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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 여병(女兵): 탄생에서 소멸까지의 비장한 역사

by 중은우시 2014. 4. 4.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1856년 9월의 어느 날, 3천명의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태평군의 사병은 천왕 홍수전의 저택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군대의 지휘관은 북왕 위창휘(韋昌輝)였다. 동쪽의 하늘색이 막 밝아올 때, 위창휘는 이 3천병사들에게 대문으로 돌격하도록 명령한다. 대문이 부서지는 큰 소리가 들리면서, 팔백여명의 대도장모(大刀長矛)를 쥔 여병은 고함을 지르며 몰려 나와서 위창휘의 3천갑병과 뒤엉켜 싸웠다. 이들은 천왕부를 수비하는 광서(廣西) 부녀들이었고, 홍수전의 최초의 여신도들이며, 태평군 최초의 여병부대였다.

 

태평천국의 전성기에 정치, 군사, 종교의 여러 색채를 겸비한 천조정권은 일지기 10만여병을 거느린 적이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여성군사조직이었다. 천왕부의 문에서 몰려나와 완강하게 천왕부대문을 지킨 800여병은 홍수전의 호위부대였으며, 그중에는 홍수전의 후궁비빈과 시녀도 있었다. 1864년, 천경(天京)이 함락될 때, 이 팔백의 여병은 불굴의 의지로 용맹하게 싸우며 목숨을 던져,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한다.이렇게 무수한 전투와 도살과 상잔을 거친 후, 태평천국의 여병은 여전히 역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대에 가장 비참한 희생물이 된다.

 

태평천국 여병은 중국역사상 고증이 가능한 최초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병부대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그녀들은 또 어떻게 역사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시대의 가장 비참한 희생물이 되었을까? 이 모든 것은 홍수전의 금전기의(金田起義)부터 시작해야 한다.

 

도광30년 즉 1851년, 홍수전은 금전기의를 일으킨다. 함풍3년, 즉 1853년, 남경을 수도로 삼고 천경이라 칭한다. 국호는 태평천국이라 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한다. <천조전무제도>를 반포하고, 병력을 나누어, 서정, 북벌을 감행한다. 함풍8년, 군정실권을 장악한 동왕 양수청(楊秀淸)이 '위권핍기(威權逼己, 위세와 권력으로 자신을 핍박하다)'하자 북왕 위창휘에게 밀조(密詔)를 보내어 군대를 천경으로 되돌려와서 양수청을 주살하도록 시킨다. 그렇게 하여 무수한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홍수전은 원성이 자자하자 할 수 없이 위창휘를 제거한다. 동치2년, 즉 1863년, 천경은 청나라군대에 포위된다. 양식도 끊어지고, 지원도 막힌다. 다음 해 사월, 홍수전은 병사한다.

 

홍수전이 낙방서생으로부터 기의를 하고 태평천국의 천왕 보좌에 앉은 기복이 심한 일생을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여병의 건설을 아주 중시했다. 1843년 6월에 배상제교를 창립한 날부터, 홍수전은 "천하의 여러 남자는 모조리 형제뻘이고, 천하의 여러 여자는 모조리 자매뻘이다."라는 평등사상을 내걸고 널리 군중 특히 농촌의 빈곤한 부녀를 참가하도록 호소했다. 배상제교의 주요발원지인 광서 계평현 붕애산지구에는 일찌기 양운교(楊雲嬌)를 우두머리로 하는 많은 적극적인 부녀자가 있어, 계몽자인 풍운산(馮雲山)과 함게 나란히 활동했다. "남자는 풍운산을 배우고, 여자는 양운교를 배우자"라는 민요까지 전해진다.

