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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은 사교집단인가?

by 중은우시 2014. 6. 23.

: 인민망

 

반세기동안, 태평천국은 대륙에서 현학(顯學)이었다. 많은 태평군과 관련한 이야기는 모두가 흥미를 느끼는 핫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이래, 여러가지 이유로 점점 관심이 옅어지게 된다.

 

최근 천진백화문예출판사에서 책을 한 권 발건했는데, <태평잡설>이라는 제목이다. 책에서는 35편의 짧은 글을 모았는데, 그 내용은 모두 태평천국 역사를 검토 내지 평가하는 것이다. 작자인 반욱란(潘旭瀾) 선생은 책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얘기한다:

 

"홍수전을 우두머리로 하는 태평군은 두령들이 미신을 이용하여 일으키고 발전시킨 반란조직이다. 그들의 교의, 교규, 계율은 반란참가자들을 정신에서 물질까지 엄격히 통제할 분아니라, 일체의 가능한 퇴로를 차단했다. 그것의 목적은 홍수전 개인이 천하를 점유하고, 그 개인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런 홍씨종교는 기독교의 외피를 입고, 천부 상제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중국노예주와 봉건제왕의 썩어빠진 사상, 규칙으로 그의 지배하에 있는 군민에게 극히 잔혹한 착취와 통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정치적 사교이다. 홍수전의 반란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나, 중국사회의 대혼란, 대파괴, 대후퇴를 댓가로 치른다. 수백만에 달하는 군민의 생명과 선혈을 댓가로 치른다. 중국이 근대의 마지막 기회를 잃고 장기간 제국주의의 도마위에서 어육으로 되는 댓가를 치른다. 특히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영웅사시로서 사람들에게 인간천당으로 향하는 금빛 찬란한 대도라고 했다는 점이다."

 

비록 과거에 우리는 오랫동안 태평천국을 높이 받들고 미화할 때, 국내외의 일부 학자들은 일찌기 의문과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다만, 이처럼 철저하게 부정적인 의견은 이전에 본 적이 없다. 이런 주장이 나오자, 마치 일석격기천중랑(一石擊起千重浪)처럼 남북각지 신문잡지에서 속속 글을 싣는데,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보완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농민의거'를 공격한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형형색색 가지각색이었다. 이 논쟁은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여, 조화의 여지가 없을 듯했다. 만일 태평천국이 혁명이라면, 그것은 역사를 전진시킨 것이다. 그러면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만일 태평천국이 사교라면 그것은 동란과 파괴를 조성했고,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유일한 방법은 바로 역사의 진상을 탐색하여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태평천국 자체가 스스로 답을 내놓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쉽게도 백여년이래, 우리는 태평천국에 대하여 항상 안개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여러가지 원인으로, 우리는 신해혁명을 전후하여서부터 계속하여 태평천국을 높이 평가하고 미화해왔다. 오늘날까지 발전하다보니 사람들의 머릿 속에는 태평천국에 대한 인상이 진정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하에서,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되어, 비록 진실한 증거를 내놓더라도 사람들을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태평천국이 본래의 면목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일대 난제라 아니할 수 없다.

 

태평천국의 역사는 왜 모호한가?

 

시간이 흐른 역사는 전해지는 말이 진실이 아닌 경우가 있다. 세월이 오래 흐르게 되면 파묻혀서 아무도 무르는 경우도 있다. 다만 태평천국처럼 짧은 십여년의 역사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수정되어 고위금용(古爲今用)되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가장 먼저, 태평천국의 역사를 빌어 '고위금용'한 사람은 손중산 선생이다. 그는 당시에 공개적으로 동맹회원, 혁명지사들에게 태평천국을 선전하고, 홍수전을 선전하여 이를 통해 백성들의 기운을 불러일으켜 청나라조정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그는 먼저 '제2의 홍수전'으로 자처했다. 그러므로, 모두 '홍수전'으로 그를 부른다. 그는 다시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을 '민족영웅', '노혁명당'이라고 추켜세운다. 1902년, 그는 재일유핵생 유성우(劉成禹)에게 자료를 수집하여 태평천국의 역사를 쓰라고 격려한다. 1904년에 책으로 만들어지는데, 제목은 <태평천국전사(太平天國戰史)>이다. 손중산 선생이 서문을 써준다. 긜고 일본 동경 조국잡지사에서 출판하도록 해준다. 작자는 한공(漢公)이라는 필명을 쓴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누락한 곳이 너무 많아서 사학적 가치는 별로 없다. 그러나 가치있는 점은 공개적으로 반청을 부르짖고, 혁명을 호소한 데 있다.

