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중천(易中天)
한무제는 하나의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
이것은 천추만대에 영향을 끼친 중대사이다. 이때부터, 중화제국은 국가의식형태가 생기고, 변함없는 핵심가치가 생기게 된다. 제국은 하나의 제도로서 이천여년간 안정적으로 연속될 수 있었다.
당연히 진나라제도와 진나라정치는 이로써 한나라제도와 한나라정치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무제의 조상은 모두 유가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방은 유생을 만나기만 하면 참지 못하고 그들의 모자를 벗겨서 오줌을 누곤 했다. 한무제는 유가를 존중하는데, 설마 돌아가신 조상의 영에 미움을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단 말인가?
더욱 골치아픈 것은 두태후였다. 두태후는 한경제의 모친으로, 한무제의 조모이다. 이 할머니가 좋아한 것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경제와 두씨집안 사람들은 "부득이 노자의 책을 읽고, 그 술(術)을 받들었다."
그 결과, 풍파가 일어난다.
하루는, 두태후가 원고(轅固)라는 유생을 부른다. 그로 하여금 자신에게 <노자>를 강독해달라고 한다. 원고는 입을 삐죽이며 말한다: 그것은 가노(家奴)의 책입니다.
두태후는 화를 벌컥 내면서, 원고를 멧돼지우리에 쳐넣어, 멧돼지에게 옥리와 죄수의 책을 배우도록 명한다. 한경제는 어쩔 수 없어, 몰래 원고에게 날카로운 칼을 한 자루 넣어주어, 그 유생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태황태후의 의견이 이러한데 유학을 받드는 것이 쉽겠는가?
한무제는 사실상 유가였던 적은 없다. 더더구나 순수한 유학파도 아니다. 그는 무술(巫術)을 믿었고, 혹리(酷吏)를 중용했는데, 이것은 모두 유가가 찬성하는 일이 아니다. 그가 대거 유생을 모집할 때, 대신 급암(汲黯)이 면전에서 직언했다: 폐하의 내심세계는 욕망으로 충만한데, 굳이 인의를 얘기하는 척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두태후도 진정한 도가나 순수한 도가는 아니었다. 그녀는 여후 이래로 제국의 통치자였으며, 황노(黃老)의 학문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형명(刑名)을 중시했다. 형은 형률(刑律)이다. 명은 명교(名敎)이다. 형률은 법가의 것이며, 명교는 유가의 주장이다. 소위 '황노형명'이라는 것은 먼저 유가의 순자학파의 주장에 따라 군신간의 명분을 확립하고, 그 후에 법가의 주장에 따라 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청정무위(淸靜無爲)하고, 황제처럼 수공이치(垂拱而治)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한나라초기의 통치계급의 사상은 여러 학파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태후와 같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로 노자가 주장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이 아니다. 더더구나 장자가 주장하는 무정부주의도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봉건제가 맞고, 군현제는 거꾸로 틀린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안되는 일이다.
가능한 것은 무위이치(無爲而治), 여민휴식(與民休息)이다.
휴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칠년간의 초한전쟁으로 온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었다. 성은 허물어지고, 논밭은 황폐해졌으며, 인구는 격감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호구가 남은 것은 열에 두셋이다. 황제가 타는 전용마차마저도, 4필의 같은 색깔의 말을 구하기 어려웠다. 장상(將相)들은 겨우 우차(牛車)를 타아 했다.
그래서, 고조, 혜제, 문제, 경제의 4황제때 모두 근검절약하고, 청정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한무제가 즉위할 때는 국고에 이미 양식과 돈이 충분히 쌓이게 된다. 전답에는 소와 말이 가득했고, 백성들도 인구가 늘었다. 상류사회는 더더욱 암말밖에 탈 것이 없으면 창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왜 개현경장(改弦更長)하려는 것인가?