 

태평천국 여병의 탄생은 1851년 1월 11일에 시작된다. 이 날, 홍수전은 서사기의(誓師起義)한다. 동시에 5조의 군기(軍紀)를 반포하는데, 그중 제2조는 "별남행여행(別南行女行)" 즉 남성집단과 여성집단을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여영(女營)을 설치한다. 이것은 태평천국 여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민요 한 수는 부녀들이 태평천국운동에 참가하는 성황을 노래한다: "자매친(姉妹親), 동개방수공구침(同個房睡共口針), 여금자수홍양거(如今姉隨洪楊去), 매야근수일로행(妹也跟隨一路行)"(언니와 동생은 친해서 같은 방에서 자고 같이 바느질을 했다. 지금 언니는 홍수전,양수청을 따라 가고, 동생도 역시 같은 길을 따라 간다."

 

기실 일찌기 1844년, 천조의 여병은 모태가 탄생한다. 당시, 홍수전,풍운산이 광서북부에서 전도를 했다. 그들은 이미 "유가의 교의와 영향이 큰 지역을 떠나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떠나고, 비옥한 농토와 권세있는 지주가 있는 곳을 떠나서" 대산심처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수천수만의 목탄노동자, 광부, 농민과 농촌부녀들이 '홍수전,풍운산'의 최초신도가 된다.

 

최초의 이들 여신도들은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을 따라 금전기의를 일으키는 때로부터 그녀들은 중국역사상 일종의 사상유례없는 특수한 신분 즉 여병이 된다. 이들 대부분은 객가출신의 여인이다. 전족을 하지 않았고 전투에서 용맹함이 남자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일찌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은 객가부녀에게 고생을 한 바 있다. 그리하여 이들 용맹한 객가부녀들을 "대각만파(大脚蠻婆, 발큰 오랑캐 여자. 발이 크다는 것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임)"라고 불렀다.

 

광서32년 즉 1906년, <조국부녀계위인전>이라는 책이 세상에 춮판된다. 거기에는 <홍선교소전(洪宣嬌小傳)>이 있다. 비록 소설적인 성분이 역사보다 많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당시 '대각만파'의 영웅스러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홍선교라는 자는 군대내에서 소왕낭(蕭王娘), 천왕자(天王姉)라고 불렀으며 서왕 소조귀의 처이다. 나이는 서른이 되지 않았으며, 예뻣으며 용맹하기 그지없었다. 여병 수백명은 모두 잘 싸웠고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소왕낭과 여병은 모두 광서 출신으로 홍수전의 가르침을 깊이 받들었고, 매번 전투때마가 먼저 천제에 절을 한다. 화장은 거의 하지 않고 출전했으며, 쌍도를 휘둘렀다. 붉은 말을 타고, 안장과 허리는 하얀 털로 둘러싸여 있었다. 큰 키에 피부는 하얐고, 옷과 치마의 사이는 푸르고 흰 색이 있었다. 바람을 맞이하며 햐안 팔을 휘두르며 여군을 지휘했고, 패옥의 소리가 났다. 바라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과 같았다. 전투가 한창일 때면, 소왕낭은 옷을 벗고 말을 몰아, 만청의 군대를 휘저었다. 옷속은 행황색의 비단으로 쌌고, 도술이 빠르며 묘했고, 옷 색깔이 신비로와서 군인들이 보고는 놀라서 바라보았다."

 