 

주의할 점은 손중산선생은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홍조(洪朝)의 망국은 지금으로부터 사십년전의 일이다. 전장위적(典章偉績)은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즉, 손중산은 태평천국의 사서와 전장제도가 모조리 불에 타 없어지고,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태평천국 자체의 사료는 전혀 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홍수전이 어떤 사람인지, 태평천국이 추진한 것이 어떤 제도인지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가 홍수전을 숭상할 것은 그저 그가 '포의출신으로 삼척검을 들고, 오랑캐를 몰아냈다"는 것뿐이다.

 

손중산의 창도하에, 혁명당인은 태평천국의 역사를 반청으로 선전하고, 한때 유행을 하게 된다.

 

혁명당인들은 혁명을 선전하기 위하여, 조정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최대한 태평천국을 높이 평가하고, 홍수전을 높이 받들었다. 한 가지만 취했을 뿐 나머지는 묻지도 않았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당시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장태염이 쓴 <축만가(逐滿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지옥침침이백년(地獄沉沉二百年), 홀우천왕홍수전(忽遇天王洪秀全), 만인도왕열하변(滿人逃往熱河邊), 증국번래주한간(曾國藩來做漢奸), 홍가살진한가망(洪家殺盡漢家亡), 의구호손작제왕(依舊猢猻作帝王), 아금고구권형제(我今苦口勸兄弟), 요파사구심리기(要把死仇心裏記)"(지옥에 빠져 산지 이백년/돌연 천왕 홍수전이 나타났다/만주족들은 열하까지 도망을 친다/그런데 증국번이라는 매국노가 나타나서/홍씨집안을 다 죽이고, 한족은 망한다/여전히 원숭이(만주족 오랑캐를 지칭)가 황제로 있다/나는 형제들에게 쓴 입으로 권하니/원수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이런 통속적이고 알아듣기 쉬운 가서는 하층인민들을 분기시켜 반청운동에 가담하게 하는데 큰 작용을 한다. 이런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맞는지 여부까지는 돌볼 겨를이 없었다.

 

손중산 선쟁이 일찌기 태평천국을 높이 평가한 사실로 인하여, 그 영향이 미쳐, 국공양당에서는 태평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대세로 된다. 국민당은 태평천국의 여러 지도자들이 민족혁명의 영웅이라고 생각했고, 공산당은 태평천국의 여러 지도자들이 농민의거의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1949년이전에 국민당정부는 태평천국을 혁명으로 보았고 혁명선배로 여겼다. 그동안 비록 잡음도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증국번의 '평란'을 숭상하고, <증문정공가서>가 유행하는 것등이다. 그러나 정식 장소에서는 태평천국이 폄하되지 않았다. 1949년이후, 신중국은 금전의거의 인물을 영웅인물, 긍정적 인물로 평가형 그저 칭송했을 뿐 비판할 수 없었다. 이것은 학술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십년겁난(문혁)이전에, 모두 혁명에 공로가 있는 영웅은 마땅히 숭상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그러나 십년겁난중에 사인방은 홍수전을 숭상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준에 이른다. 그들은 홍수전이 진리의 화신이고 그가 한 모든 일은 정확한 것이라고 보았고,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태평천국에서 홍수전외에 양수청은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가이고, 위창휘는 혁명진영에 섞여 들어온 계급의 적이었으며,석달개는 분열주의자이고, 이수성 충왕은 충성스럽지 못한 대반도였으므로 모조리 죽여 마땅한 인물들이다. 마치 홍수전이라는 고가과인을 제외하고 태평천국내에는 좋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처럼. 물극필반(物極必反)인 법이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사람들의 극단적인 반감을 산다; 모두 어쩔 수 없이 새로 생각해보게 된다. 설마 역사상 정말 이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사인방이 타도된 후, 태평천국역사연구가 새로 시작될 때, 들리는 것은 이미 청일색의 칭송하는 소리가 아니었고, 각양각색의 '잡음'이 전후로 나타나게 된다.

