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후굉(易厚宏)
많은 사람들이 천지회를 알게 된 것은 모두 김용 선생의 <녹정기>를 통해서일 것이다. <녹정기>에는 천지회가 하늘을 아비로 땅을 어미로 모셨다는데서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고, 천지회의 총타주는 진근남(陳近南)이라고 하였다. 진실한 역사에서 천지회는 확실히 존재했으며, 홍문(洪門)이라고도 부르고, 홍방(洪幇)이라고도 불렀다. 최초에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해서 성립되었으며, 청나라말기의 상해의 청방(靑幇)은 바로 천지회가 변신한 것이다. 거기에는 두월생(杜月笙), 장개석(蔣介石), 황금영(黃金榮)등 중화민국시대의 유명인사들이 청방의 문하에 있었다. 오늘날에도 세계각지에 홍방이 남긴 잔여세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지회는 도대체 처음에 누가 창건한 것일까?
홍문비적(洪門秘籍)에는 천지회의 기원문제에 관하여 소림사승려의 서로정벌에 관한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황당무계하다. 대체로 이러하다: 강희연간에 서로번(西魯番)이 중원을 침략한다. 청나라조정의 문무대신들은 모두 적을 퇴치할 계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방문을 붙여서 전국의 영웅호걸을 모아서 서로를 정벌하려 한다. 방문이 복건성에까지 내려왔고, 소림사의 승려 128명이 밤을 새워 경성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서정정벌에 참여하겠다고 나선다. 그들은 신장 "육정육갑(六丁六甲)"의 도움하에 일거에 서로를 격패시키고 경성으로 개선한다. 강희제는 그들에게 상을 내리려 하였으나, 여러 승려들은 사절하고 여전히 소림사로 돌아가서 수행을 한다. 갑인년, 어떤 사람이 여러 승려들이 서로를 정벌할 때 적국과 내통하여 나라를 배신했다고 모함한다. 강희제는 진위를 제대로 심리하지 않고, 병력을 보내어 향을 올린다는 명목으로 소림사로 가게 하여, 절을 불태워 버린다. 여러 승려들은 대부분 참혹하게 죽고 겨우 18명이 신장에게 구해진다.
도망하는 도중에 다시 13명이 청나라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5명이 광동 혜주까지 도망쳐간다. 거기서 만운룡(萬雲龍)과 유주(幼主) 주홍죽(朱洪竹), 군사(軍師) 진근남을 만나고, 칠월 이십오일 축시에 같이 결의형제를 맺고 만운룡이 큰형이 된다. 이것이 천지회의 기원이다. 그래서, 홍문 천지회는 만운룡을 시조로 모신다. 그렇다면, 만운룡은 어떤 사람인가? 홍문비적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운룡은 단지 법호(法號) 혹은 도호(道號)이고 본명이 아니다. 본명은 홍문비적의 서로 다른 초본에서 서로 다르게 쓰여 있다. 소일산(蕭一山)이 수집한 <근대비밀사회사료>의 <서로서>에는 "집에 있을 때 그는 달종(達宗)이라 불리웠고, 출가한 후에 법명은 화만(和滿)이다" 나이강 선생이 수집한 <천지회문헌록>에서, <귀현수지국발견의천지회문건>에는 만운룡이 "호는 자광(慈光)이고 자는 달종공(達宗公)이다"라고 적었다.
