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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고대의 피임

by 중은우시 2015. 6. 16.

글: 간역사(看歷史)


피임원리는 현재보면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다. 정자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게 하면 된다. 회임이 되려면, 천문학적 숫자의 정자가 죽어라 경쟁해야 하고, 그것은 완전히 복권에 맞는 정도의 확률이다. 모든 피임방법은 정자가 난자와 만나지 못하게 하는데 있고, 난자에게 수정기회를 주지 않는데 있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이런 명확한 개념이 없었다. 여성생식기관의 생리기능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꺼번에 난자와 모든 자궁, 음도의 분비물과 액체를 음기라고 불렀다. 나아가 잘못 인식했다. 남자의 정자는 수량이 유한하지만, 여자는음기를 취해도 끝이 없는 용기라고 여겼다. 임신은 양기가 음기로 들어간 정혈지물(精血之物)이라고 생각했다. 피임을 하려면 반드시 이 정혈지물의 형성을 파괴해야 했다. 고대중국의 피임이론은 대다수 이런 인식에 기초했다.


고대중국의 인구는 기원전에 천만단위를 넘어섰고, 19세기중기에는 4억여로 증가한다. 광활한 토지면적과 비교하면 그다지 인구압력이 크지는 않은 편이었다. 그러므로, 피임은 고대중국에서 보편적인 필요가 없었다. 첫째는 일부 특수집단에서 전해지다가 나중에 점점 보통사람들이 이용하게 된다.


가장 먼저 이를 사용한 것은 청루의 여자들이다. 왕서노의 <중국창기사>를 보면, 은상때 이미 근대창기의 소위 "재(才)", "정(情)", "색(色)", "예(藝)"를 갖춘 무창(巫娼)이 존재했다.


<상서.이훈>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탕제관형(湯制官刑), 경어유위(儆於有位), 왈감유항무어궁(曰敢恒舞於宮), 감가어실(酣歌於室), 시위무풍(時謂巫風). 감유순어색화(敢有殉於色貨), 항어유전(恒於遊畋).......유자삼풍십건(唯玆三風十愆), 경사유일어신(卿士有一於身), 가필상(家必喪); 방군유일어신(邦君有一於身), 국필망(國必亡). 신하불광(臣下不匡), 기형묵(其刑墨)". '항무감가, 순어색화' 이를 보면 당시 무창업이 아주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회의 기풍을 이루어 이미 '무풍(巫風)'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대부중 거기에 빠진 자들이 절대로 소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상탕은 '관형'을 제정하여 무창과 놀아나는 백관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공어미남(工於媚男)"(남자를 홀리는데 뛰어나다)는 무창이 성행하면 반드시 피임문제가 따라오게 된다. 그녀들은 스스로 깨닫든지 아니면 무의식중에서든지 피임의 조치를 찾아내게 된다. 고대에 무(巫)와 의(醫)는 왕왕 신분이 섞여 있었다. 일부 경험적인 피임방법은 의서(醫書)에 쓰여져서 후세에 전해지게 된다. 사실상 적지 않은 과거의 의서에는 이런 류의 기록이 남아 있다. 최초의 피임방법은 아마도 초기의 무창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남존여비의 고대에, 생리상식도 결핍되어 있다보니, 생육을 부녀의 기본능력이라고 보고, 남성과는 관계가 크지 않다고 보았다. 각종 피임조치도 주로 여성에 대하여 이루어진다. 의서에서 남성과 관련된 피임방법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고대에 방중술에 관한 책에서는 은연중에 언급되고 있다.


방중술의 출현은 무(巫)와 도가(道家)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상적인 남환여애(男歡女愛)는 우선 종족번식을 위한 것이다. 이는 천지음양의 도리에 맞는다. 또한 조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남자측은 채음보양을 하고 여성측은 음기를 격발시켜 신체가 강건하게 된다.


돈황의 책가운데 백행간이 쓴 <천지음양교환대악부>라는 것이 있는데, 남자와 희첩간의 교합을 묘사할 때 이렇게 말한다: "회정금액(回精禁液), 흡기열진(吸氣咽津). 시학도지전성(是學道之全性), 도보수지연신(圖保壽之延伸)" 이는 희첩과 교합하는 주요목적은 남자의 성능력을 강화시키는데 있고, 그가 정실부인과의 사이에 건강한 아이를 낳는데 있다고 하였다. 고라패(高羅佩)는 이것이 중국고대의 우생사상이라고 말한다. 손사막은 <천금요방>에서 상세하게 '회정술'을 논했다: "범욕시사자(犯欲施瀉者), 당폐구장목(當閉口張目), 폐기악고(閉氣握固), 양수좌우상하(兩手左右上下), 축비취기(縮鼻取氣), 우축하부(又縮下部), 급흡복(及吸腹), 소언척려(小偃脊膂), 급이좌수중양지(急以左手中兩指), 억병예혈(抑屛翳穴), 장토기(長吐氣), 병탁치천편(幷琢齒千遍). 칙정상보뇌(則精上補腦), 사인장생(使人長生). 약정망출(若精妄出), 칙손신야(則損身也)"