 

1979년 5월, 남경에서 태평천국사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태평천국도 봉건정권이며, 그 봉건독재의 정도는 청왕조보다 심했다고 말한다.

 

1981년 3월, 광주에서 거행된 태평천국기의130주년학술세미나에서 어떤 사람이 태평천국에서 실행한 것은 노예제도이며 상층은 특권을 누리고, 하층에는 평균을 중시했다고 말한다.

 

1981년 8월, 사천 석면(石棉)에서 거행된 태평천국기의130주년학술세미나에서, 많은 논문은 석달개에 관한 것인데, 석달개가 떠난 데애는 홍수전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하였다.

 

1983년 3월, 남경에서 거행된 태평천국건도천경130주년학술세미나에서 어떤 논문에서는 태평천국의 <천조전무제도>는 공개적으로 노예제를 실행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인민은 자유가 전혀 없고, 생산은 발전될 수 없으므로, 역사는 반드시 후퇴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각종 회의에서 태평천국에 대한 비판의견은 점차 증가한다. 가장 대표적인 부정적 의견은 공개적으로 발표된 풍우란(馮友蘭) 교수에 대한 방문기였다. 풍우란 선생은 태평천국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얘기한다. 그는 말했다. "내가 태평천국을 부정하는 것은 태평천국에서 신권정치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이 중국을 통일하였더라면, 중구그이 역사는 암흑시대로 후퇴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 지적한다: "누군가 말했다. 태평천국이 건립한 것은 농민정권이라고. 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맞지 않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농민정권을 건립해본 적이 없다." 그는 또한 말한다: "태평천국을 부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증국번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증국번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면 반드시 태평천국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의 두 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륙 사학계에서 태평천국에 대한 견해가 점점 변화하는 것과 비슷하게, 대만의 사학계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태평천국역사의 기록은 왜 심각하게 사실을 반영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이러한 몇 가지 원인때문일 것이다:

 

1. 백여년동안, 많은 정치가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태평천국을 계속 높이 평가해왔고,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태평천국의 역사를 선전했다. 항상 한 가지 점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왔다.

 

2. 사학계는 원래 사실대로 글을 쓰고, 진리를 추구하며,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밝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정치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었다. 혹은 비록 말을 하더라도 중시되지 못했다.

 

3. 일반 군중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다. 그래서 책만을 믿었고, 와전되며, 가짜가 진짜로 행세했다.

 

최근 이십여년동안 상황은 약간 바뀌게 된다. 태평천국에 대한 비판, 질책의 목소리가 이미 없다가 생겨나고, 적다가 많아진다. 그 이유는 학문을 하는 환경이 비교적 관용적이 되고, 점차 대외학술교류가 전개되며, 특히 양안(대륙-대만)의 학술교류가 나타나어 서로 절차탁마하는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태평천국역사의 진상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리한 점이라면, 최근 들어 연이어 진귀한 사료가 일부 발견되었는데, 해외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민간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들 사료는 태평천국역사의 진상을 드러내는데 유력한 증거가 된다. 손중산 선생이 예전에 이미 "모조리 불에 탔다"고 했던 태평천국의 전장제도의 절대다수는 이미 발견되었다.

 

학자로서 마르크스는 10년도 안되는 시간내에 태평천국에 대하여 전혀 다른 견해를 나타낸다는 것이 바로 명확한 사례이다.

 

1853년 마르크스는 태평군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한다. 그리고 뜨거운 희망을 건다. 이후 동방에 완전히 참신한 새나라가 설립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국제평술(1)>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공고한 제국은 8년동안 영국 부르조아의 대량의 인화포(印花布)의 영향하에 이미 사회변혁의 직전에 처해 있다. 이번 변혁은 반드시 이 국가의 문명에 극히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만일 우리 유럽의 반동분자가 얼마후의 장래에 아시아로 도망쳐서, 마지막에 만리장성에 도착하고,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보수적인 보루의 대문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아마도 이런 글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중화공화국

자유,평등,박애

 

그러나, 태평천국은 너무나 무능했다. 그리하여 그는 실망하게 된다. 1862년, 그가 태평천국에서 각종 폭정을 시행하는 것을 알고 난 후,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조교체이외에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았다."