홍선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람으로 부선상(傅善祥)이라는 강남의 젊은 여자가 있다. 당시 태평군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무에는 홍선교, 문에는 부선상이 있다. 부선상은 중국고대 유일한 여장원이다. 중국역대왕조에 여자들중 글을 읽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만일 여자가 남장을 하고 과거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일단 발견되면, 기군대죄(欺君大罪)에 해당했다. 태평천국은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과거를 통해 선비를 뽑는다. 파격적으로 여자도 과거에 참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강남은 글을 읽은 여자가 특히 많았다. 일시에 천하의 재녀들이 운집한다. 응시한 사람이 200여명에 이른다. 과거시험장소는 바로 강남공원(江南貢院)이었고, 시험제목은 <유여자여소인위난양야(惟女子與小人爲難養也,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어렵다)>였다. 부선상은 선비집안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시사가부를 다 할 줄 알았다. 용모도 청순하고 귀여웠다. 그녀는 '난양'이라는 말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홍수전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부선상은 여장원이 된 후, 피홍괘채(披紅掛彩)하여 말을 타고 길거리를 지나갔다. 마음 속으로 아주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재녀의 건괵풍채를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때의 태평천국 부녀들은 외부세계에 신선한 공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일부 외국인은 그녀들이 말을 타거나 길을 걷을 때,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을 보고는 "이것은 예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현상이다. 국내의 생활환경을 생각나게 한다. 만일 이번 혁명이 지금까지 지켜오던 부녀는 규문을 나서지 않는다는 제도를 깨버린다면, 그것은 아주 축하할만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평천국의 여병부대 출현은 태평천국이 제창한 "남녀평등"의 교의와 관련이 있다. 홍수전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상제(하느님)의 자녀이다. 모두 평등하다" "천하의 많은 남자는 모두 형제뻘이고, 천하의 많은 여자는 모두 자매뻘이다. 어찌 이곳 저곳의 경계를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태평천국의 참신한 사회에 모든 것은 구생활과는 확연히 다른 즐거운 장면이 있었다. 가정에서 남자들이게 부림을 받던 부녀들이 남자와 같이 행군,전투를 하는 여병이 되었다. 그리고 일찌기 여자들을 부려먹던 가정제도는 천조의 율령으로 분쇄되었다.

 

그러나, 홍수전은 하나의 극단에서 또 하나의 극단으로 간다. 그는 태평천국에서 극력 남녀격리제도를 추진한다. 홍수전은 말했다: "남유남행(男有男行), 여유여행(女有女行), 부득혼잡(不得混雜)"(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서로 섞여서는 안된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영안성에서 홍수전은 모세의 '십계'를 모방한 천조(天條)를 발표한다. "남자와 여자가 간음하는 것은 변괴(變怪)라고 부른다. 이것은 천조를 가장 크게 어기는 것이다." "사음(邪淫)은 모조리 악의 우두머리이다. 변괴로 요(妖)가 되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이렇게 하여, 여인은 남자에게 부림받던 족쇄를 부수었지만, 더욱 엄격한 천조의 남녀분리, 청교도적인 금욕제도의 굴레에 빠진다.

 

이렇게 하여,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부녀제도를 계속 혁신한다. 태평천국의 여병집단이 갈수록 커지면서, 초기의 여영(女營)은 여관(女館)으로 된다. 천조의 여병은 신앙상의 추종자 외에도 무력으로 피정복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동시에 남녀격리의 제도는 장기간 견지해야할 기정정책이라고 하게 된다. 설사 남편이 부인을 만나고, 아들이 모친을 만나는 것도, "단지 문 앞에서 서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해야 하고, 목소리도 크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원래의 재산제도, 옛날의 가정제도, 그리고 따스함이 흐르는 인륜의 감정 이런 구사회제도를 지탱하던 것들은 모조리 냉정하고 엄격한 군사통치하에 모조리 와해된다.

 

태평천국의 집단에서, 청교도적인 금욕제도, 남여분영정책 그리고 홍수전의 '천국'설계의 모든 규칙은 면모가 혼동되고 모순된 단체에서 존재할 뿐아니라, 태평군이 지나간 도시에도 존재했다. 1852년 5월,태평군이 이강을 넘어, 고운하를 통하여 전주(全州)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장강유역에 진입한 것이다. 이 해의 6월 12일, 사의도에서 대패를 한 후, 그들은 광서를 나가서, 호남 도주를 점령한다. 호남남부에서 그들은 선후로 개략 5만명이 신병을 모집한다. 그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남녀분영제도를 실시한다. 이것은 금전, 영안의 연속이다. 1853년 1월 12일, 그들은 장강의 주요도시 무창을 점령한다.

