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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 말기에 왜 매국노가 많이 나왔을까?

by 중은우시 2015. 6. 16.

글: 이치아(李治亞)


매국노는 사람들이 모두 침을 밷는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매국노가 되기를 꺼리지 않는다. 중국역사상 매국노가 가장 많이 배출된 시기는 명나라이다. 명나라말기, 오삼계는 위홍안충관일노(爲紅顔沖冠一怒)하여 매국노가 나라를 망치는 선례를 열었다. 이때부터, 매국노가 된 자들이 수도없이 만힝 나온다. 유양신(劉良臣), 유택홍(劉澤洪), 손정료(孫定遼), 공유덕(孔有德), 왕오구(王鰲久), 왕정지(王正志), 서일범(徐一範), 서용(徐勇), 학효충(郝效忠), 마득공(馬得功), 이영방(李永芳), 맹교방(孟喬芳), 장존인(張存仁).....명단은 너무 길다. 다 쓸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명나라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이 매국노로 되었을까? 설마 그들에게는 염치가 없었단 말인가?


기실 이는 주로 당시의 사회제도때문이었다:


첫째, 당시 사람들은 정부에 애정이랄 것이 없었다. 명나라정부는 독서인(문인)을 멸시했다. 대명황제는 자주 관리들에게 조정에서 곤장을 쳤다. 어떤 관리이건, 아무리 학식이 많건 이런 굴욕을 피할 수 없었따. 명나라의 일부 관리들이 정부에 관심없고, 은사로 자처하고, 대자연의 풍화설월을 도야하게 만들었다.


둘째, 명성조는 일찌기 건문제시기의 독서인 방효유를 죽였다. 그는 독서종자(讀書種子)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방효유에게 자신의 등극조서를 초안하도록 하기 위하여 악독하게 마음먹고 만일 쓰지 않으면 구족을 멸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방효유는 십족을 멸한다고 하더라도 못한다고 말한다.


셋째, 명나라의 재정위기가 날로 위중해져 갔다. 정덕제이후, 토지가 고도로 집중되고, 대지주들이 부세를 숨기고 납부하지 않아서, 명정부의 재정수입은 갈수록 줄어든다. 이와 동시에, 봉건왕조의 비용지출은 갈수록 늘었다. 가정제 말기, 황족은 28,492명에 달한다. 당시 전국이 전부로 북경으로 보내지는 쌀은 400만석이었는데, 종번의 세록이 853석에 달했다. 세수는 봉록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 황실은 사치하고 쓸데없는 관리들이 많았다. 가정제때 매년 재정적자가 많을 때는 400만냥에 달하고 적을 때는 100여만냥에 이른다. 1567년(융경원년), 태창은은 겨우 135만냥이 남아서 겨우 3개월치 소요금액에 불과했다. 승려는 많고 죽은 적은 꼴이다. 관리와 백성의 생활이 크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었다.


넷째, 명나라는 특무제도가 비교적 보편화되어 있었다. 관리들이 집에서 하는 일을 조정은 분명하게 잘 알고 있었다. 대신들은 다음 날의 생활에 조마조마해하다보니 자연히 수신양생은 생각할 수 없었다. 명나라의 삼창일위(三廠一衛)는 모두 악명이 자자했다. 금의위가 사람을 붙잡아 가는 데에는 전혀 제지가 없었다. 만일 반항하면 바로 죽여버렸다. 금의위가 거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형부이든 대리시이건 금의위만 보면 모두 피하고 멀리했다. 대신 송렴이 손님과 술을 마시는데, 황제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게 한다. 다음 날, 황제는 송렴에게 어제 저녁 술을 마셨는지, 좌중의 손님은 누구인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물어본다. 송렴은 하나하나 사실대로 대답한다. 황제는 웃으며 말한다: "확실히 그랬다. 너는 나를 속이지 않는구나." 송렴은 놀라서 모골이 송연했다. 송렴이 어떤 사람인가. 명나라개국공신중 으뜸이다. 그런데도 이런 대우를 받았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떠했을지 충분히 예상이 될 것이다.


다섯째, 명나라의 문무관리중 어떤 사람은 충성심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조정은 이를 몰랐다. 민족영웅 원숭환은 청나라와 여러해동안 싸웠지만, 황제에 의하여 서시에서 처형당한다. 진상을 모르는 경성의 백성은 원숭환을 이를 갈며 미워했다. "망나니가 살을 한 점 베어내면, 백성들이 돈을 내고 가져가서 생채로 먹었다. 순식간에 고기는 다 팔렸다. 다시 가슴을 열고 오장을 꺼내서, 마디로 잘라서 판다. 백성은 사서 소주와 함께 생 것으로 먹는다. 피가 이빨과 턱에 흘렀다." 이렇게 하다보니 많은 최전선의 장병들은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절개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었다.


여섯째, 청나라전기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청나라 황제는 독서인을 아주 중시한다. 예를 들어 범문정 등이 모두 조정의 중용을 받는다. 홍승주, 조대수같은 투항해온 장수들도 청나라황제의 예우를 받는다. 인생에서 실의하면 남북이 없고, 독서인은 변통에 능하다. 자연히 좋은 신하는 주인을 골라서 일을 한다. 그래서 민족대의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