 

"그들이 민중에게 준 당황함은 옛 통치자들에게 준 당황함보다 더욱 심했다. 그들의 모든 사명은 마치 추악하기 그지없는 파괴로 정체와 부패에 맞섰다. 이런 파괴는 조그만치의 건설적인 점도 없다."

 

"확실히, 태평군은 바로 중국인의 환상이 묘사하는 그 마귀의 화신이다. 다만, 중국에만 이런 마귀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마귀는 정체된 사회생활의 산물이다."


홍수전의 역사작용

 

홍수전에 대한 연구에서 중점은 그의 나중의 행위, 그와 태평천국 이 대사건과의 관계이다. 모두 알다시피, 그는 태평천국의 지도자이다. 또한 그는 태평천국의 개국지군이며, 망국지군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다. 이것은 그 중에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주로 홍수전이 개국에 공로가 정말 있느냐 없느냐와 그리고 망국에 책임을 져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우리는 먼저 홍수전이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 분야의 검토는 비교적 쉽다. 왜냐하면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천경의 내분이후, 홍수전은 "주(主)도 짐이 하고, 군사(軍師)도 짐이 한다" 한때 아주 기분이 좋아진다. 다만 곧이어 손발이 흩어져 버린다. 왜냐하면 군정대권은 과거에 양수청이 계속 맡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찾아서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데, 다시 외성인(外姓人)을 중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친적인 홍인발(洪仁發), 홍인달(洪仁達) 그리고 그의 심복인 간신 몽득은(蒙得恩)등의 사람을 기용한다. 그래서 국사를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이후 그의 당제(堂弟) 홍인간(洪仁)이 그에게로 와서, 나라를 흥하게 할 대계를 내놓는다. <자정신편(資政新編)>. 홍수전은 아주 기뻐하며 즉시 중용하여, 정충군사(精忠軍師)에 임명한다. 다만 국가대사를 토론할 때, 그는 봉건적 특권을 조금도 내놓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신정을 추진하려는 건의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얼마후 홍인간은 냉대를 받는다. 진옥성(陳玉成), 이수성(李秀成)등 장수들은 바깥에서 고전을 하며, 위기국면을 막아내기 위해서 애를 뜨고 있는데, 홍수전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한다. 걸핏하면 크게 욕하고, 징벌하여 사람들은 기운이 빠지게 된다. 남경이 포위되어 형세가 위급한데도 그는 홍인발,홍인간이 부정부패하고 돈을 뜯어내고, 양식을 독점하여 국난재(國難財)를 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될 지경에 처하자, 이수성은 '성을 포기하고 떠난다' 홍수전은 크게 화를 내면서, "짐의 병사는 물보다 많다. 짐의 강산은 그대가 받쳐주지 않아도, 누군가 받쳐준다."등등. 홍수전의 이런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는 모조리 고증이 가능하다.

 

그가 개국지군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이수성자술>의 내용을 보자:

 

"남왕 풍운산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은 분명하다. 앞의 여섯 명 가운데, 나라를 세우기로 계획을 세운 것은 남왕의 계책이다. 앞에 일을 한 사람은 모두 남왕이다."

 

당시 태평군의 전군의 상하는 모두 알고 있었다. 개국영웅은 '풍운산'이다. 풍운산의 격려가 없으면, 홍수전은 살기 힘든 광동북부(월북)과 광서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홍수전이 신심을 잃고 광동으로 돌아가려 할 때, 풍운산은 혼자서 자형산으로 가서 근거지를 개척한다. 근거지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출 때까지, 홍수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풍운산이 자

 

형산에서의 활동은 전도의 방식으로 진행한다. 당시 소지주 왕작신(王作新)이 계평현에 고발을 해서 그들이 도모불궤(圖謀不軌)한다고 하여, 계평현에서는 풍운산등을 체포한다. 풍운산은 전도라고 변명하여 위험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편전쟁이후, 영국인은 전도의 특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도로 엄호하면서 근거지를 마련한다. 풍운산은 멀리 광주에서 일찌기 교회업무를 한 적이 있는 홍수전을 교주로 추대하고 군중에 대하여 상제교의 신비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관청에 대하여, 광동의 교회를 뒷배경으로 끌어들여 안전을 획책한다. 풍운산은 책략적인 고려에서 홍수전을 교주로 받든다. 그것은 정확한 길이었다. 그러므로, 홍수전이라는 지도자는 그저 우상의 역할만 했다. 그가 진정으로 지도할 필요는 없었다. 금전의거이전에, 홍수전은 깊이 숨어서 드러나지 않는다. 군중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당시 지도자층의 서열은 이렇다: 홍수전은 천상의 그리스도를 큰형으로 삼는다. 그 자신은 하나님의 둘째아들이 되어, 1인자가 된다; 풍운산은 하나님의 셋째 아들로, 2인자가 된다; 양수청은 하나님의 넷째 아들로 3인자가 된다....이런 순서로 내려간다.

