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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그림

제백석(齊白石): 청말민초의 대화가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장부걸(張溥杰) 

 

 

 

제백석(치바이스)은 1864년 1월 1일(청나라 동치3년 계해 동월 이십삼일) 호남 상석포 행자오에서 태어났다. 백석은 집안의 장남으로 일명 순지(純芝)이며 호는 위청(渭淸), 혹은 난정(蘭亭)이다. 27살때(1889년), 다시 황(璜)이라는 이름을 얻고, 호를 빈생(瀕生)이라 하고 별호를 백석산인(白石山人)이라 한다. 세상사람들이 가장 익숙한 것은 제백석이라는 이름이다. 그는 필명과 자호가 아주 많은데, 제대(齊大), 목인(木人), 목거사(木居士), 홍두생(紅豆生), 성당노옥후인(星塘老屋後人), 차산옹(借山翁), 차산음관주자(借山吟館主者), 기원(寄園), 평옹(萍翁), 기평당주인(寄萍堂主人), 용산사장(龍山社長), 삼백석인부옹(三白石印富翁), 백수이화주인(百樹梨花主人)등이 있다. 1957년 9월 16일 (정유년 팔월 이십삼일), 북경에서 병사하니, 향년 93세이다.

 

1864년 양력 새해 첫날, 호남 상담의 행자오에서 일대대화가 제백석이 새해와 함께 세상에 온다. 9살때 제백석은 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집안이 빈곤하여 1년도 되지 않아 공부를 그만두게 된다. 그후 집안에서는 그에게 손기술을 배우게 하려 한다. 손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고, 굶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백석의 부친은 그를 본가의 한 숙조(叔祖)에게 보내어 목공기술을 익히게 한다.

 

힘이 약했던 제백석은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르겠다. 목공이라는 이 육체노동을 잘 하지 못하여, 비록 본가의 숙조이지만 제백석을 본가로 쫓아보낸다. 제백석은 진취적인 인물이다. 그는 절대로 실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16세가 되던 때 주기미(周其美)를 스승으로 모서 조화목예(雕花木藝)를 익힌다. 제백석은 여기에 흥미를 크게 느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 정력을 쏟는다. 속담에 "흥미난 가장 좋은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삼년의 시간이 흐르자, 제백석의 조화목예는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른다.

 

약관의 나이에 제백석의 인생은 비교적 큰 전환점을 돌게 된다. 제백석이 외출하여 일을 할 때, 우연히 주인 집에서 청나라 건륭연간에 번각(飜刻)한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를 보게 된다. 제백석은 설렁설렁 몇 페이지를 넘기다가 거기에 심취한다. 보물을 얻은 것처럼 이 화책을 빌려와서 매일 연구하고 본따서 그린다. 이것은 나중에 회화에 견실한 기초를 닦게 해준다.

 

그러나, 제백석이 진정 교육을 받게 된 것은 27세때이다. 호심원(胡沁園), 진소번(陳少蕃)을 스승으로 모신다. 가정이 빈한하므로 그는 더욱 각고의 노력으로 배운다. 이 기간동안 그의 회화예술은 급속히 발전한다. 이 시기에 집안에 돈을 보태기 위하여 그림을 팔기 시작한다.

 

57세가 되었을 때, 이미 지천명이 나이를 넘긴 제백석은 북경으로 온다. 돈이 별로 없다보니 그는 북경 법원사에 입주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북경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하루는 진사증(陳師曾)이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한번은 진사증이 유리창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부지불식간에 제백석의 인장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크게 찬탄한다. 그래서 특별히 법원사로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의견이 맞았고 막역지우로 된다.

 

진사증의 도움으로, 제백석은 다시 그를 따라 일본으로 가서 중일연합회화전람회에 참가한다. 전람회에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이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유명해져서 이름을 국내외에 떨친다.