 

태평천국이 무한삼진을 함락시킨 후, 청나라조정이 타도되고, 함풍의 연호도 태평천국의 명칭으로 대체된다. 국호의 변화와 비교하자면, 사회제도의 변화는 더욱 극렬했다. 바로 무창에서 분영, 금욕 및 가정해체는 일종의 전시정책으로 존재할 뿐아니라, 일종의 사회제도로 실시된다. 기실 여기에 그치지도 않았다. 사회생활에서 재산, 가정, 관직, 종교, 예의등 일련의 사회제도개혁 내지 일상생활중의 전족금지, 노비금지, 축첩금지, 아편금지등의 각종 율령은 하나같이 구시대와 결별을 선언하는 색채를 보인다.

 

홍수전이 바꾼 것은 무창에서만이 아니다. 태평천국의 부녀제도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여기에서 초기의 여영은 여관으로 바뀐다. 천국의 여병은 신앙상의 추종자뿐아니라, 무력으로 피정복된 자들을 포함한다. 이때의 태평천국여병은 십만의 수를 헤아렸다. 그리하여 규모가 방대한 여관이 된다. 이들 여관의 여병은 그녀들의 고향이 서로 다름에 따라 태평천국의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제도하에서 불평등한 생활대우를 받는다. 여관에서 광동광서, 호남여자는 1인당 쌀 6량을 받았고, 호북과 기타 성의 여자는 쌀 3량을 받았다. "모조리 벼로 대체하고, 모두 죽을 먹도록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였다."

 

이렇게 하여 금전에서 무한까지, '대각만파'의 구성은 태평천국여병의 주요집단이 된다. 무한에서 남경까지, 이 집단은 계속하여 섞이고 혼합된다. 등급차이가 여관내에서 나타난다. 광서에서 온 '대각만파'는 경력이 가장 많고, 충성스러운 '노형제'로 취급되어 여관중의 여관이 된다. 그녀들의 아래에는 자원하여 가입하고 믿을만한 호남부녀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대거 정복되어 호북과 강남 여러 성에서 온 부녀가 있었다.

 

나중에 홍수전의 한가지 규정은 태평천국이 공식적으로 이런 등급차이를 묵인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54년 여름 수확기에, 홍수전, 양수청은 호북, 호남, 안휘등지에 식량징수를 위하여 파견한 군대가 돌아왔다. 돌아온 사람이 이렇게 보고한다; "태평군이 가는 곳에는 쌀과 곡식이 모두 없다." 어쩔 수 없이, 홍수전, 양수청은 규정한다: 여관에서 양광, 호남여자는 일인당 쌀 6량을 주고, 호북과 기타 성의 여자는 쌀 3량을 준다. '모두 벼로 대체하고 죽을 먹도록 명령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

 

왜 태평천국은 한편으로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것을 높이 외치고, 천하의 여자는 '모조리 자매뻘'이라는 교의를 높이 받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각지의 여자를 동일하게 대우하지 않았던 것일까? 일찌기 전주를 점령한 기간동안 풍운산의 전사로 그들은 거의 전주의 전체 성을 도륙한다. 수만의 남녀가 살해당한다. 무창,남경을 점령한 후, 그들은 역시 성내의 모든 만주족을 몰살한다. 이렇게 참혹한 살륙의 배후에는 어떤 역사적 비극이 숨어있는 것일까?

 

홍수전은 새로운 사회환경을 설계하는 동시에, 구세계와는 일도양단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태평천국에서, 남녀분관의 제도, '성고'제도, 천조전무제도, 내지 전족금지, 노비금지, 축첩금지, 아편금지등 여러가지 규정은 하나가지 세상을 통채로 바꾸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편이 아니면 적이다'라는 인간관계도 소리없이 나타났다.