이런 류의 음양교합의 실효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지금도 아마 하늘이나 땅이나 알 것이다. 그러나, '후궁삼천'을 거느린 역대의 제왕들중 장수자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이런 것은 탁상공론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고대의 의서에 기록된 피임방법은 거의 모두 여성에 대한 것이다. "단산(斷産)"이라고 불렀다. 현재 알려진 것은 대체로 약물, 침구, 안마, 금기등의 피임법이 있다. 피임의 수요는 점점 청루, 궁정에서 혼인외성행위의 보통여성에게로 퍼져간다. 심지어 명청시기에는 일부 정상혼인관계의 여성에게도 이런 원망이 생긴다. 사회와 경제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으면 의서에서 직접 답안을 찾았다. 가장 많은 보통여성은 주로 모녀, 자매, 친구, 길거리, 특히 여승, 도고(道姑), 괘고(卦姑)와 아파(牙婆), 매파(媒婆), 사파(師婆), 건파(虔婆), 약파(藥婆), 온파(穩婆)등 소위 삼고육파로부터 피임지식과 약물치료를 구했다. 전자라 하더라도 약물의 통로는 삼고육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1. 약물피임


약물로 피임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가장 간단하고 가장 널리 응용되었으며, 종류도 가장 복잡했다. 중의이론에서는 불임의 원인을 자궁이 한랭(寒冷), 담습(痰濕)하여 포궁(胞宮)을 막거나, 자궁내에 치병지사(致病之邪)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약물을 먹기만 하면 피임에 성공할 수 있다. 전통적인 피임방법은 약을 쓰는 시간이 일반적으로 월경 혹은 생산후이다.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마도 배란을 억제함으로써 불임을 만드는 것일 것이다.


귀유광의 <진천선생집.선비사략>에는 이런 기술이 있다: 그의 모친은 결혼후 매년 자식을 낳았고, 스스로 "자식을 많이 낳아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배수성이라진(以杯水盛二螺進)하며 말했다. "이것은 먹은 후에는 임신하지 않을 것이다" 귀유광의 모친은 한번에 다 마셨고, 벙어리가 된다. 1년여후에는 세상을 떠난다. 나이 겨우 25살이었다. 확실히 자식을 낳지는 않았다. 그러나 약을 먹은 후의 시간은 1년여에 불과하여 그리 길지 않다. 피임효과가 어떠했는지는 분명치않다. 그러나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부작용이 아주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청피녹문선생석서년보>에 다르면, 피석서이 모친도 약을 먹은 후 피임은 되지 않고, 신체건강만 잃어서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2. 침구피임


<침구갑을경>, <천금요방>에서는 석문혈에 침구를 하면 부녀가 생육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송나라때의 <침구자생경>에는 다시 <천금방>, <천금익방>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부인이 단산을 원하면, 복사뼈의 위 1촌 2장을 뜸뜨면, 단산할 수 있다." 그리고 석문(石門)과 관원(關元)이라는 가까운 두 혈을 대비한다: "석문은 뜸을 뜨면 안된다. 침을 쓰면 자식을 낳지 못한다...음교에 뜸을 많이 하면 임신을 막는다. 다시 석문, 관원은 서로 1촌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관원에 침을 놓으면 부인이 자식을 낳을 수 없다. 석문에 침을 놓으면 평생 자손을 두지 못한다. 그 도리는 유은(幽隱)하니 어찌 가벼이 모욕할 수 있을 것인가." 혈도에 침구를 놓을 때는 반드시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산동의 두 연구자는 1969년 5월에서 1970년 5월까지, 277건의 스스로 침구피임을 요구한 생육적령기의 여성에게 침구피임을 실시하여 효과를 관찰했다. 그들의 실험에 따르면, 서로 다른 혈위에 서로 다른 자극방식, 서로 다른 자극강도, 서로 다른 깊이로 했지만, 모두 피임과 단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3. 안마피임


안마피임의 전형적인 방법은 <청조야사대관.청궁유문>에 기록된 후고혈도를 가볍게 안마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자를 몰아낸다. 청황제가 밤에 황후의 거처에서 자면 경사방태감은 정확한 연월일을 기록하여 황후가 얻은 것이 용종인지 확인한다. 비빈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르다. 전술한 방중술의 관념과 비슷한 것이 있다. 어느 정도 그 영향을 받은 소치일 것이다. 황제가 저녁을 먹을 때, 경사방태감은 비의 이름을 적은 녹두패를 올린다. 일단 밤에 비를 품기로 하면, 황제는 명패를 뒤집는다. 그러면 경사방태감이 물러나서 명패를 비를 업어 오는 태감에게 건넨다.