 

그후 1920년부터 1929년까지 10년의 시간동안 제백석은 '폐관수련"을 시작한다. 그의 예술은 등봉조극의 경지에 이른다. 그는 결국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일대대화가가 된 것이다.

 

제맥석이 유명해지자, 그를 모방한 짝퉁작품이 시장에 넘쳐나기 시작한다. 하루는 경극대가 매란방이 제백석을 만나서, 제백석에게 그의 친구 한 명이 이백냥 은자를 주고 제백석의 <춘경도(春耕圖)>를 샀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제백석의 그림이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제백석은 돌연 흥미를 느낀다. 그 그림을 그가 언제 그렸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매란방에게 그 그림을 빌려오게 해서 살펴본다. 그러자 그것이 짝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백석은 그 자리에서 매란방에게 그 친구가 손해를 보도록 하면 안된다며, 자신이 돈을 내어 그 짝퉁그림을 사준다. 그리고 붓을 들어 다른 한 폭의 <춘경도>를 그려서 그 사람에게 건네준다.

 

이 일은 일시에 미담으로 회자되었다. 사람들은 제백석을 더욱 존경하게 된다.

 

대가가 된 후의 제백석은 도모안연(道貌岸然)의 뭄인들과 같이 '돈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명정대하게 윤필비를 받았다. 그리고 하나의 규정은 누구든지간에 반드시 먼저 돈을 주어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 외에 제백석은 한푼까지 따지는 까다로운 늙은이였다.

 

제백석이 어려서 그림을 팔 때,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수량으로 계산했다. 노점상에서 물건을 파는 것처렴, 야채 과일, 닭, 오리, 물고기, 새우등 그림 속에 몇 개가 있는지 그 갯수에 따라 얼마로 계산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새우를 주제로 한 그림을 원했다. 제백석이 그림을 다 그린 후, 그림에 몇 마리의 새우를 그리고, 마릿수에 따라 계산했다. 그 사람은 그림을 본 후에 정말 야채시장에서 야채를 사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새우 한 마리만 더 그려달라고 했다. 제백석은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붓을 들어, 그림에 새우를 한 마리 추가해준다. 그 사람이 그림을 보니 그 새우는 좀 이상했다. 생기가 없고, 괴이했다. 제백석이 말한다: "네가 추가해달라고 한 그 새우는 가격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죽은 새우로 그렸다. 그래서 공짜로 주는 것이다."

 

제백석은 일본인 매국노를 대할 때도 전혀 비굴하지 않았다. 중국문인의 당당한 기개를 드러낸다. 그외에 인구에 회자되는 제백석의 명언도 많다. 예를 들어, "하루도 놀면서 지내지 말라(不叫一日閑過)", "나를 배우는 자는 살 것이고, 나를 따라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學我者生, 似我者死)", "막선모란칭부귀(莫羨牡丹稱富貴), 각수이귤유여감(却輸梨橘有餘甘)", "사자미속(似者媚俗), 불사자기세(不似者欺世), 묘재사여불사지간(妙在似與不似之間)"등등이 있다.

 

그렇다면, 왜 제백석은 미신의 일대대사라고 하는가?

 

어느 점쟁이가 일찌기 그의 점을 봐준 적이 있다. 그는 75세에 반드시 한번 겁(劫)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제백석은 그의 말을 깊이 믿었따. 이 겁난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75세가 되었을 때, 나이를 두 살 덧붙여 77세로 고친다. 그리하여 이것도 제백석의 그림에서 짝퉁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근거중 하나가 되었다. 짝퉁을 만드는 사람들은 제백석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료, 낙관에 "시년칠십오"라고 적거나, "시년칠십육"이라고 적는다. 제백석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한번만 봐도 짝퉁임을 알아볼 수 있다.

 

2011년 5월 22일, 제백석이 그린 크기가 가장 큰 그림인 <송백고립도.전서사언련>이 4.255억위안에 경매되었다. 이것은 제백석의 예술성취에 대한 증명이자 긍정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