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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태평천국)

태평천국은 왜 입회한 여인을 "매(妹)"라고 불렀는가?

by 중은우시 2017. 1. 21.

글: 이자지(李子遲)

 

1850년 9월, 배상제회(拜上帝會)의 구성원인 이득승(李得勝)의 소가 임봉상(林鳳祥)의 집에 있었다. 부근 영미촌(嶺尾村)의 지주는 이득승에게 재물을 뜯어내려다 실패하자, 두 명을 임봉상의 집으로 보내어 소를 끌고 갔다. 임봉상은 소를 다시 빼앗아 온다. 다음 날, 4,5십명이 임봉상의 집 앞으로 가서 소리쳤다. 임봉상은 4명을 이끌고 손에 짧은 무기를 들고 몰려나가서 이들을 쫑차냈다. 상대방은 다시 200여명을 데리고 와서 싸웄고, 임봉상등 58명은 다시 그들을 쫓아냈다.

 

이 일은 평재산에 보고되고, 소조귀(蕭朝貴)는 모인 사람들에게 과장하여 말한다. "십명이 천명을 이길 수 있다." 배상제회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상대방의 위세를 눌렀다. 이 소수로 다수를 이긴 이야기는 나중에 태평천국이 반포한 관서 <천형성지>에도 실려 있다. 더 나중에는 스웨덴의 성직자 한산문(韓山文)의 저서에도 이 일이 언급되어 있다. 이를 보면 전파가 널리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문금(黃文金)은 박백(博白)의 농민이고 몸이 건장하고,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다. 삼치파(三齒耙)를 잘 썼다. 수십명이 포위공격해도 그를 어쩌지 못했다. 단영령(團營令)을 받은 후 그는 박백지구에서 2000명을 끌어모아서 광동광서에 걸쳐 있는 불자령(佛子嶺)에 군영을 설치한다. 이를 보면 그는 조직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마 후, 그는 이들 무리를 이끌고 박백지현(博白知縣) 유장령(遊長齡)이 이끄는 단련을 물리친다; 그리고 다시 육천(陸川)의 뇌구(賴九) 무리와 호응하여, 산저랑에서 지방단련을 궤멸시킨다. 두 무리는 신속히 5000명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한때는 옥림현성까지 포위공격한다. 그후 당당하게 금전단영으로 향한다.

 

뇌구는 힘이 장사인 철장(鐵匠)이다. 사람들은 그를 "구철구(漚鐵九)라고 불렀다. 그이 본명은 뇌세국(賴世國)이다. 태평천국은 '국(國)'을 피휘했기 때문에, 객가말의 '九'는 '취(就)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이름을 뇌세취(賴世就)로 개명한다. 뇌세취는 일찌기 소주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여한 바 있고, 천경이 함락된 후에는 염군(捻軍)에 들어간다.

 

그해 11월, 광서의 각지에 있는 배상제회 무리는 거의 모두 금전 단영에 모인다. 그들은 뜻을 세우고, 머리에 홍건 혹은 황건을 쓰고, 재산을 휴대했다. 전답과 가옥을 판 돈과 양곡과 가축등도 가져와서 모조리 단영에 넣었고, 이때부터 "성고(聖庫)"가 건립된다. 배상제회의 엄격한 규정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적인 것을 받을 수 없고, 물건은 모두 상주에 귀속된다." 모든 물질은 공사를 불문하고 평균분배하며, 모든 구성원의 생활필수품은 반드시 '성고'에서 지급한다. 식사를 할 때 장교와 병사는 같은 탁자에서 먹으며 잠을 잘 때도 장교와 병사는 같은 방에서 잔다. 이는 빈곤시기에 부득이하게 실행한 것이다. 거기에는 초보적인 군사공산주의성격의 공급제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때 금전단영의 배상제회의 무리는 <주례>의 편제에 따라, 처음에는 전,후, 좌, 우, 중의 5개 군장(軍長)을 두었다. 얼마후에 다시 군수(軍帥)로 명칭을 바꾼다; 각군은 스스로 25인의 양사마에서 졸장, 여수, 사수, 군수를 과할한다. 모두 소속된 관병은 '병책'에 편제된다. 모든 장교와 병사는 그외에 '가책(家冊)'을 작성한다. 본인이 참가한 단영과 가족구성원의 상세한 목록이 들어 있다. 나머지 비전투요원도 군대의 편제에 따라, 남영, 여영으로 나눈다. 이것이 바로 배상제회구성원들은 온 가족이 단영으로 간 이유이다. 그리고 남녀가 섞여 있고, 부부가 동거하고, 노인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완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또한 이 시기에 홍수전등은 대체로 모든 부녀를 "먜"로 통일하는 이름을 짓는다. 예를 들어, 탁대매, 장이매, 이세매등이다.

 

관음은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된 후, 중국민간에서 신도가 많은 보살이다.

 

일찌기 몇개월전에, 소조귀는 천형이 부신(附身)하였을 때, 홍수전과 관음이 매(妹)인지를 두고 대화를 나눈다:

 

홍수전: 관음은 좋은 사람입니까.

천형: 그녀는 좋은 사람이다. 그녀는 지금 하늘에서 복을 누리고 있다. 그녀를 인간세상으로 내려오게 하지 않는다.

홍수전: 관음이 하늘에서 복을 누리고 있으면, 천형은 그녀를 뭐라고 부릅니까?

천형: 나는 그녀를 누이(妹)라고 부른다.

홍수전: 나는 그녀를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천형: 역시 그녀를 누이라고 부르면 된다.

 

전통중국문화에서 관음은 여성으로 보았다. 그래서 '천형'과 홍수전은 모두 관음을 '매'라고 칭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속세부녀를 모조리 '매'로 칭하는 사례를 만들게 된 것이다.

 

태평천국의 여성이름은 모조리 '매'로 칭하는데, 이는 농촌에서 온 부녀들은 자신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성만 있고 이름이 없거나, 남편의 성을 붙이거나, 집에서 부친을 따르고, 시집가면 남편을 따른다. 그래서 그녀들의 이름에 '매'를 쓰고 남편의 성을 붙이는 전통적인 방식을 없앤 것은 부녀를 존중하는 조치라고 볼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