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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무제)

파출백가(罷黜百家): 한무제의 가장 큰 실수

by 중은우시 2014. 8. 26.

글: 이중천(易中天)

 

한무제는 기실 아주 가련하다

염철회의의 소집은 시원6년(기원전81년)의 일로, 한무제가 죽은지 겨우 6년으로 시골미한(屍骨未寒)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현량문학들의 발언은 철저히 청산하는 의미를 드러냈다. 비록 원래 한무제가 없었더라면 현량문학도 있을 수 없었을 터인데.

논쟁은 회의가 끝났다고 종결되지 않았다.

본시2년(기원전72년), 한선제는 한무제를 위하여 묘호를 올리고 연회를 베풒고자 한다. 이것은 당연히 대사이다. 한나라때는 현재와 다르다. 모든 황제가 죽으면 묘호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고황제 유방과 문황제 유환만이 고조와 태종의 묘호를 받았을 뿐, 한혜제, 한경제는 모두 시호만 있었다.

한선제는 그의 증조부인 유철(한무제)가 묘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무황제도 되는데.

그러나 하후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생이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이유는 한무제가 호대희공(好大喜功)하고 궁병독무(窮兵黷武)하고 무수히 살인을 저지르며, 돈을 마구 써대어 적야천리(赤野千里)하고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덕이 전혀 없는데, 어찌 묘호를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자 조정은 난리가 난다. 공경들은 일제히 하후승을 책망한다. 이건 황상의 뜻인데 어찌 반대하는가? 그러나 하후승은 이렇게 반박한다. 황상의 뜻이면 또 어떠냐. 신하의 의리는 직언을 하는 것이다. 말은 이미 내뱉었으니, 만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다.

당연히 한무제에게 묘호를 올리는 안건은 그래도 통과된다. 묘호를 세종으로 한다. 다만 하후승의 반대의견도 사실대로 기록에 남겨서 후세에 전한다. 그 본인은 2년동안 감옥에 같혀 있다가 석방되고, 한선제로부터 예우를 받는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첫째, 한나라때는 상당한 언론자유가 있었다.

둘째, 하후승의 비판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실제로, 하후승이 모두 다 말한 것은 아니다. 만일 원했더라면, 번형중렴(繁刑重斂), 숭요신괴(崇妖信怪), 살벌임성(殺伐任性), 희노무상(喜怒無常)등도 추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마광은 한무제의 악은 거의 진시황에 가까바고 했다. 단지 그는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충언을 받아들이고, 옳은 일과 그른 일을 알고, 사람을 쓸 줄 알았다. 그래서 한나라는 망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이라 하더라도, 어찌 진심어린 찬미를 받은 바 있다. 이를 보면 문제는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아니라, 평가의 입장에 있다. 

하후승의 입장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가이다. 나중의 반고와 사마광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아이러니한 것은 한무제는 고대에도 유가의 욕을 먹었는데, 근현대에는 유가를 존중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것은 안팎으로 말이 되지 않을 일이다.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절대경륜절대재(絶大經綸絶大才)

죄공부재회윤대(罪功不在悔輪臺)

백가파후무기사(百家罷後無奇士)

영위신주종화태(永爲神州種禍胎)

 

이 시의 의미는 분명하다: 한무제의 웅재대략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최대의 과실은 전쟁을 일으킨데 있는 것이 아니라, 파출백가한데 있다.

이것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아니다.

확실히 사상문화분야에서 일가독존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백가가 없으면 쟁명도 없다. 쟁명이 없으면 사상이 없다, 사상이 없으면 풍골과 절개도 없다. 이러할진데, 어디에서 천하의 흥망을 책임지고, 문명성과를 창조하는 기인이사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저 노재(奴才)만 양산할 뿐이다.

문제는 이 화근을 정말 한무제가 심었느냐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사실상, 한무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은 조건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관학의 범위내이다. 즉, 파출백가는 유가이외의 제자에 박사관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독존유술은 그저 유학서적을 읽으면 관직에 나가기 쉽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백가는 파출되지도 않았고, 유술이 독존도 아니었다.

기실 정부조차도, 유가의 통일천하는 아니었다. 장탕이 유가인가? 위청이 유가인가? 상홍양이 유가인가? 한무제가 만일 정말 독존유술하려고 했다면, 현랑문학들이 어찌 그렇게 그에게 화를 냈을까?

하물며 한무제시대에는 기인이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급압이 그렇지 않은가? 하후승이 그렇지 않은가? 사마천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의종(義縱)도 있다. 고민법을 반대하다가 죽은. 의종은 그러나 혹리이다. 다만 어떠했던가? 최소한 기개는 있었다.

그리고 동방삭도 있다.

동방삭은 사마천이 <활계열전>에 기록한 인물이다. 그는 한무제 조정에서의 지위는 코미디언이었다. 그러나, 한무제가 관도공주의 애인 동언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 때, 동방삭은 조정의 위엄을 보호하기 위하여, 문앞을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한무제는 할 수 없이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동언은 할 수 없이 뒷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기인이사의 기개는 심지어 소인물에게서도 나타났다.

후세에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그 소인물은 바로 궁중의 인장을 관장하는 낭관이다. 어느날 저녁, 궁안에 귀신소동이 일어난다. 당직을 서던 대사마 대장군 곽광은 일이 일어날 것을 겁내서 낭관에게 인새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낭관은 주지 않는다. 곽광은 이를 빼앗으려 한다. 낭관은 손을 검자루에 얹고 정색을 하고 말한다: 신의 머리는 가져갈 수 있지만, 인새는 가져가실 수 없습니다.

권력이 천하를 뒤흔드는 곽광도 그저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기괴한 일도 아니다. 한무제시대는 선진시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새로 왕조를 건설한 한왕조는 혈기방장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때의 중국인은 후세인들보다 훨씬 솔직했고, 더욱 용감했다. 더욱 질박하고 더욱 강인했다. 한나라의 기질은 웅대(雄大), 홍방(弘放) 그리고 심침(深沉)이다.

기질이 유미(柔美), 공령(空靈) 그리고 내수(內秀)하게 바뀐 것은 중당(中唐)이후이다. 유학이 진정 통치사상으로 정립된 것도 송원이후의 일이다. 백가파진(百家罷盡), 만마제암(萬馬齊暗)은 주원장과 건륭제가 문자옥을 일으킨 이후의 일이다.

한나라는 그러나 패도적이었다.

마찬가지로 한나라는 개방적이었다. 장안성안에는 세계각국의 상인과 사신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궁 별관의 곁에는 포도와 목숙(거여목)이 심어져 있었다. 눈이 깊고 수염이 많은 외국인이 장안의 길거리에서 흥정을 했고, 여성우선의 습속을 견지했다. 황상을 이들을 보고 즐거워했다.

한무제는 화지위뢰(畵地爲牢)하는 사람이 아니다. 동중서의 한마디 건의로 유교에 귀의하고, 나머지는 모두 문을 닫아걸지 않았다.

사실상, 한무제는 진정으로 유학에 심취하지도 않았다. 그가 좋아한 것은 동중서와 같은 '순유'(純儒, 기실 동중서도 순수한 유학자는 아니다)가 아니라, 공손홍과 같은 '잡유(雜儒)였다. 그리고 장탕과 같이 유학으로 겉을 포장할 줄 아는 관리였다. 유가와 법가를 섞고, 왕도와 패도를 섞는 것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다.

그렇다면 한무제는 화근을 남기지 않았는가?

남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