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효원(江曉原)
두 개의 개념" "서방"과 "천학"
여기의 '서방'이라는 것은 중국의 서쪽에 있는 광대한 지역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인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이 포함된다.
소위 "천학"이라 함은 "천문학"과 약간은 차이가 있다. 비록 "천학"이라는 단어를 고대에도 찾을 수 있고, 확실히 누군가는 사용했지만, 필자가 이 단어를 쓰는 것은 "천문학"과 구분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고대세계에, "천학은 '천상의 학문'을 말한다. 주로 성점학(星占學)을 가리킨다. 이것은 서방과 중국이 같다. 오늘날의 '천문학'과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개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성점학은 확실히 천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은 천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천문학이라고 여긴다. 다만 현대천문학은 자연을 탐색하는 것이지만, 고대의 '천학'은 정치무술(政治巫術)이다. 우리는 하나의 활동이 과학을 도구로 한다고 하여, 활동 자체가 과학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고대사회에 유일한 예외가 바로 고대 그리스 천문학일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자연을 탐색했다. 그리고 점차 발전하여 오늘날의 현대천문학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천문학을 제외하고, 고대 세계의 광대한 지역에서의 사람들이 진행한 천학 활동은 모두 현대적 의미의 천문학이 아니다.
알렉산더대왕은 비록 32살의 나이로 죽었지만, 그의 동정(東征)은 모종의 원시적 추진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나중의 소위 그리스화시대등등이다. 그의 동정도 유럽의 어떤 것들을 더욱 동쪽의 지방에 전파한 것이다. 마치 돌 하나를 물 속에 던져서 물결이 한겹 한겹 멀리 퍼져가듯이, 이런 역사파문의 전파는 아마도 수백년간 계속 되고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고대 천학에서의 중외교류는 이천년동안 계속되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에서 서방으로 전파한 것은 없단 말인가? 있긴 있다. 그러나 확실히 적다. 알렉산더의 동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전파이다. 그것이 추진한 것도 서쪽에서 동쪽으로의 운동이다. 중국에서 서방으로 전파한 것도 확실히 있다. 다만 현재 보기에, 이는 서방에서 점차 전파되어 온 운동과 서로 독립된 일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일본이 당나라때 중국의 모든 문화제도를 전면적으로 배웠고, 당나라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역법인 <선명력(宣明曆)>이 일본에서 700년이나 쓰였다. 당연히 중국도 외부에 전파했다. 다만 기본적으로 한자문화권내에서 전파한 것이다. 한반도, 유구, 일본, 월남 등등이다. 이는 머나먼 서방에서 전파되어 온 것과는 다르다.
바빌로니아 천학과 그리스 천문학의 동방에서의 종적
많은 현대인들은 고대세계에서 서로 다른 문화간의 교류는 아주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실 이런 교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았고, 더 활발했다. 비록 고대이지만 유럽에서 중국까지 걸어오는데 1,2년이 걸린다. 다만, 우리가 고대세계를 얘기할 때는, 우리가 수백년 수천년을 시간척도로 삼는다. 이런 긴 시간동안 많은 상인들이 여러번 오간다. 그외에 전쟁포로도 있고, 외교사절등등도 있다.
바빌로니아는 세계4대고대문명중 가장 이른 것이다. 그들은 상당히 발달된 천문학 도구가 있었다. 당연히 점성학에 쓰이는 것이다. 알렉산더대왕의 사후, 그의 부장은 각자 점령한 지역에 독립왕국을 세운다. 그중 셀레우코스왕조는 마침 바빌로니아 옛땅에 있었다. 현대 고고학자는 예상외로 바빌로니아 점토판도서관에 소장된 7000여개의 점토판이 천문표(天文表)라는 것을 발견한다. 3명의 예수회 신부는 필생의 정력을 쏟아서, 점토판 위의 천문표를 정리하였다. 그들을 아랍숫자로 변환시켰는데, 이들 표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인은 거의 "다각형함수"를 사용하여 일체의 천체운행의 상태를 묘사했다 예를 들어 태양의 주년운동, 행성운동 등등.
