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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우화대전투(雨花臺戰鬪): 태평군과 청군의 가장 치열한 전투

by 중은우시 2016. 6. 22.

글: 자주군(煮酒君)





1851년, 태평천국운동이 흥기하여 일시에 중국의 절반을 차지한다. 청저우의 남방 수개 성의 통치는 곤란에 빠진다. 일시에 태평군이 북상하여, 호남으로 들어가고, 호북을 빼앗고, 무창에서 장강을 내려가, 안경을 함락시키고, 남경을 점령한다. 이제 북경에 있는 함풍제가 놀라자빠질 지경이 된다.


태평군은 그 후에 북벌(北伐)과 서정(西征)을 나란히 벌여 청나라조정 내부에서는 태평군을 호랑이보듯 두려워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 않았다. 농민의 계급성이 금방 드러난다. 천경의 거대한 재물을 눈앞에 두고, 여러 왕들은 최고통치권을 쟁탈하는 내부투쟁을 벌인다. 이 사건이 바로, "천경변란(天京變亂)"이다.


이에 대하여 양계초 선생은 저작 <이홍장전>에서 이렇게 평론한 바 있다: 이때의 태평천국은 전성기에서 꺽여서 쇠퇴하고, 골짜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만일 이 때 청군이 기회를 틈타 반격했다면, 이 변란은 아마도 6,7년 일찍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청군은 태평군보다도 부패했다. 그후 쌍방은 대치단계로 접어든다. 증국번의 상군(湘軍)은 점차 태평군에 항거하는 주력으로 성장한다. 1860년 강남대영이 두번째로 함락된 후, 청정부는 증국번의 상군에 의존하는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이 때의 증국번은 거대한 임무를 눈앞에 두고, 강소, 절강 전장을 열기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강소와 절강의 경제적 위치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청군이 충분한 군수물자를 조달받고, 태평군의 식량공급을 단절시키려면 반드시 강소와 절강을 차지해야 했다. 그래서, 증국번은 이홍장과 좌종당에게 각각 회군(淮軍)과 초군(楚軍)을 이끌고 강소와 절강으로 가서 태평군을 소탕하도록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홍장의 부대인 회군이다.


회군은 상군의 모체에서 잉태된 것이다. 이홍장은 합비 고향에서 현지 민단을 거두어 무창으로 간다. 증국번이 훈련을 시킨다. 증국번은 일부 상군을 회군에 편입시킨다. 무기장비, 식량공급에서도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회군의 전투력은 신속히 상승하고, 청군내의 실력있는 부대로 성장한다.


동치원년(1862년) 이월, 회군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합쳐서 8천인마였다. 28일, 상해쪽에서 빌린 여객선이 도착한다. 이홍장은 대군을 3로로 나누어 상해로 향한다. 30일, 이홍장의 전군은 상해에 도착한다. 서양인과의 교류에서의 편의를 위하여, 이홍장은 서리강소순무에 임명된다.


이홍장이 도착한 처음에, 태평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상승군에게 송강남부의 금산위와 봉현현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한다. 회군부대는 송강동남의 남회현으로 진격한다. 상승군은 태평군을 만난 후, 현지에서 태평군의 맹공을 받는다. 중과부적이어서 처지가 아주 어려워진다. 이 때, 정학계(程學啓)가 이끄는 부대가 태평군을 공격하여 상승군을 구해낸다. 상해에서 태평군을 대파하고 남회의 수비군은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유명전(劉銘傳)은 그 후 남회를 굳게 지키며 태평군을 물리친다. 이때 정학계는 신교에 주둔하고 있었고, 태평군 주력의 공격을 받아 처지가 곤란해진다. 이때 이홍장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가서 구원해준다. 쌍방은 병력을 합쳐서 태평군을 격파한다. 이 전투에서 태평군은 깜짝 놀라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송강, 청포, 광복, 당교부근의 태평군은 차례로 철수하고 상해포위망은 풀리게 된다.


그러나, 이 때 국면은 돌연 바뀌어 청군에 불리하게 된다. 원래 이 때 증국번의 동생인 증국전이 군대를 이끌고 남경교외의 우화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남경에 거대한 위협이 된다. 다만 1862년 여름, 돌연 강남지역에 전염병이 퍼진다. 일시에 증국전의 군대내부에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이 늘어나 전투력이 대폭 약화된다. 이수성은 이를 보고, 군대를 이끌고 청군대영을 공격한다. 그리고 태평군의 또 다른 대장 이개현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증국전의 대군을 포위섬멸하도록 명령한다. 이때 증국전은 겨우 3만여명이고, 군대내에는 환자가 많았다. 그러나 태평군은 이때 성밖에 20여만 대군이 있었다. 성안에도 10여만명이 더 있었다. 그리고 장비도 양호하고 식량도 충분했다. 전쟁의 결과는 거의 결정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의문의 여지없이 이는 청군과 태평군간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


이때 증국번은 매우 초조해서 급히 각로의 상군을 모아서 구원을 보낼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이때 각지의 상군은 모두 당면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일시에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이는 당연히 미리 계획한 군사행동이었다. 이수성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청군과 혈전을 벌였다. 강남대영을 집어삼키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이때의 청군은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적개심을 품고 병구를 이끌고 태평군과 혈전을 벌인다. 쌍방은 남경 성밖에서 벌인 혈전은 근 2개월에 달했다. 가만 태평군은 이 궁지에 몰린 청군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때 이홍장과 좌종당은 차례로 구내를 이끌고 이수성 대군의 주둔지를 괴롭혔다. 이수성은 자신의 대본영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여, 십월에 황급히 철수한다. 우화대전투는 이렇게 끝이 난다.


우화대전투는 태평군 장수들이 죽는 것을 겁내고 사병들은 목숨을 아낀다는 점을 확실히 드러냈다.  근대의 한 저명한 학자는 이렇게 평론했다: "설사 이수성이 열 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때는 태평군의 이런 부패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