 

금전의거에서 영안건국까지, 중간에 8개월의 고전을 겪는다. 지도자층의 상황에 변화가 발생한다. 전쟁이 빈번하여 군사제일로 되는 것이다. 군중을 장악할 수 있는 현지의 실력파 양수청, 소조귀의 지위가 상승한다. 광동에서 온 홍수전, 풍운산의 지위는 하락한다. 홍수전의 교주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풍운산은 양보하여 4인자로 내려간다. 양수청, 소조귀는 2인자, 3인자로 올라간다. 그리고 양수청이 군사대권을 총괄한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간 후, 홍수전은 깊은 궁궐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부귀에 만족한다. 조회에 참석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국군의 기본적인 업무조차도 하지 않는다. 청나라측의 정보보고서인 <적정회찬>에 따르면, "홍수전이라는 사람은 기실 존재하지 않는다. 경축일에 대전에 앉아있는 것은 단지 허수아비 뿐이다."

 

풍운산이 대국을 지탱하던 시대에 홍수전은 우상이었다. 양수청이 대권을 장악한 시대에, 홍수전은 더더욱 허수아비로 하락한다. 비양발호하던 양수청은 홍수전의 무능함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홍수전을 그저 허수아비, 하나의 도구로 대했다. 조그만치도 존중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천부하범의 명의를 빌어 홍수전의 약점을 질책하기도 하고, 엉덩이를 때리려고 하다가, 백관이 나서서 간청하자, 비로소 '사면'해준다. 홍수전은 양수청에 대하여 원한이 깊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허수아비로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1856년 여름, 암중으로 양수청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과 연락하여, 돌연 급습하는 수단을 써서 양수청의 일가족을 살해한다. 그리고 2만여명이 연좌되어 온 천경성이 암흑에 빠진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계속하여 홍수전을 농민의거의 지도자로 떠받들고, 중국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의거의 지도자라고 받들어 모신다. 그렇다면, 홍수전 자신은 농민의거를 어떻게 보았을까? 1844-1845년, 풍운산이 농민의거의 근거지를 마련하느라고 애쓰고 있을 때, 홍수전은 광동의 고향집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시문을 지었다. 그중에 <백정가(百正歌)>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숭정피사(崇正辟邪), 거악종선(去惡從善)하라고 했는데, 즉, 정을 숭상하고 사를 피하며, 악을 제거하고 선을 따르라고 했다. 노래에서 황소(黃巢), 이틈(李闖, 이자성을 가리킴 틈왕)을 사악하다고 하였다.

 

홍수전의 사생활도 문제점이 있다. 만일 필부라면 사생활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대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홍수전의 사생활은 심각하게 태평천국의 대국에 영향을 미쳤으니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봉건제왕으로서 여색을 밝히고 널리 비빈을 두는 것은 원래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홍수전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첫째, 의거 초기에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때도 여인을 가득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둘째, 그의 비빈학대는 거의 인간성을 상실할 정도가 되었다. 태평천국의 "지준반행(旨准頒行)"된 정식 관서 <천부시> 116을 보라:

 

"천형 예수는 석두각 아래에서 하범하여 성지를 내렸다: 천사가 말하기를 부다소심(咐多小嬸)이 조그만치라도 나의 친동생을 싫어하거나 태만히 하면, 운중설비(雲中雪飛)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천형이 하범한 시간은 금전의거후 6일째 되는 날이다. 장소는 금전에서 십여리 떨어진 석두각(石頭脚)이며, 하범때 소조귀의 입을 빌어서 한 말이다: '부다'(이렇게 많은) 소심(홍수전의 처들을 가리킴)ㅣ 조그만치라도 친동생(홍수전을 가리킴)을 싫어하거나 태만히 하면, '운중설'(칼을 가리키는 은어)이 날아간다.(칼이 날아간다는 것은 죽인다는 뜻임).

