수급이 쌓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보면, 석민이 내린 "살호령"이 비록 일시적으로 흥분하여 내린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한족과 호족간의 갈등이 축적되어 격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한족은 수십년동안 핍박을 받았고, 이 기회를 틈타서 분풀이를 하려는 정서가 폭발했다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다.


일단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한다. 석민은 친히 수하 조나라사람인 사병을 거느리고 업도 주위에서 계속하여 호인을 토벌한다. "귀천,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참했다. 죽은 자가 이십여만에 이르렀고, 시신은 성 밖에서 들개와 이리, 늑대들의 먹이가 되었다." 동시에 살호령을 각지로 전파한다. 사만의 조나라사람인 장수중 일부는 그의 명령을 들어 호인들을 참살하기 시작했다. 많은 한인들은 코가 크거나 혹은 수염이 짙은 자는 호인으로 취급하여 죽였다. 일시에 전체 중국북방 수백만 호인은 속속 원래의 거주지로 도망쳤다. 서로간에 공격하고 약탈하여 죽은 자가 온 들판에 널렸다. 고향까지 돌아간 사람은 열에 둘, 셋 밖에 되지 않았다.


정치적 수완이 부족하여 고립된다.


국면을 통제한 석민은 "탈호화(脫胡化)" 조치를 취한다. 그는 먼저 빈껍대기황제 석감을 궁내의 한 높은 누각에 가두어두고, 먹고 마시고 싸는 모든 일을 공중운송으로 해결했다. 바구니에 넣어서 올려주고 내려보내고 했다. 그 후에 참문의 "계조리(繼趙李)"라는 글자가 있다는 것을 활용하여, 350년, 국호를 위(衛)로 고치고, 석가를 모두 이가로 바꾸게 하였다.


이 조치는 석민을 사상유례없이 고립되게 만든다. 원래 "살호령"으로 후조국의 호인고위층은 엄청나게 분노했었다. 그런데 국호도 바꾸고 성도 바꾸게 하였다. 앞으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다. 그래서 왕공대신들도 속속 도망을 선택한다. 사료를 살펴보면 상황이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태재(太宰) 조서(趙庶), 태위(太尉) 장거(張擧), 중군장군 장춘(張春), 광록대부 석악(石岳), 무군 석녕(石寧), 무위장군 장계(張季) 및 공후, 경, 교, 용등등 만여명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쳤다. 여양왕 석곤은 기주로 도망친다. 무군장군 장침은 부구를 차지하고, 장하도는 석독을 차지하고, 건의장군 단근은 여양을 차지하고, 영남장군 양군은 상벽을 차지하고, 유국은 양성을 차지하고, 단감은 진류를 차지하고, 요과중은 섭두를 차지하고, 포홍은 방두를 차지하고 있는데 모두 수만을 거느리고 석민을 따르지 않았다.


핵심은 마지막 문구이다. "모두 석민을 따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와해의 조짐이다. 궁안에 갇혀 있는 석감은 바깥의 병마를 동원하여 업도를 기습하여 취할 생각이었다. 석민은 이를 알고난 후에 더 이상 봐주지 않고, 즉시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아예 업도에 머무르던 석호의 38명의 손자를 모조리 죽여서 석씨를 멸종시킨다.


석씨와의 옛 빚을 청산하자, 황제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석민은 한번 사양한다. 먼저 이농에게 황제의 자리에 앉으라고 양보한다. 이농은 당연히 감히 이를 받지 못한다. 그 후에 석민은 모두와 상의한다: 우리는 원래 진(晋)의 사람이다. 현재 진왕조의 황실은 비어 있다. 사마씨를 낙양으로 모셔와서 황제로 앉히는 것이 어떤가?


상서 호목이 급히 말한다: 사마씨 그 개자식들은 일찌감치 강남으로 도망쳤다. 현재 천하가 대란에 빠졌으니 그들이 어찌 이 국면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당신이 나서야 한다.


석민은 기뻐한다: 상서야말로 천명을 아는구나. 나는 네 말을 따르겠다.


