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 황궁의 조선여인

by 중은우시 2017. 10. 15.

글: 염경생(閻京生)


원나라는 조선반도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했고, 고려국왕이 정동행성의 승상(丞相)을 맡았다. 근 백년동안 여러 몽골의 공주가 고려국왕에게 시집간다. 그리하여 인척관계가 성립되었다. 이와 동시에, 원나라황실과 귀족들은 자주 고려에 여자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1275년, 고려는 원세조 쿠빌라이에게 10명의 미녀는 바치고, 5년후 원나라의 권상(權相) 아합마(阿合馬)도 고려에 미녀를 바칠 것을 요구한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원순제(元順帝)의 황후 기씨(奇氏)도 고려여인이다. 원순제 지정연간, "궁중의 급사사령의 절반이상은 고려인이었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의복, 신발 모자 기물이 고려양식을 따랐다.


원나라말기 천하가 혼란에 빠지고, 진우량, 명옥진, 주원장등 한족정권수령의 후궁에도 많은 고려에서 온 여인과 환관이 있었다. 이들은 그들이 천하를 휩쓸 때 약탈해서 군중으로 데려간 것이다. 주원장의 후궁에 몇명의 고려비빈이 있다. 연왕 주체(명성조), 주왕 주상, 요왕 주식, 함산공주등 몇몇 황자황녀들은 모두 고려여인의 소생이다.


조선반도에는 자고이래로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다. 여자는 피부가 하얗고, 성격이 온유하며 총명하기로 이름났다. 영락연간부터, 명왕조는 조선반도에 처녀를 바치는 관례를 다시 부활시킨다. 영락6년, 명성조는 성지를 내려,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잘생긴 여자를 몇 명 뽑아 보래라"고 한다. 조선에서 당시에 바친 여자들이 비록 명성조에 의하여 "뚱뚱한 건 뚱뚱하고, 얽은 건 얽었고, 땅땅한 건 땅땅하다"고 욕했지만, 모두 후궁으로 들인다. 권씨(權氏), 임씨(任氏)는 황비(皇妃)로 봉해지고, 이씨(李氏), 여씨(呂氏)와 최씨(崔氏)는 소의(昭儀), 첩여(婕妤), 미인(美人)으로 봉해진다. 그후 명나라는 다시 영락7년, 8년, 15년에 3차에 걸쳐 조선에 처녀를 바치도록 요구하여 후궁으로 받아들인다. 명나라에 보내진 처녀의 "부모, 친척의 곡소리가 길거리를 채웠으며 당시 사람들은 산송장이 되었고 여겼다."


조선 국내에서 매번 명나라가 처녀를 요구한다는 소문이 돌면, 사대부와 평민은 급히 딸들을 시집보냈다. 심지어 조선의 태종, 세종까지도 부득이 자신의 딸을 서둘러 시집보내야 했다. 명나라에 바쳐지는 제물이 될 운명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명선종이 죽은 후, 조선으로 가서 처녀를 고르는 일은 한때 중단된다. 다만 경태제가 즉위한 후 다시 조선선녀제도(朝鮮選女制度)를 부활시킨다. 명무종도 사람을 보선에 보내 여자를 뽑으려 했다. 다만 사자가 막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명무종이 병사해버린다. 황위를 계승한 명세종은 조선에 간 사신에게 급히 귀국하라고 불러들인다. 이때서야 비로소 조선에서 백여년에 걸친 처녀를 공녀로 바치는 일이 끝나게 된다.


명성조는 본인의 생모가 고려인이다. 여기에 후궁 중에도 많은 조선여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자주 조선에 조선의 특색이 있는 나전칠기함, 수놓은 주며니, 붓과 연적, 화문석등 공물을 바치도록 요구한다. 그외에 조선후궁의 음식생활을 돌보기 위하여, 다시 조선에 물고기, 새우, 문어, 소라등의 식품을 공물로 바치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어, 명성조의 성지에는 "큰 문어를 잡아서 보내라"는 말이 있다. 그외에 명성조는 자주 조선에 20세이상 30세이하의 음식을 잘하고 술을 잘 담그는 비녀를 보내도록 요구한다. 그리고 "소내사(小內史) 8명 가무를 할 줄 아는 어린 여자 5명, 이저트를 만들 줄 아는 큰여자 20명"등등을 요구했다. 


처녀외에, 고려시기에는 원나라에 환관을 진공하는 전통이 있었다. 고려환관은 총명하고 영리했다. 그리하여 원나라조정에서 중용된다. 주원장이 등극한 후, 자주 고려와 조선에 "화자(火者, 환관)"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명성조는 즉위후 얼마되지 않아 조선에 "나이어리고 냄새가 나지 않는 화자 60명"을 바치도록 요구한다. 조선에서는 35명을 뽑아서 보냈는데, 명성조는 만족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 중에 깨끗하지 않은 자는 다시 돌려보내라" 몇년후 다시 조선에 환관을 바치도록 요구한다. 구체적인 수량은 얘기하지 않는다. 조선의 태종 이방원은 명나라사신에게 묻는다. 사신은 "3,4백이상"이라고 말한다. 이방원은 난감해서 말한다. "그건 심어서 얻는게 아닌데 어찌 그렇게 많이 얻을 수 있겠는가?"