중국제일역사당안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요대고(姚大羔)가 쓴 <회부(會簿)>에는 만운룡을 "사존만제기(師尊萬提起), 법호왈운룡(法號曰雲龍)"이라고 하였다. 광서 전림현에서 발견된 홍문비적 양씨초본에서는 만운룡에 대하여 "성은 만(萬)이고 이름은 제희(提喜)이다." "도호(道號)는 운룡(雲龍)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상의 4건의 홍문비적초본에서, 어느 것이 더 믿을만할까? 역사연구의 일반원칙에 따르면, 비교적 이른 초본이 더욱 믿을만하다. 위의 4종의 초본중에서 <근대비밀사회사료>의 홍문비족초본은 소일산에 따르면, "만청월인수초(晩淸粤人手抄)"라고 하였고, <천지회문헌록>의 <귀현수지국발견의천지회문건>은 나이강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함풍초기 진개솔 부대가 귀현을 점령할 때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당안의 요대고 초본은 청나라관리가 가경6년(1811년)에 찾아낸 것이고, 그것이 전해진 시기는 가경16년보다 이를 것이다. 홍문비적 양씨초본은 도광8년(1828년)에 초록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필자는 위의 4가지 홍문비적초본중에서 만운룡 본명에 관한 것은 요대고와 양씨초본이 비교적 믿을만하다고 본다. 요대고는 만운룡의 본명을 "만제기"라고 하였는데, 필자는 이렇게 추측한 바 있다. "만제기"는 "만제희"를 오기한 것이 아닌가. 1985년 광서 전림현 양씨초본이 발견된 후, 필자의 추측은 확인되었다. 만운룡의 본명은 과연 만제희였다. 관서, 당안에서 천지회에 관련된 내용을 보면, 당안은 주로 <궁중당>(즉, <주비주절>)과 <군기처록부주절>(즉, 전자의 부본), 및 <외기부>등 당안유형이 있다. 관서는 주로 <청고종실록>, <흠정평정대만기략>등이 있다. 이들 사료에서 천지회의 기원에 대한 기록은 주로 건륭51년(1786년) 대만 임상문(林爽文)의 의거가 일어난 후, 청나라조정은 천지회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각성(복건, 양광, 운귀, 사천)의 지방관리들이 그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관서는 당안원본을 모은 것으로 약간 삭제하거나 수정한 것이 있으니, 내용은 대체로 일치한다.
건륭52년 정월, 임상문의거군의 부원수 양영(楊詠) 즉 양진국(楊振國)은 이렇게 진술한다: "엄연(嚴煙)이 천지회의 근원에 대하여 말한 것을 들었는데, 광동에 홍(洪)씨성의 화상(和尙)이 있는데, 홍이방(洪二房)이라고 부른다. 그가 주(朱)씨성이 사람과 함께 만든 것이다. 홍이방화상은 후계(後溪) 봉화정(鳳花亭)에 거주하는데, 어느 부 어느 현의 어느 곳인지는 모른다. 그 주씨성의 사람은 겨우 15,6세로 이름이 뭔지는 모른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양진국의 진술내용은 와전된 부분이 있으므로 아주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후에 양진국이 언급한 엄연이 체포된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이 천지회는 듣기로 주(朱)씨성, 이(李)씨성이 같이 만든 것이고, 사천에서 전래되었다고 하며 이미 역사는 오래 되었다. 마구룡(馬九龍)이 화상 48명을 모아서 구견음병법술을 하면서 각각 나누어 포교했다. 나중에 48명이 죽어서 13명만이 4곳에서 회를 만든다. 그중 광동에서 천지회를 만든 사람이 만화상(萬和尙)으로 속명은 도희(塗喜)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정말 알지 못한다." 이상은 <흠정평정대만기략>에 나오는 기록이다. 당안에도 엄연의 진술서가 하나 보존되어 있다. 엄연이 북경으로 압송된 후에 형부에서 진술한 것이다: "이 교가 언제 생겼는지는 제가 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진표(陳彪)가 한 말을 들으면, 이 교는 연대가 오래 되었고, 이전에 주씨성, 이씨성이 같이 만들었습니다. 주씨성은 주정원(朱鼎元)이라고 하고, 이씨성은 실로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마구룡이 화상 여러명을 모아서, 구견음병법술을 쓰며 각지에서 전파했습니다. 근년에 다시 만화상이 있는데 속명이 도희이고, 모두 전교하는 사람입니다. 진표는 일찌가 나에게 두 구절의 구어를 알려 주었습니다: "삼성결만이도홍(三姓結萬李桃紅), 구룡생천이주홍(九龍生天李朱洪)"이것이 천지회의 기원입니다.