 

천경의 궁중생활에서 홍수전은 비빈을 가축처럼 여겼다. 걸핏하면 때리고, 죽였다. 궁중생활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태평천국에서 '지준반행'된 관서 <천부시>의 17,18에서 후비에 대한 내용을 보자: "모시는데 경건하고 성의있지 않으면 첫째로 맞을 이유이고; 고개를 빳빳이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둘째로 맞을 이유이고, 눈을 들어 남편을 보면 셋째로 맞을 이유이고, 천왕에게 묻는데 경건하고 성의있지 않으면 넷째로 맞아야할 이유이며, 성격이 조급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다섯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말하는데 큰소리로 하면 여섯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부르는데 대답을 하지 않으면 일곱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짓지 않으면 여덟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눈을 이리저리 돌리면 아홉째로 맞아야할 이유이고, 말하는데 침착하지 않으면 열째로 맞아야할 이유이다.

 

홍수전의 후비에 대한 학대는 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종 혹형을 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태평천국대사전에는 "보나미(煲糯米)" 조에 이런 말이 있다. 천왕은 비빈을 징벌할 때 쓴 혹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일설에는 유황으로 불을 붙여 점천등(點天燈)한다. 즉, <어제천자조>에는 '음란외설하면 유황으로 너를 태워버린다'는 말이 있다. <천부시> 490에는 '몸에서 냄새가 나...면 유황으로 태운다'는 말이 있다. 일설에는 수형자를 묶어서 큰 솥의 물 가운데 꿇어앉게 한 다음, 약한 불로 천천히 데워서 수온을 올린다. 엉덩이 살이 다 익어서 죽을 때까지 삶는다." 십여년동안, 홍수전은 일부 간신을 통하여 천진한 소녀들을 그녀들의 부모의 수중에서 빼앗아 온다. 천왕부의 깊은 궁전에 가두어 놓고 음락을 즐겼다.그녀들이 조그마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혹은 홍수전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얻어맞거나, 죽거나(죽는 것은 비교적 행운이다), 천천히 혹셩을 받아서 불에 타 죽거나 물에 삶겨져 죽는다. 


태평천국의 실질은 무엇인가?


​태평천국은 도대체 혁명인가 아니면 사교인가? 이것은 간단하게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십여년간 발생한 사정의 발전변화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사교만 언급하고, 정상종교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왜냐하면, 정상종교는 교리의 구속을 받고, '반란'의 온상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어떤 특수한 상황하에서, 정상종교의 기구도 사교에 이용될 수 있다. 역사상, 농민의거 혹은 유민거사는 종교와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동한말의 황건적과 태평도, 송나라때의 방랍과 마니교, 명나라때의 주원장과 명교, 청나라때의 각지에서 거사한 백련교 등등. 그 원인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봉건사회에서, 백성들은 당을 조직하여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고, 집회결사의 자유도 없었다.그저 종교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종교이건, 토착종교이건 외래종교이건 다 이용할 수 있었다. 대체로 처음에는 종교활동을 빌어서 활동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점차 사교활동으로 변모한다. 태평천국은 바로 그러하다. 홍수전, 풍운산은 처음에 기독교의 엄호하에, 발전기회를 찾는다. 동시에 기독교 교리를 이용하여 상제교를 창제한다. 나중에 그들은 양수청, 소조귀의 역량과 결합하여, 천부, 천형하범등 신귀부신(神鬼附身)의 황당한 일을 승인한다. 당연히 말그대로 사교가 된 것이다.


고금중외에 모두 사교는 있다. 이천년전에 중국에서 토착적으로 나타난 사교, 20세기 미국, 일본의 신형 사교, 명목은 서로 다르고, 모양도 가지각색이고 각각의 개성은 있다. 다만, 고금중외의 각종 사교는 필연적인 공통점이 있어 정상종교와 구별된다. 이 공통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정상종교는 교도가 교리를 준수하고, 선을 행하도록 요구한다. 종교신앙에서 정신적인 안위를 얻도록 한다. 위협을 하거나 각종 재해를 가지고 교도를 협박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도들에게 헛된 약속을 하지도 않는다. 사교는 항항 세게종말을 가지고 사람을 겁준다.그리고 신도들은 재난을 피하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한다. 태평천국은 바로 계속하여 이런 약속을 한다. 입교하면 소천당, 대천당에 갈 수 있고, 입교하지 않으면 살아서는 '뱀과 호랑이에게 물리고' 죽어서는 지옥에 빠질 것이라고 하였다.