영락제 선덕제시디에 조선에 처녀를 뽑기 위하여 보내어진 황엄(黃儼), 해수(海壽), 윤봉(尹鳳)등 환관은 출신이 모두 조선에서 명나라조정에 바친 환관들이었다. 본국에 돌아가서는 왕왕 더욱 심하게 수탈했고, 착취가 심했다. 비단, 인삼, 수달가죽, 사슴가죽, 고려종이, 화문석등 재물을 강탈해갔다. 그리하여 조선전체가 난리법석을 떨게 된다. 명선종이 사망한 후, 명영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양영(楊榮), 양사기(楊士奇)등 문신들이 보정하면서 조선에 환관을 바치도록 요구하는 관례가 한때 중단된다. 다만 경태제시기에 다시 조선에 환관을 바치도록 요구한다. 명영종이 복벽한 후, 이 전통은 최종적으로 취소된다.


영락12년, 명나라조정의 후궁에는 조선비빈과 관련된 큰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어려지난(魚呂之亂)"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이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발생한 경위는 이렇다. 영락6년 조선에서 진공한 처녀 여씨가 첩여로 책봉된 후, 상인집안 출신인 중국의 여씨 궁빈(宮嬪)은 같은 성이라는 것을 기화로 하여 그녀와 친해지려고 한다. 그러나, 여첩여는 지위가 낮은 상인집안의 딸이라고 무시하고, 오만하게 거절한다. 그리하여 중국여씨는 원한을 품는다. 영락8년 명성조는 경사(남경)을 출발하여, 막북을 정벌하러 떠난다. 단지 권현비(權賢妃)만을 데리고 간다. 권현비는 미인인데다가 옥피리를 잘 불어서 명성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만 권씨는 장거리여행에 익숙히 창ㅎ고 힘들어해서 돌아오는 도중에 산동 임성에서 병사하고, 역현(嶧縣)에 장사지낸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영락11년이 된다. 중국여씨는 기회를 잡아 명성조에게 참언을 올려 이렇게 말한다. 권비의 노비와 여첩여의 노비가 싸웠는데, 권비의 노비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주인이 나의 주인을 독살했다." 명성조는 대노한다. 그리하여 여첩여를 엄히 심문한다. 조선여씨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한다. 조선에서 바친 환관 김득(金得), 김량(金良)과 결탁하여, 은장(銀匠)의 집에서 비상(砒霜)을 빌려서 가루로 만든 다음 호두차에 넣어서 권비에게 마시게 했더니, 권비가 바로 죽었다. 여첩여는 그후 명성조의 명에 의해 낙철(烙鐵)로 한달간 지져서 고통속에 죽어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의 궁안에 있던 모든 비녀, 환관 그리고 김득, 김량을 모조리 처형한다. 모두 수백명이 죽는다. 명성조는 다시 조선에 여첩여의 가족을 처결하도록 요구한다. 이방원은 하륜, 남재등과 상의하여 여씨가족을 최종적으로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명나라에는 거짓으로 여씨의 모친 장씨를 이미 죽였다고 보고한다.


여첩여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 중국여씨와 또다른 비빈인 현비어씨(賢妃魚氏, 이는 조선이조실록의 칭호이다. 명나라 실록에서는 그녀를 유씨(喩氏, 어와 유는 중국발음이 '위'로 같다)는 환관과 사통하여 가봉허황(假鳳虛凰)의 대식(對食)관계를 맺는다. 명성조는 이 일을 어느 정도 눈치챘으나, 두 사람을 총애하였으므로, 추궁하지 않고 잇었다. 그러나, 어씨, 여씨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두려워하며 자살하고 만다. <태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것이 영락19년 삼월의 일이다. 다만, 명성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 사람이 자결한 겻은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시비를 엄히 고문한다. 여씨의 비녀는 거짓으로 실토한다. "두 사람이 시역(弑逆, 황제를 살해함)하려 했다"고. 이리하여 명성조의 후궁에는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분다. 연루된 궁빈, 시녀, 환관이 2,800여명에 달한다. 명성조는 모두 친히 처형장면을 지켜본다. 한 궁녀가 형을 받기 전에 명성조를 욕한다: "네가 성불구여서 내가 어린 환관과 사통했는데,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조선에서 진공한 여자들은 이 사건때 거의 모조리 죽어버린다. 순비 임씨(順妃任氏), 미인 정씨(美人鄭氏)는 자결하고, 소의 이씨(昭儀李氏), 궁녀황씨(宮女黃氏)는 참형을 당한다. 사건이 비록 북경의 궁안에서 발생하였지만, 연좌된 사람이 아주 많아서, 남경의 궁인들도 북경으로 불려와서 심문을 받는다. 미인 최씨(美人崔氏)는 병으로 늦게 가는 바람에 죽음을 면한다. 북경의 여비 한씨(麗妃韓氏)도 빈 방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수일간 음식을 주지 않았고, 그녀의 시비는 모조리 피살당한다. 유모 김흑(金黑)도 감옥에 갇힌다. 명성조는 그래도 원한이 풀리지 않았는지, 화가를 시켜 여씨와 어린 환관이 끌어안고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해서 후세에 전하게 한다. 그러나 명성조는 어씨에 대하여는 여정히 애정이 남아 있어서, 그녀를 "충경소순현비(忠敬昭順賢妃)"에 봉한다. 그리고 명을 내려 그녀의 시신머리를 장릉(長陵, 명성조의 능묘) 부근의 귀비묘원인 "동정(東井)"에 묻어준다. 다만 조선의 실록기록에 다르면, 어씨의 유체는 나중에 명인종에 의하여 파내어져서 버려졌다고 한다.


