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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말당쟁의 시비곡직

by 중은우시 2014. 12. 12.

글: 양청균(楊淸筠)

 

동림당과 엄당의 투쟁은 천계제때 엄당의 승리로 끝난다. 비록 동림당이 천계제의 즉위에 거대한 공을 세웠지만, '삼대안(三大案)'을 통해서 기회를 만들어 주었지만, 천계제는 확실히 이들 재야에서 성장한 선비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충현이 이끄는 엄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투쟁은 격렬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원래는 정치적인 권력투쟁이었는데, 더욱 깊은 원한으로 모조리 죽여버리는 혈안으로 발전한다. 동림당은 결국 소멸되고 만다.

 

위충현에게는 천계제의 보호라는 우산이 있었다. 특무기구 동창과 금의위를 움직일 수 있는 고급권력을 갖고 있었다. 특무기관은 직접 황제에게 책임을 졌다(어느 정도 위충현에게 봉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법절차를 통하여 일부 모역을 꾀한 자들을 체포하고 심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을 누구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천계5년 삼월, 동림당인 왕문언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이유는 그를 대표로 하는 동림당인들이 뇌물을 받고 죄인을 살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문언에 대한 심문을 책임진 사람은 당시 북진무사지휘 허현순이었다. 그는 위충현에 충성하는 심복중 하나였다. 심문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위충현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두 달도 되지 않아 왕문언은 옥중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는다. 죽은 후에는 진귀한 '자술서'를 남긴다. 자술서에서는 그와 공모하여 뇌물을 받은 다른 동림당인들의 이름이 있었다. (아마도 대부분은 위충현이 위조한 것일 것이다) 자술서에는 양련, 좌광두, 고대장, 원화중, 위대중과 주조서의 6명의 동림당 핵심인물이 들어 있었다. 위충현은 당당하게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말이 감옥에 가두는 것이지 실제로는 그들을 살려서 내보낼 생각은 아예 없었다. 이 몇몇 사람의 이름은 모두 낯설지 않을 것이다. 양련, 좌광두는 모두 천계제를 옹립하고 이선시와 투쟁할 때 천계제를 크게 도와주었던 인물들이다. 지금 동림당이 대세가 기울어, 이런 비참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체포하는 과정에서는 형부에 이송할 필요가 없어서 엄당은 암중으로 6명을 비인간적으로 악랄하게 괴롭힌다. 그 중 가장 참혹했던 것은 가장 강경했던 양련이었다. 그는 동림서원이 추구하는 정기지풍(正氣之風)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허현순은 강침으로 온 몸을 찌르고, 동추로 가슴을 쳐서 늑골을 부러뜨리고, 철정으로 귀를 뚫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마지막에는 시신마저도 제대로 온전하게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몇 사람도 이런 혹형을 당하여 참혹하게 죽는다. 그후, 위충현은 미친 듯이 이 6명의 후골(喉骨)을 골라내게 한 다음 이 후골들을 쳐다보며 말한다: "여러분 별래무양하신지요. 아직도 상소를 올릴 수 잇으신가요?" 이 사건은 동림당 '전육군자(前六君子)' 원옥(寃獄)이라고 부른다.

 

육군자 이후, 다시 고반룡, 주기원등 7명의 동림당인들이 박해를 당한다. 이를 "후칠군자(後七君子)'원옥이라고 부른다.  천계4년에서 천계7년까지 엄당이 살해한 동림당인은 십여명이다. 나머지는 죄를 물어 충군(充軍)시키거나, 강등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후환을 영원히 막기 위하여, 위충현은 지방에서 공개적으로 강학하는 서원을 금지시켜, 동림당의 본거지를 없애버린다. 이번 투쟁에서, 동림당은 치명적으로 참패한다.

 

여기까지 들으면, 아마도 사람들은 크든 적든 결말이 비교적 비참했던 동림당인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학술적인 분위기의 동림서원 출신들이다. 그리고 엄당은 대부분의 구성원이 학식이 뛰어난 문관이었지만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환관이 우두머리이다. 동림당은 대중들의 이미지에서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명말의 이 투쟁에서 정말 동림당은 정의의 화신이고, 위충현은 악인의 전형일까?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역사라는 것은 일정한 필연과 더 많은 우연이 존재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당쟁이라는 사건을 보면, 절대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구분할 수가 없다. 엄당이 천하를 횡행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히 말해서 천계제의 묵인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충현이 뭐 대단한 사람인가. 그는 시정에서 배운 아부하는 능력을 가지고 뜻을 얻었지만,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쨌든 권력은 최종적으로 황제에 있었다. 그는 바로 천계제의 개인 셈이다. 그가 누구를 향하여 짖는다면 그것은 바로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한마디 행동 하나는 모두 천계제의 뜻이다. 명나라의 황제는 모두 속이 검었다. 목공일에 심취한 천계제도 마찬가지이다. 위충현이 한 것은 그의 뜻에 따라서 처리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면 동림당을 약화시킨 것이다. 비록 동림당은 그를 도와서 황제에 오르게 했지만, 천계제는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생각이 있었다. 다른 말로 해서 동림당에 의존하는 것은 아예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보편적인 느낌은 천계제가 멍청하고 조정의 정무를 돌보지 않았으며, 엄당이 권력을 농단하게 하였으며, 정의를 부르짖는 동림당인들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였으며, 마음 속에 천하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림당인들이 그렇게 위대했을까? 그들도 학술과 정의를 핑계로 하여 자신의 당파가 더욱 큰 권력을 쟁취하고자 했을 뿐이다. 상대방을 타격하는 측면에서 그들도 전혀 봐주는 법이 없었다. 동림당이 엄당과 구분되는 것은 마치 그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고도로 미화할 줄 알아서 숭고하고 성결한 주제를 내세우며 권력과 이익을 쟁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더욱 거칠게 말하자면, 열녀문의 뒤에서 몸을 파는 기녀와 같았다. 이렇게 당파를 만들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확실히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천계제를 자신들이 옹립했다는 것을 가지고, 드러내놓고 조정에서 세력을 확대한다. 이것을 천계제도 보았다. 그들의 방대한 세력, 방대한 언관의 역량, 심지어 끝도없이 이어지는 상소는 황제의 의사결정과 의지에 영향을 주었다.(만력제때의 국본지쟁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는 아직 동림당의 전성기가 아니었다) 이는 군권이 고도로 집중된 명나라때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천계제는 동림당이 조정을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내신인 위충현에게 묵인하는 방식으로 동림당과 싸운 것이다. 위충현의 엄당의 진정한 보스는 바로 황제였다.

 

만일 국가와 국민의 각도에서 보자면, 양자는 모두 긍정적인 자들이 아니다. 당쟁 자체는 바로 조정의 기강을 흐트리는 것이다. 소규모의 무리가 함께 모여서 무슨 국가대계를 논의한 것도 아니고, 그저 이익이 일치하는 한 무리가 서로를 이용한 것일 뿐이다. 비록 동림당이 외친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천하를 품는 것이지만, 그들과 엄당은 국가에 무슨 실질적인 공헌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라 조정대신이 생각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짜내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것이라면 이 관료계통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