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홍빈(侯虹斌)
"만일 아교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황금으로 집을 만들어 살게 하겠습니다." 이 귀에 익숙한 '금옥장교(金屋藏嬌)'의 이야기는 야사 <한무고사>에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의 뒷면에는 소리장도(笑裏藏刀)의 탈적(奪嫡)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아마도 영화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관도공주(館都公主)가 한무제를 황제에 오르도록 밀어주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겉으로 내세운 말이다. 유일하게 결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경제(漢景帝) 본인이다. 한경제는 '문경지치'의 중요한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비록 여러가지 문제가 있기는 해도, 그의 권위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조정을 확실히 장악하여 아무도 뒤흔들 수 없을 정도였다. 어찌 후계자라는 이런 중요한 문제를 놓칠 리 있겠는가?
여기에서는 한경제의 장안법(障眼法, 눈을 가리는 법술)을 얘기하기로 하자. 다른 사람이 욕을 먹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대단한 어인술(馭人術, 사람다루는 기술)이다. 관리자는 시시때때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반드시 어떤 사람의 이익을 희생시켜야 할 때가 있다; 민의가 흉흉할 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은 가장 좋은 금선탈각(金蟬脫殼, 매미가 껍질은 벗다)의 계책이다.
이렇게 욕을 먹는 사람이 바로 한경제의 동모누나인 관도공주이다.
당연히 관도도 억울할 것은 없다. 그녀에게는 진아교라는 딸이 있었다. 아교가 아직 어렸을 때, 그녀는 아교를 당시의 태자인 유영(劉榮)에게 시집보내어 딸을 황후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태자의 모친인 율희(栗姬)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초방(椒房)내에 거주하여 아직 황후에 봉해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황후와 비슷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율희는 관도공주를 싫어해서 거절해버린다. 그러자 관도공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그녀는 동생의 열번째 아들인 유철(劉徹)이 아주 총명하고 영리할 뿐아니라, 한경제가 좋아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의 모친인 왕부인은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특히 겸손해서 호감을 갖게 된다. 관도공주는 7살된 유철에게 '부인을 맞고 싶으냐?'고 물어본다. 유철은 귀엽게도 그러고 싶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맞이하고 싶으냐고 물으면서, 관도공주는 여러 어린 궁녀들을 가리키지만, 유철은 모두 싫다고 한다. 손가락이 사촌누나인 아교를 향했을 때, 어린 유철은 큰 소리로 말한다: "만일 아교를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다면, 황금으로 집을 만들어 살게 하겠습니다." 관도공주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를 정도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왕부인과 유철과 사돈이 되기로 결심하고, 또한 태자 유쳥을 폐위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관도공주는 계속 한경제와 두태후의 앞에서 율희와 태자 유영에 대하여 좋지 않은 말을 하고, 왕부인과 유철에 대하여는 좋은 말을 한다. 얼마 후, 한경제는 과연 아무런 잘못이 없는 유영을 폐위시키고, 원래 아무런 희망도 없던 열째 아들 유철을 태자로 앉힌다.
그러나, 단지 야사에 나오는 이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안에는 민간에서의 상상부분이 많아서 논리적인 헛점이 있다. 왜냐하면 한경제는 원래 강경하고 성격이 잔인한 사람이며, 아주 총명하다. 관도공주가 후계자 선정같은 중요한 일에 끼어들게 했을 리가 없다. 진실한 상황은 한경제가 그냥 마침 마련해준 사다리를 올라가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자신은 책잡힐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첫째, 한경제는 이미 오만한 율희를 오래 전부터 못마땅해 했다. 그가 그녀를 포기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그가 한번은 율희에게 시험삼아 후사를 부탁해 본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그의 여러 자녀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율희는 질투를 드러내며 좋지 않은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는 율희가 일단 태후에 오르면 여러 자녀들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걱정하게 된다.
둘째, 한경제는 성격이 연약한 태자 유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유영이 무고하게 피살되었을 때도 그는 별로 안타까워 하지 않고, 오히려 유영을 해친 질도(郅都)를 급히 보호해준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어떻게 이 태자를 폐위시킬 것인가? 마침 관도공주가 계속하여 두태후의 앞에서 바람을 넣었고, 한경제가 '태후의 반대'에 부닥칠 수 있는 장애를 해결해 주었다. 이는 실로 하늘이 도운 격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셋째, 관도공주가 그렇게 많은 황자들 중에서 하필 아교보다 5살이나 어린 유철을 마음에 둔 것은 우선 유철이 당시 이미 두각을 나타내어 한경제가 그를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왕부인이 착실하고 조용해서 한경제가 안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이치로 보자면, 유철은 열째 아들이어서 태자에 오르기는 어려웠다. 한경제도 이것때문에 고뇌한 것이다. 결국 그는 좋아하지 않는 왕부인을 황후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유철이 순리에 따라 태자에 오르게 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절대 누나가 곁에서 거들어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일시적인 충동으로 한 일이 아니라, 그가 심사숙고한 결과이다.
역대왕조에서 태자를 교체하는 것은 모두 시끄럽게 이루어졌다. 조정의 상하가 혼란에 빠지고, 심지어 살육과 피바람이 몰아치기도 했다. 오로지 한경제가 태자를 바꾸었을 때는 가볍고 교묘하며 아무런 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세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주로 관도공주가 중간에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너, 누가 알았으랴. 그녀는 그저 옆에서 북이나 치고 장구나 치는 역할이고, 진정한 막후의 조종자는 한경제 본인이었다는 것을.
기실, 관도공주의 누린 지위는 두태후가 뒤에서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두태후가 죽은 후, 관도공주가 비록 황후의 모친이라 해도 한무제는 그녀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이때의 한무제는 관도공주를 자신에게 황제에 오르게 해준 은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떤 때는 인정해야 할 때가 있다. 궁정투쟁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에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마도 결과는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너의 모든 노력은 그저 제왕의 바둑판 내에서 돌 하나가 기를 쓰고 움직이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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