당시에 황제는 먼저 침상위에서 누워서, 다리를 이불 밖으로 내놓고 기다린다. 비를 등에 업은 태감이 비의 의복을 벗기고 큰옷으로 맨몸의 그녀를 싸서, 등에 업고 황제의 침상앞으로 간다. 경사방총감(敬事房總監)과 타비태감(駝妃太監)은 창밖에 서서 기다린다. 만일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황제가 그만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총관은 반드시 소리높에 외친다: "때가 되었습니다." 황제가 그래도 대답하지 않으면, 다시 소리친다. 이렇게 세번을 반복한다.


황제의 지시를 받으면 등에 업는 태감은 다시 비를 이불 속에서 끌어내어 잘 싼다음 업고 돌아간다. 그 후에 총관은 방으로 들어가 명을 기다린다: "남길까요 말까요" 황제가 "남겨라"고 말하면, 붓을 들어 기록한다. "모월모일모시 황제가 어느 비를 행(幸)하다" '남기지 말라"고 하면 총관은 바로 비의 후고혈(後股穴)을 가볍게 안마하여 정자를 몰아낸다. 이것은 순치제가 전왕조인 명나라황궁에서 행한 제도이다. '자손의 음탕한 행실'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런 잔인한 피임방법은 비에게 심각한 심리적 상처를 안긴다. 들리는 바로는, 만일 긴급한 피임이 성공하지 못하여, 비가 임신하면, 기록이 없으므로 뱃속의 아이를 처리해버린다.


4. 금기피임


<부인대전양방> 권9 <구사문.저상서구남론제이>에 이전 사람들이 논의한 것을 모아서, "교회금기(交會禁忌)", "남자수태시일법"을 내놓는다. 정확한 날짜에 임신하면 자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거꾸로 하면 피임의 효과를 본다는 것이다. 남송 주수충은 <양생류찬>권하에서 금기를 상세하게 적었다. 금기는 거의 모든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이,삼일, 오일, 구일, 이십일, 이는 생일(生日)이다. 교회하면 사람에게 질병이 없다." 1개월중 단지 5일만이 남녀간의 교합에 적합하다. 만일 다시 기타 금기상황을 고려하면, 부부간에 적합한 교합일자는 거의 없어진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느냐고 하면, 이런 금기에는 기본적으로 과학적 근거가 없다. 주로 당시 정주이학이 성행하고, 도학의 금욕주장이 유행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5. 기타 피임


고대의 어떤 사람은 육식과 파, 마늘, 부추같은 음식물이 성욕을 억제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을 먹으면 임신기회가 줄어서 피임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일부 목화를 생산하는 지역에서는 면실유를 먹으면 피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면실유는 목화씨에서 짜낸 기름이다. 경험칙에 따라, 목화씨유에 포함된 고시폴(gossypol)성분은 남자의 생육기능을 억제하는 기능이 있다. 고온강알칼리조건에서 고시폴은 분해되어 소실된다. 다만 옛날에 기름을 짜는 방법은 철저하게 제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기간 면실유를 먹으면 불임이 초래되었다.


그리고 잘못된 관념으로 우회적인 피임을 하기도 했다. 부녀는 매달 배란기내에 임신을 한다. 현대의학은 아주 명확하다. 그러나 고대의 일부 의학자들은 최고의 가임기가 월경이 끝난 후 3수일내라고 했다. 그 결과 그 말을 믿은 경건한 부부들은 기회를 오히려 잃고 만다. 자식을 얻을 수있을 때 오히려 피임을 했다. 모친의 영아포유시간을 연장하거나, 여성채내에 약물을 채워넣거나, 물고기부레로 콘돔을 만드는 방식등이 고대에도 있었다.


피임약물이 상업


늦어도 남송때에는 피임약물이 상업단계로 접어든다. <몽량록>의 기록에 따르면, 임안(지금의 항주)성에는 이미 "곽의산약포(郭醫産藥鋪)"가 있었다. 명나라때의 소설 <환희연>에는 소주에 거주하는 부잣집아들 최륭이 "자식을 낳아 기르게 되면 노는데 지장이 있을까봐 면작태(免作胎)약을 사서 의의(依依), 가아(可兒), 고낭(姑娘)의 세 사람이 모두 복용하게 했다"  이를 보면, 명청시기, 피임약물의 상업화판매가 더욱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중국고대의 피임수단은 사회의 발전에 따라, 종류와 운용집단의 범위가 점차 확장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방식과 방법의 선택은 여전히 당사자들이 처한 사회, 경제적 지위에 따라 서로 달랐다. 연구에 따르면, 비교적 높은 사회계층의 사람과 도시주민은 획득할 수 있는 정보와 서비스가 더욱 많아서, 선택범위도 더욱 넓었다. 사용을 가장 많이 하는 것은 약물, 침구, 낙태등의 방법이 있다. 낮은 계층의 사람과 농민들은 선택범위가 더욱 좁았다. 수유기를 연장하거나, 민간에서 전해지는 초약과 안마낙태등을 쓰는 것이 그들의 주요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