그래서 석민이 황제위에 앉는다. 성명도 염민으로 되돌린다. 국호는 다시 대위(大魏)로 바꾼다. 그러나 대위의 정령은 단지 업성 부근에서만 통했다. 후조의 다른 군진은 기본적으로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때 염민은 다시 내부에서 대거 살인을 벌인다. 이농등 많은 심복들이 이때 그의 칼아래 목숨을 잃는다. 염민이 굴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이농은 계속하여 '친밀한 전우'와 '지도선생'의 이중 역할을 담당했다. 쌍방이 왜 이때 반목하게 되었는지 사료에는 전혀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내분이 염민에게 조성한 심리적 타격은 상당히 침중했다.


염민은 비록 일처리를 감정적으로 했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지는 않았다. 강적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국면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외부에서 지원을 받기로 결정하여, 특별히 사신을 장강변으로 보내어, 동진의 소조정에 말을 전한다: "나는 현재 호인을 정리하고 있다. 너희가 만일 조상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함께 하자."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장강의 물결이 동쪽으로 도도히 흘러가는 소리 외에는 그저 침묵뿐이었다.


여러 오랑캐와 힘껏 싸우면서 전쟁이 없는 달이 없었다.


염위가 건립된 후, 사방을 둘러보니 모조리 적이었다. 거의 매월 전투가 일어난다. "살호령"은 비록 후조 경내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었지만, 염민이 기대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귀순해오는 한인도 단지 업성 및 소수의 부근 성진에 국한되었다. 사실상, 당시 북방호인정권은 많은 경우 호인과 한인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저족의 포홍, 선비족의 모용준등과 같이중원문화를 숭상하여 많은 한인지식분자를 받아들여서, 이전의 무자비한 살륙정책을 바꾸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생산을 회복하는 것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석륵 석호 숙질이 호인중 비교적 높은 명망을 지니고 있어서, 염민이 석씨자손을 도살한 생위는 그들의 강력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염위와 싸울 때의 태도는 매우 결사적이었다. 예를 들어 강족의 추장인 요과중은 그의 아들 요양을 출정시키는데 출발하기 전에 반드시 염민을 생포하여 효수해야한다고 당부했다. 그 전투에서 요양이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부친의 바램을 이뤄주지는 못했다. 돌아온 후에 여전히 부친에게 채찍 100대를 맞는다.


비록 요양에게 한번 패배했지만, 염민의 군사재능은 지적할 점이 없었다. 그의 병력은 항상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있고, 보병이 위주였다. 그런데도 강적들을 연신 패배시켰다. 매번 전투마다 염민은 항상 "주룡마(朱龍馬)"를 타고 왼손에는 쌍인모를 들고, 오른 손에는 구극을 들고 앞장서서 돌진했다. 그의 군대는 시종 사기가 높았다.


다만 염민은 치국이념과 능력이 부족했다. 물자와 저축을 중시하지 않았다. 투항해온 호인을 대하는 정책에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어떨 때는 차갑다가 어떨 때는 뜨거웠다. 최초에는 사로잡은 호인을 일률적으로 참살하거나 생매장했다. 나중에 다시 호인의 지지와 양해를 얻기 위하여, 투항한 호인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고, 자신의 아들 염윤(冉胤)에게 흉노의 관명인 대선우(大單于)에 봉하여, 호인들이 포로로 잡히면 그의 부하로 배속시켰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조심하라고 권했다. 그는 호인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하여, 권하는 자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다.


이전에 "살호령"으로 조성된 원한이 너무 깊어서, 이러한 보완조치들로는 한족과 호족의 갈등을 해소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심각한 은환만 남겼다. 그리고 신변의 사람들의 인심만 흩어졌다. 예를 들어, 염민이 요양에게 패배한 그 전투에서, 부하인 호인들이 돌연 반기를 들고, 염윤을 붙잡아 적에게 바친다. 이렇게 하여 염민은 큰 타격을 입는다.