위에 언급한 우두머리들의 진술은 비록 청정부가 천지회의 근원을 조사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이를 가지고 천지회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확정하기는 곤란하다. 건륭53년, 제희의 제자 진공(陳工)이 체포된다. 이는 청벙부가 천지회의 근원을 찾아내는데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게 해준다. <청고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도살포(圖薩布)가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천지회의 비범(匪犯), 진무(陳巫)를 붙잡았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천지회를 전한 승려 제희는 복건성 장포현 출신으로, 고계향 관음정에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청나라관리는 진공의 진술에 따라 장포현 고계향 관음정으로 가서 제희를 붙잡으려 한다. 이때는 이미 제희가 이미 죽은 후여서 겨우 그의 아들인 승려 행의(行義)를 붙잡는다. 괴륜(魁倫)의 상소에 따르면, "장포현의 보고에 따르면, 이 현의 고계라는 곳에서 승려 행의를 붙잡았는데, 그의 사부 제희는 바로 그의 부친인데, 유명(乳名)이 홍(洪)이고, 둘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홍이화상(洪二和尙)이라고 불렀다고 하면 이미 44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료에 의하더라도 여전히 천지회를 누가 창립했는지 확저하기 어렵다. 첫째, <염연공사>에서는 천지회가 사천에서 왔다고 했고, 주씨, 이씨 두 사람이 만들었다고 했다. 만화상 도희는 그저 광동에서 천지회를 만든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씨, 이씨와 만화상 도희간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둘째, 만화상 도희와 행의의 부친인 제희는 동일인물일까? 셋째, 엄연이 말하는 천지회의 근원이라는 "삼성결만이도홍, 구룡생천이주홍"이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986년, 필자는 중국제일역사당안관의 <외기부>에서 민절총독 오랍납(伍拉納)과 복건순무 서사증(徐嗣曾)이 제희의 아들 행의, 적전제자 진표를 심문한 주절(奏折)을 찾아냈고, 마침내 위의 의문에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랍납의 주절에는 명확히 적고 있다. "천지회를 조사해보니 제희에게서 시작합니다. 이 범인은 속명이 정개(鄭開)이고, 승명은 제희(提喜)이며, 일명 도희(塗喜)라고 합니다. 또 홍이화상(洪二和尙)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도 있다. "만화상이 바로 홍이화상입니다." 이렇게 하면 만화상 도희가 바로 홍이화상 제희가 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홍문비적에서 말하는 만제희 만운룡인 것이다. 오랍납은 또 이렇게 적었다: 진표가 엄연에게 전한 그 싯수는 제희가 구전으로 알려준 것이라고 하였고, 자신이 아는 것은 결만이 만화상 즉 홍이화상과 결의를 맺는다는 것이라는 것만 안다고 했다. 장포의 사투리에 따르면 '만'과 '홍'은 발음이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주, 이, 도중에는 이소민(李少敏) 한 사람만을 보았고, 주정원(朱鼎元), 도원(桃元) 및 마구룡(馬九龍)화상은 제희가 전법때 그저 그들은 모두 다른 성에서 법술(法術)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말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엄연공사>에서 언급한 이, 주, 홍등은 모두 일찌기 제희와 결의형제를 맺은 바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삼성결만이도홍, 구룡생천이주홍"이라는 천지회의 '근원'을 암시하는 싯구를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해석이 필요한 것은 진표, 행의가 진술한 장포의 사투리로 '홍'과 '만'이 같은 발음이라는 설이다. 필자가 현지에서 확인해보니 그 곳의 방언에서 '홍'과 '만'은 발음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것이 우리의 '근유시(根由詩)'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엄연공사>와 결합해서 보면 알 수 있다. 싯구의 전반부의 '도리홍'은 만제희가 마구룡, 주정원과 결의형제를 맺은 것이 이화 도화가 붉게 핀 계절이라는 것이다. 후반구는 마구룡이 사망할 때, 천지회는 홍이화상, 이소민과 주정원이 우두머리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관서, 당안과 합쳐서 보면, 천지회가 복건, 장포 고계(지금의 운소에 속함)의 승려 제희 즉 홍이화상 정개가 창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지회는 홍이화상이 건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근남은 역사상 비록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창립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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