 

태평천국에서, 세계는 신도와 '요얼(妖孼)'의 두 부분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중간분자는 없다. 무릇 그들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옛날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면 모두 유교의 유민이다. 그들의 눈에 이들은 모두 '요'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무한에서 수천명 '대각만파'도 집을 불지르고 사람을 태우겠다고 협박하여 수만의 무한여성을 강제로 가입시키게 된 것이다. 그들의 협박은 황소, 이자성과 달랐다. 그들은 선명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찬가지로 창검을 휘두르며 남경으로 쇄도해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홍수전이 새로운 천국사회를 창조하고, 군법으로 여러가지 규율계율을 지키게 하려는 것과 동시에 천국의 우두머리들의 황음무도한 생활은 병존하고 있었다. 태평천국은 한편으로 하층에서 잔혹한 남녀분리의 군사제도를 실시하면서, 한편으로 고위층은 널리 비빈을 거두었다. 처첩을 많이 두는 것을 허용했다. 혼수전은 아주 황당하게 <다처조(多妻詔)>를 반포하여, 천국의 주민, 해외번중은 모두 처가 많은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서에서 이렇게 정한다: "동왕,서왕은 각 십일인을 취하고, 남왕 내지 예왕은 각각 6인을 취하고, 고급관은 3인, 중급관은 2인, 하급관은 1인을 취한다" 홍수전 자신은 부인 팔십팔인을 두었다. 그리하여 남경을 함락시킬 때, 홍수전을 따른 3천여병은 모조리 천왕부에 들어간다. 천왕부의 높은 담장은 그녀들과 외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한다.

 

홍수전은 일찌감치 후궁이 가득한 제왕의 궁정생활을 꿈꾸었다. 그가 배상제회를 창립할 때, 그의 처를 우정월궁낭낭(又正月宮娘娘)으로 불렀다; 금전의거때 비 15인을 거둔다; 1년후 광서 영안포위공격때, "홍수전은 여색에 탐닉하여, 36명의 여인이 있었다" 얼마후, '부인 88명을 가진다'고 규정한다. 나중에 남경을 수도로 정한 이후에는 1천여명의 여병을 천왕부에 들어오게 한다.

 

이 1천여명의 여병은 천왕부에 들어간 후, 홍수전의 침상위의 비빈이 되거나, 혹은 홍수전을 모시는 궁녀가 된다. 아침에 그녀들은 홍수전의 "세신천포통이발(洗身穿袍統理髮), 소통찰호해주번(疎通扎好解主煩), 주발존엄고정귀(主發尊嚴高正貴), 영원위풍좌강산(永遠威風坐江山)"하게 했다. 그리고 이 태평천국의 천왕에게 참배하고, 금연(金輦)을 끌고 천왕이 어원에서 놀게 한다. 어떤 때에는 심지어 천왕의 배를 안마했다. 다만 수염을 건드려서는 안되었다. 이를 보면 이 태평천국 최고지도자의 위엄과 황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홍수전은 꽃과 같고 옥과 같은 강남미녀들을 보게 된다. 이미 자신을 따라 남정북전한 광서의 '대각만파'들에 싫증을 냈다. 그래서 강남미녀를 선발하여 입궁시키도록 명한다. 당시, 이미 세상이 깜짝 놀랄 천경사변이 일어났다. 다만 홍수전은 여전히 미인선발을 전개한다. 1861년, 홍수전은 다시 이수성이 뽑아서 천경으로 보낸 3천미녀중에서 188명을 골라서 천왕부로 맞아들인다. 당시 어떤 사람은 시를 지어 풍자했다: "삼천원녀여화모(三千怨女如花貌), 백팔가인타혼수(百八佳人墮溷愁)"

 

1855년, 태평천국이 천경에 들아긴지 1년반후, 이미 위기를 깊이 느낀 홍수전은 마침내 여관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시에 나타난 것은 남녀간에 결혼할 수 있다는 조서이다. 전문적으로 이 업무를 진행하는 매관(媒官)을 두어 이를 책임지게 한다. 이것은 여관을 해산하였다기 보다는 부녀를 태평천국의 대소관리에게 나눠주었다고 하는 편이 맞다. 호위대대와 후궁간에 불미스러운 일을 걱정하여 팔백명의 광서에서 온 여병이 천왕부의 호위부대가 된다.