2. 사교는 모두 신격화한다. 특히 교주가 하늘의 뜻을 알고, 천신과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떠벌린다. 태평천국은 홍수천이 천상에서 파견되어 세계만국의 유일한 진짜군주라고 말한다. 그리고 광서지방의 '강동(降僮)' 미신습속으로 천부가 양수청의 몸에 붙어서 말을 할 수 있고, 천형은 소조귀의 몸에 붙어서 말을 할 수 있다고 고취시킨다.


3. 사교는 모두 재물을 긁어모은다. 정상종교는 공개적으로 모금하거나 경비의 조달처가 있다. 삭는 반드시 스스로 활동경비를 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고, 발전할 수가 없다. 태평천국은 입교하는 사람에게 모든 재물을 바치도록 하였는데, 가장 철저했다.


4. 정상적인 종교는 종교직업자에 대하여만 교리를 준수하도록 요구하고, 일반신도들에게는 강제하지 않는다. 많은 종교활동은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사교는 반공개된 비밀조직으로 자신의 생존과발전을 위하여, 입교자를 엄격히 통제한다. 태평천국은 군민을 나누지 않고, 전민개병이었다. 입교자는 모두 '성병(聖兵)'이 된다. 교리는 10관의 천조를 군율로 하며 내부통제가 엄격한 정도는 공전절후라 할 수 있다.


5. 또 하나의 괴이한 현상은 고금중외의 사교에 특유한 것이고 정상종교에는 절대로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주가 음란하다는 것이다. 젊은 여신도는 모두 그들의 제물이 된다. 사교는 심신 두 방면에서 모두 엄격하게 모든 신도를 통제하므로, 교주에게 여신도에 대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홍수전, 양수청은 여러 처첩을 두었는데, 심지어 천부천형의 성지를 근거로 하였다. 이것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상의 다섯가지 기준으로 평가해보자면, 태평천국은 말그대로 사교이다. 그렇다면, 태평천국을 바로 사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태평천국의 지도자들 중에는 예를 들어 개국공신인 풍운산, 석달개, 그리고 이후에 열정을 가지고 참가한 홍인간은 모두 태평천국이 사교조직으로 타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큰 노력을 했고, 일을 바로잡아 태평천국이 정상궤도로 되돌아오게 하려 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이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한을 품고 죽게 된다.


여대 농민의거 혹은 유민거사는 대부분 사교를 이용했다. 사교는 파괴의 역량이다. 구왕조를 전복시키는데는 그것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건설의 역량은 아니다.신왕조를 건립할 때는 그것이 필요없다. 그러므로, 비교적 총명한 지도자는 초보적인 승리를 거둔 후, 사교와는 결연히 선을 긋는다. 지식분자를 중용하여 정상적인 신왕조를 건립하여 장치구안(長治久安)을 꾀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10여년간의 짧은 역사를 보면, 여러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교에 의존하여 거사를 하였다.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고 부득불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발전하면서 여러번 사교를 포기하고 정상궤도로 들어설 기회가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왕조교체를 하여 신왕조를 건립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사농공상이 각각 자신의 생업에 종사학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적인 길을 걸어 오래된 동방에서 새로운 정치를 펼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하고, 현대의 신국가를 건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회를 한번 잃고나니 다시 오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태평천국를 바로 사교라고 할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풍운산, 석달개, 홍인간과 같은 인인지사(仁人志士)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천수만의 자발적으로 구국구민을 위하여 분투하고 희생한 군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우롱당하고 생명을 댓가로 내놓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질책할 수가 없다. 진정 질책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폭군, 야심가, 간신, 주구이다. 그 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역사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인들이 다시는 전철을 밟지 않도록. 여러번 생각해보아도 필자는 태평천국을 '유산된 혁명', '실패한 의거'라고 부르고 싶다. 장기간 연속되다가 결국은 멸망한 사교집단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