영락22년,명성조가 사망한 후, 황위를 승계한 명인종은 몽골의 습속을 본받고, 명성조가 남긴 관례에 따라, 후궁 50여명의 비빈을 순장하도록 명한다. 한여비와 최미인도 순장되었다. 순장전에 여러 비빈들은 먼저 대전앞 정원에서 최후의 식사를 한다. 식사를 끝내고나서 대전에 들어간다. 서까래에서 끈이 내려뜨려져 있었고, 아래에는 작은 목상(木床)이 놓여 있었다. 순장되는 여러 비빈들은 목상을 밟고 올라가, 머리를 동그란 끈안에 집어 넣는다. 이때 대전안에는 곡성이 하늘을 진동했다. 명인종이 대전으로 들어와 여러 비빈들과 결별할 때, 한여비는 명인종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곡을 하며 조선으로 돌아가서 노모를 보시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목을 매고 순장된다. 죽기 전에 유모 김흑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가요. 엄마 나 가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목상을 빼버렸다. 그리하여 최미인과 같이 죽어서 장릉에 묻힌다. 시호는 "강혜장숙(康惠莊淑)"이라 한다.


한여비의 오빠인 한확(韓確)은 조선명신 한명회(韓明會)의 당형(堂兄)이고, 조선왕조 인수대비의 부친이다. 당시 그는 한여비를 명왕조에 바친 후, 명성조가 그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했다. 조선의 <이조실록>에 따르면, 준마 6필, 안장 1개, 황금 50냥, 백은 600냥, 각종 비단 56필, 직금 8단, 각 색채의 견 200필, 털로 만든 비단 4필, 백나금 20조, 백어라손수건 50개, 백금도화수건 4개, 비단오채수놓은 배게 5개, 각종 주머니 20개 백당 80근을 내렸다고 한다.


한려비가 순장된 후 다시 몇년이 지나서, 명선종은 환관을 조선에 보내어 미녀를 구한다. 한확은 다시 다른 여동생 한계란(韓桂蘭)을 입궁하도록 추천한다. 한계란은 이때 병이 들어 있었는데, 절망하여 오빠에게 이렇게 맗한다: "여동생 하나를 팔아먹어서 벌써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였는데, 내가 왜 약을 먹어야겠는가?"라며 약을 먹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명왕조의 후궁에 보내어진다. 그리고 공신부인(恭愼夫人)에 봉해진다.


명선종이 죽은 후, 그와 잠자리를 함께하지 못한 53명의 조선여자는 본국으로 보내어진다. 한여비의 유모 김흑도 이때 본국으로 돌아온다. 명왕조는 그들이 '어려지난'의 내막을 누설할까 겁을 내어 조선의 예조에 당부한다: '궁안의 일은 비녀들이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 묻지도 못하게 하라. 만일 궁안의 일을 누설하면 묻는자나 말하는 자, 전하는 자는 모조리 중형에 처하라." 다만 조선은 어쨌든 명왕조가 통제할 수 없는 외국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세히 물었을 뿐아니라, 그 내옹을 조선의 <세종실록>에 상세히 실었다. 후세인들에게 진귀한 사료를 남겨준 것이다.


한계란은 자신의 오빠가 부귀영화를 위하여 여동생을 팔아먹은 행위에 분개하여, 귀국을 거절하고, 여전히 명나라 궁중에 남아 있는다. 그리고 궁녀들의 존경을 받는다. 비이하의 후궁들은 그녀를 '로로(老老)"라고 존칭했다. 명헌종 선화19년에 사망하니 향년 74세이고, 북경 서교의 금산(金山)에 장사지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