비록 시공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리고 배경도 완전히 다르지만, 기괴한 일은, 이런 방법은 6세기 중국의 역법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물거닝 도대체 어떻게 중국으로 간 것일까? 현재도 구체적인 사정은 잘 모른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이다. 다시 하나를 더 보자: 불경은 원래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로 적였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한역불경중에서, 많은 경점의 원문은 이미 실전되었다. 그래서 한역불경이 아주 진귀하다. 세계에서도 특수한 지위에 있다. 오늘날 외국의 기본서가 번역된 것과 성격이 다르다. 동한, 삼국시대부터 불경번역업무는 계혹하여 진행되었다. 한역불경에는 인도의 천학이 부대하여 전해져 온 것도 적지 않다. 만일 근원으로 소급해 가면, 인도의 천학은 그리스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대장경>의 "밀교부(密敎部)"에는 <칠요양재결(七曜攘災訣)>이라는 경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일종의 성력표(星曆表)>이다. 니담은 저작에서 <칠요양재결>을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다만 그는 천문학을 몰랐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연구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는 그가 1950년대에 제기한 것이다. 다만 30년이 지날 때까지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다. 1990년에 이르러, 나는 중국과학원 상해천문대에서 첫번째 연구생을 지도했다. 즉, 지금의 뉴위성(鈕衛星) 교수이다. 나는 그에게 <칠요양재결>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그는 많은 노력을 들여서 먼저 <칠요양재결>의 구조를 명확히 하였고, 그것이 실제로는 하나의 성력표라는 것을 발견한다. 즉, 일정한 시간동안의 태양, 달과 오대행성이 운행하는 표이다. 즉, 수학도구를 이용하여 천체운행의 규율을 묘사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이 성력표에 나오는 천문학 지식의 근원을 추적했고, 이 표에서, 그리스천문학의 영향이 명백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인도천학은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전해졌고, 그것이 전해준 것에는 서방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도천학이 당나라때 중국에 전파된 성황(盛況)
당나라는 아주 개방된 왕조이다. 정치기구에 많은 외국인들이 재직했다. 심지어 일부 외국인은 황실금위군의 장교도 지냈다. 최소한 3개의 인도가족이 당나라의 황실천학기구에서 요직을 담당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담(瞿曇)가족의 구담실달(瞿曇悉達)이다. 그는 황실 천학기구의 책임자를 맡았다. 구담실달은 인도성씨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 본인은 이미 중국화 되었고, 그들은 이미 몇대에 걸쳐 중국에 살았으며, 중국여성과 결혼하여 이미 완전한 인도혈통은 아니었지만. 구담실달은 활실천학기구에서 소장하고 있는 각종 성점학 문헌을 이용하여 <개원점경(開元占經)>을 편찬한다. 이는 중국고대 성점학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개원점경>에는 일종의 인도역법인 <구집력(九執曆)>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저 그것의 가장 중요한 매개변수와 기본원칙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 일을 둘러싸고, 당나라에서는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당나라 활싱천학기구에는 중국인 전통의 수리천문학 방법도 있고, 동시에 인도인의 방법도 있으며, 더욱 머나먼 그리스인에게서 전래되어온 방법도 있어서, 이를 가져다가 참고했다. <신당서>와 <구당서>의 <천문지>, <율력지>에는 가끔 중국방법을 기록한 곳에 작은 글자로 인도방법을 주석으로 표기한다. 인도방법으로 계산해낸 결과는 무엇인지를 기록했다. 이는 당시 중국인들도 그들의 방법을 참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방법을 대조로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때 천학기구에 서방의 천학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황은 일반인들의 층면이다. 한역불경이 가져온 여러 경전이 있다. 예를 들면 <칠요양재결>이다. "양재"는 바로 재해를 쫓아버리는 것이다. 민간의 층면에서, 사람들은 당연히 천문학도구가 어디에 좋고 어디에 좋지 않은지는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성점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수당시기에 일종의 유행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성신(星神)의 화상을 걸어서 '양재'를 했다. 일부 점성과 비슷한 활동을 통하여 성점학자는 어느 성신에게 공물을 바쳐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일반백성은 밖으로 가서 비교적 소박한 판화같은 선묘화상을 가져온다. <대장경>의 관련된 경전에는 일부 이런 화상을 수록해 놓았다. 고관대작은 당연히 대량생산한 물건을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의 유행은 저명한 화가를 모셔서 "사적으로 주문한" 성신화상을 만드는 것이다. 당시에 일부 아주 유명한 화가 예를 들어, 장승요, 위지을승등등이 있는데, 이들의 중요한 업무는 바로 고관대작을 위하여 성신화상을 그려주는 것이었다.
이런 성신화상의 원본은 중국고서적에서 현재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일본에는 약간 남아 있다. 당시 일본 및 한반도의 귀족도 중국에서 문화상품을 구하는데 열중했다. 예를 들어, 당나라 문인의 집자, 중국인의 회화, 중국인이 각인한 불경등등. 이들은 모두 일본, 한국의 귀족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현재 일본의 일부 불사와 박물관에는 적지 않은 당나라의 성신화상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일부 일본인이 모방해서 만든 것도 있다. 일본인이 남긴 성신화상에서, 그것이 더욱 머나먼 서방과 모종의 연결이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신화상은 칠요(七曜)를 여전히 그려야 한다. 즉, 태양, 달과 오대행성이다. 다만 이들 성신화상에 절대자수의 상황에서 금성(金星)의 화상은 여성이다. 이는 서방의 금성이 비너스라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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