 

이때, 홍수전의 저택은 아주 호화스러웠다. 나이강의 <태평천국사>에는 천조궁전을 이렇게 묘사한다; "천조궁전....사면의 황색 담장의 높이는 이장여이고, 두께는 사척이며, 내외 이중이다. 외벽은 태양성이라고 불렀고, 내벽은 금룡성이라고 불렀다. 태양성은 남으로 문이 열려 있어, 진신영광문이라 불렀다. 문안에 좌우에는 고취정이 있고, 창밖으로 높이 솟았다. 모두 유리기와를 덮었으며 네 기둥은 오색용이 웅크리고 머리를 들고 꼬리를 감고 있다. "

 

이렇게 하여 하층남녀분리제도와 고위층의 처첩을 가득 둔 썩어빠진 생활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리하여 태평천국은 아주 난감한 지경에 처한다. 다만, 이것도 삼천여병의 천왕부를 호위한다는 결심과 의지를 없애지는 않았다. 나중에 청병이 대거 천경에 진입하는 아주 어려운 세월에도, 그녀들은 고독하고 완강하게 태평천국의 중추 천왕부를 굳건히 지킨다. 1864년이 되어 천경이 함락되고, 청나라병사들이 대거 천왕부로 쇄도해 들어갈 때, 팔백여명의 여병은 여전히 "배상제교' 신도의 특유한 광기와 열기로 스스로 불을 질러 자살한다. 팔맥여명의 여병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중국고대사상 최후의 농민반란군정권인 태평천국의 멸망을 의미할 뿐아니라, 중국고대에 가장 방대한 여병부대의 소멸을 의미했다. 당연히 이것은 태평천국여병의 역사적 비극일 뿐아니라, 중국부녀의 역사적 비극이다.

 

이들 최후의 태평천국여병은 중국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농민반란전쟁의 포화 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병방진이 된다. 그녀들보다 앞서서 부친을 대신하여 군대에 들어갔던 '화목란'이 있고, 사령관이 되어 출정했던 '목계영"이 있으며, 북을 울려 금나라병사를 퇴각시킨 '양홍옥"이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시사희곡소설등 문학작품에서의 여장군의 이미지이다. 그녀들의 뒤에는 20세기 2,30년대부터 시작하여 일어난 호호탕탕한 현대여병의 붐이 있다. 역사적인 경험은 증명한다. 여성이 일단 신앙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면, 왕왕 남성보다 훨씬 강한 집착과 독실함을 보인다. 천왕부를 죽기로 호위하겠다고 맹세한 여병이든, 아니면 전쟁의 연기 속에서 용감하게 적을 죽인 황포의 영령이건, 또 아니면 2만5천리 장정의 길에서 고난의 행군을 한 여홍군이건, 모두 하나같이 사실과 자신의 운명으로 한번 또 한번 이 진리를 증명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태평천국여병의 탄생은 철저히 남성사회의 가장 강력한 역량의 국면을 고쳐 쓰게 만들었다. 그녀들이 수를 놓고 바느질하던 두 손으로 차가운 창검을 쥐었을 때, 이것은 여성의 자존, 자강, 자주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최후 운명은 왕왕 그녀들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태평천국의 여병은 결국 소멸한다. 다만 그녀들의 몸에서, 중국여성이 자신의 독립, 자유, 해방을 쟁취하는 지난한 역정을 엿볼 수 있고, 중국현대여병시대가 곧 도래할 것임을 나타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