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는 왜 망했는가?

중은우시 2016. 3. 19. 23:09

글: 장조권(蔣祖權)


어떤 사람은 말한다. 대명은 부패때문에 망했다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대명은 이자성(李自成)에게 상부에 호소할 길을 마련해주지 않아서 망했다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대명은 위충현(魏忠賢)이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망했다고.

그러나, 숭정제(崇禎帝)의 형인 목수천재 주유교(朱由校)는 임종때 자기보다 5살 어린 동생에게 유언을 남길 때, 위충현은 "대사를 논의할만하다(可計大事)"라고 말했다.


위충현은 분명 좋은 자가 아니다. 그는 당동벌이(黨同伐異), 즉 자기를 따르는 자는 기용하고 자기에 반대하는 자는 쳐냈으며, 잔인하고 악독했다.

그러나 위충현은 부패한 왕조체계를 운연하는에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

위충현은 일찌기 요양전투에서 패배한 후 책임추궁을 받던 웅정필(熊廷弼)을 기용한 바 있고, 사적원한을 버리고 조남성(趙南星)등 능신을 추천한 바 있다.

위충헌이 정권을 잡았던 기간동안 요동의 국면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숭정제가 권력을 장악한 후, 각지의 유민들은 속속 반란을 일으키고, 관외의 청나라도 호시탐탐 중원을 노린다.

숭정제는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대사에 있어서 정말 멍청하게 처리했다.

그는 탁상공론하는 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원숭환(袁崇煥)을 죽이고, 17년동안 17명의 형부상서를 교체한다.

그의 형인 명희종(明熹宗)은 기껏해야 위충헌 1명만을 기용했지만, 그는 더 많은 태감을 기용했는데, 그 중에 하나도 위충현만큼 능력있는 자가 없었다.


-----숭정, 이 소위 호인황제(好人皇帝)는 전혀 부패쳬계를 장악할 능력을 갖주고 있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부패체계를 장악한 사람은 모두 악인이고, 절대로 평범한 호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명의 역사무대에서, 숭정제 주유검(朱由檢)은 대권을 독점한 허영군주가 되기 위하여 위충현을 제거하면서 몇 마디 환호는 들었지만 그걸로 그만이었다.


왕조체계를 장악하는 능력과 관련하여 숭정제는 결국 마지막에 자신의 목을 맬 줄 하나를 잡아ㅏㅆ을 뿐이다. 군국대사를 처리하는 경험은 모조리 위충현이 죽으면서 잃게 된다.


1644년 4월 20일, 숭정제는 태감이 "위충현이 있었더라면 일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

이 때, 그는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그의 평범과 무능이 이렇게 빨리 명나라를 망쳤다는 것을...

5일이후, 1644년 4월 25일, 숭정제 주유검은 목을 맨다.


---일인통치시대에 영원한 왕조는 없다. 대명은 말할 운명이었다. 단지 그저 흉내만 내는 호인황제가 능력있는 악인을 제거했을 때 망하게 된 것이었다.

---대명의 운명은 숭정제 주유검의 평범과 무능으로 망국의 속도를 가속화하게 된 것이다.


숭정제가 왜 이처럼 평범하고 무능했는가? 한가지 우스개 소리는 이런게 있다. 대명황가는 빈민출신이고, 졸부가 되어 천하를 얻는다. 그래서 사족들에게 전복될까 겁을 먹는다. 그리하여 황후를 고를 때 대부분 평민집안에서 데려왔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전자가 대를 내려가면서 나빠진다. 비극의 마지막 형제중 하나는 목수이고, 하나는 목을 매었다. 혈통과 대명왕조를 모두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숭정의 평범과 무능은 대명에 있어서 나쁜 일이다.

이는 청나라에 있어서는 좋은 일이다.


그때, 이자성이 생각한 것은 빼앗아온 금은보화였고,

그때, 오삼계가 생각한 것은 미녀 진원원이고,

그때, 도르곤이 생각한 것은 어떻게 대명강산을 모조리 빼앗아 올것이냐는 것이었다.


일반백성은 역사상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한번도 이런 일반백성을 생각해주지 않았다.


역사가 이런 상황을 맞이하면, 어떤 천하이건 붕괴의 길로 몰락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