왜냐하면 제국중앙의 청정무위는 확실히 하층민중들에게 좋은 점이 있었고, 중층의 호족들에게도 이로운 점이 있었다. 특히 병력을 가지고 한 지방에 할거하는 제후왕들에게는 좋았다. 언론자유를 얻은 모신책사들, 인신자유를 얻은 망명객들은 각 왕국으로 흘러들어가서 혀를 놀리며 흥풍작랑(興風作浪)하게 된다.
이것을 제국이 어찌 용인하겠는가?
사실상 한무제 민 그 신료들이 먼저 타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신(신불해), 상(상앙), 한비자, 소진, 장의의 말로써 국정을 어지럽히는 자들이었다. 앞의 세 사람은 법가이고, 뒤의 두 사람은 종횡가이다.
확실히 파출백가라고는 해도 도가는 파출하지 않았다. 기실 법가까지도, 여전히 제국의 집권당이었다. 단지, 법가의 사상무기는 통치자의 수중에 쥐어져 있을 뿐이고, 민간에서 중앙에 대항하는데 쓸 수 없게 된 것일 뿐이다.
보기에, 파출백가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한무제는 제자백가를 모조리 몰아낸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사람을 시켜서 민간의 장서를 불태우지도 않았다. 진정 없애버린 것은 정권에 위해를 주는 종횡가였다.
이것은 당연히 두태후도 동의한 것이다. 하물며 그녀는 청정을 좋아하는데, 종횡가가 일을 만들어내는 것에 찬동했겠는가?
그렇다면, 독존유술은 진짜일까?
그렇다. 그러나, 독존은 독존(獨存)이 아니다. 즉, 유학만이 관학(官學)으로 확립되고, 의문의 여지없는 지존의 지위를 차지하며, 사상문화분야의 큰형님이 되었으며, 제자백가는 유학과 평기평좌(平起平坐) 즉 맞먹을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왜 일가를 독존시켰는가?
왜냐하면 통일제국에는 통일사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시황이 이미 의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의 분서, 한무제의 존유의 동기와 주장은 모두 같다. 천하대란은 사상자유, 언론불일치로 인한 것이다. 법령을 어렵사리 통일시켰는데, 어찌 다시 중설분운(衆說紛紜)하게 놔둘 수 있겠는가?
천하통일을 하게 되면 백가쟁명하게 놔둘 수는 없다.
이 점은 진시황과 한무제가 같은 의견이었다. 단지, 진시황은 대상을 잘못 선택하고(법가를 선택함), 보좌해줄 사람을 잘못 골랐고(以吏爲師), 수단을 잘못 선택했다(분서갱유). 한무제는 길을 제대로 찾은 것이다.
유학은 왜 적합한 통치사상일까?
왜냐하면, 유학은 군주제도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법가가 옹호하는 것은 도리를 따지지 않는 것이고 그 수단도 절대적 권위, 음모궤계 및 엄한 혹형일 뿐이다(법가에서는 이를 勢, 術, 法이라 부른다). 그래서, 법가의 도는 패도(覇道)이다. 법가의 정치는 가정(苛政)이고, 법가의 제도는 전제(專制)이며, 법가의 통치는 형치(刑治)이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2세만에 망하게 된다.
유가는 다르다. 도는 왕도(王道)이고, 정치는 인정(仁政)이며, 제도는 예제(禮制)이고, 통치는 덕치(德治)이다. 즉, 유가는 군주제도를 옹호하면서 도리를 내세우고 인정미가 있다. 이러한 통치는 인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인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정권은 공고해진다. 군주와 인민이 모두 만족하는 것이 윈윈이다.
하물며 유가학설은 깊은 뿌리가 있다. 이는 바로 소농경제(小農經濟), 종법사회와 예악전통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자면, 유학이 국가의식상태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고 대체불가능해 보인다. 또한 유학이 지고무상을 지위를 얻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뿌리내린 후, 제국시대의 핵심가치도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삼강오륜이다.
이 일의 의미도 아주 심원하다. 문제는 유가학설과 제국제도는 원래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원시유가 특히 공자는 봉건제를 주장했지만, 제국의 제도는 군현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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