비록 대외작전에서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염위의 국력은 날로 소모되었고, 갈수록 쇠약해진다. 양식이 결핍되어, 그는 부득이 군대를 이끌고 업성을 떠나야 했다. 사방을 돌아가니며 걸식하여, '개방방주'가 된다. 역사상 북방지구의 전쟁은 계속 끊이지 않았고, 토지는 황무지가 되고 다시 수재와 가뭄을 당한다. 인재와 천재가 겹쳐서 걸인들이 넘쳐났다. 김용선생이 무협소설을 창작할 때, '북개"라고 쓰고 '동개'나 '서개'로 쓰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북인들은 비록 힘들게 살았지만, 염민과 같이, 황제가 병력을 이끌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은 찾는 일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사람이 죽자 국가가 없어지고,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352년, 염민은 인생의 두번째 그리고 마지막 실패를 맛본다.


이번에 그는 보병 위주인 1만군대를 이끌고, 전연 선비족 모용씨의 능력있는 자 중에서도 능력있는 자이며 수탉중에서도 싸움닭인 모용각(慕容恪)과 상대하게 되었다. 연군은 기병위주이고 수는 14만(일설에는 7만)이며, 양초는 충분했고, 사기도 높았다. 모용각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거의 패전한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은 그를 오호십육국시대 제일명장으로 꼽기도 한다.


이번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일방적인 전투이다. 그러나 정말 싸우기 시작하자, 모용각은 비로소 염민의 무서움을 깨닫게 된다.


위창(魏昌, 하북성 석가장시 무극현)전투에서, 연군은 십전십패하여 거의 투지를 상실한다. 버티기 힘들 때쯤, 모용각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염민은 필부지용일 뿐이다. 그들을 평지로 끌어내기만 하면 우리 군기병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으니 반드시 그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모용각은 오천기병을 정선하여, 철삭으로 서로 연결시키고 방진을 만들어 앞으로 전진한다. (후세 금나라병사들의 '철부도(鐵浮屠)'도 같은 원리이다) 염민은 말을 몰고 출격하여, 다시 한번 "쌍수박격지술(雙手搏擊之術)"을 시전하여 친히 삼백여명의 연군을 죽인다. 연군은 좌우의 양날개로 협공하여 그를 안으로 세 겹, 밖으로 세겹 둘러싼다. 그러나 염민은 혼자서 포위권을 돌파한다. "포위망을 궤멸시키고 동쪽으로 이십여리를 도망간다" 아마도 그의 운수가 다했는지, 그가 타던 '주룡마'가 이때 돌연 죽는다. 그래서 추격하던 연군에 포로로 잡힌다.


포로가 되었지만, 염민은 그래도 기세가 당당했다. 전연황제 모용준은 염민을 욕한다: "너는 석씨의 노예이면서 어찌 감히 황제를 칭했는가?" 염민은 그 자리에서 대답한다: "천하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너같은 낭심구폐의 오랑캐도 감히 황제를 칭하는데, 어르신은 중토의 영웅인데 못할 게 무엇이냐."


이해 오월 초삼일, 염민은 용성 알경산(지금의 요녕성 조양시)에서 피살된다. 사후에 이 산의 방원 7리는 초목이 모두 말라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7개월 연속하여 가뭄이 든다. 그리고 메뚜기떼의 피해를 입는다. 모용준은 이는 염민의 영혼이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한인을 다독이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산위에서 그를 제사지내고 '무도천왕'이라는 존호를 내린다. 기이하기는 하지만 그날로 큰 눈이 내린다.


후세의 염민에 대한 평가는 차이가 아주 크다. 어떤 사람은 그가 원한을 선동한 살인광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를 민족영웅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가 민족의 생존을 유지시켜주었으며 공적이 저평가되어 있다고도 말한다. 중국역사상 한인이 고통받는 시기는 많았다. 다른 민족을 핍박한 시기는 적었다. 염민의 강경한 태도는 민족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일이었다.


여러 평론가운데, 필자의 생각에 범문란 선생의 평가가 가장 맞는 것같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염민은 용감함을 보이며 함부로 사람을 죽였따. 나라를 세우고 3년동안 무수한 사람을 죽였으니 실패는 필연적이다. 다만, 그의 야만적인 행동은 한족의 갈족 흉노족 아만통치에 대한 방항정서를 반영한다. 그래서 그의 피살은 한족사람들의 동정을 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