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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누가 고구마를 처음 중국에 도입하였는가?

by 중은우시 2014. 10. 24.

글: 이개주(李開周)

 

고구마는 현대중국어에서 홍서(紅薯), 번서(番薯), 감저(甘藷), 주서(朱薯), 금서(金薯), 홍우(紅芋), 홍초(紅苕), 번갈(番葛), 산우(山芋), 지과(地瓜), 지단(地蛋)라고 한다...부르는 명칭이 십여개나 된다.

 

고구마는 보통의 경류(莖類) 식재료이다. 이렇게 별칭이 많은 이유는, 바로 재배하는 면적이 너무 넓은 탓일 것이다. 해남에서 동북까지, 강소절강에서 감숙까지 어느 성이든 모두 고구마를 볼 수 있다. 심는 지역은 거의 모든 방언지역을 포함하고, 서로 다른 방언지역에서는 서로 다른 방언으로 그것을 부른다. 그래서 고구마는 그렇게 많은 별명을 갖게 된 것이다.

 

기실 그것은 중국에서의 재배역사가 그다지 길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북방의 일부 성에서는 고구마가 완전히 새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85년, 건륭제는 군기대신에게 말한다: 하남은 최근 들어 연이어 큰 가뭄이 들었다. 농민들은 물이 부족하여 낱알 한톨도 거두지 못하고 이재민이 온 천지에 널려 있으며 굶어죽은 시신이 들판에 널려 있다. 이는 짐의 죄과이다. 또한 너희 군기대신의 죄과이다. 내가 듣기로 복건 쪽에는 번서라는 것이 많이 생산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가뭄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하남에도 보급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만일 보급이 성공하면, 아마도 하남의 백성들에게는 구명식량이 될 것이고, 그곳의 재난상황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복건순무에게 명을 내려, 그에게 번서의 씨앗을 사람을 시켜 급히 하남으로 운송하여 하남순무에게 넘겨주어 민간에 나눠주도록 시켰다..."(<건륭실록>권1232)

 

건륭의 이 말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2백년전, 하남에서 아무도 고구마를 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드물게 심었을 것이고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구마의 섬서(陝西)에서의 역사는 더욱 짧다.

 

건국후에 편찬된 <섬서성지>의 묘사에 따르면, 고구마는 건륭연간에 섬서남부로 도입된다. 가경연간에는 위남에 도입되었지만, 이때까지는 별로 심어지지 않았다. 신중국이 성립될 때 섬서성의 90%의 농민은 고구마를 들어본 적이 없다. 1950년대, 양식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구마는 비로소 위에서 아래로 정부에 의하여 정식으로 보급된다. 그 후에 신속히 섬서의 전체 성으로 확산되었다.

 

고대문헌을 뒤져보면, 명나라이전의 중국에는 고구마가 없었다.

 

도곡(陶穀)의 <청이록>이는 이런 기록이 있다: 광동의 산간지역에 야생서(野生薯)가 있는데, 무게가 수십근에 달한다. 맛은 아주 좋고, 현지 주민들은 이를 먹는다. 그러나 이런 '서'는 고구마가 아니다. 대현 산우(山芋)이다.

 

오대십국시대, 촉국의 군주 맹창(孟昶)은 매월 초하루 채식을 했다. 매번 채식을 먹을 때만 반드시 한 그릇의 서약(薯葯)을 먹었다. 그가 먹은 서약은 고구마가 아니라 산약(山葯)이다. 

 

<서유기>에는 당승 사제의 서천취경을 묘사한다. 서량여국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큰 식탁에 풍성한 채식요리가 놓이는데, 먹을 것으로는 증병(蒸餠), 당고(糖糕), 버섯, 향심(香蕈), 순아(筍芽), 목이(木耳), 황화채(黃花菜), 석화채(石花菜), 자채(紫菜), 만청(蔓菁), 나복(蘿菔, 무), 황정(黃精), 우두(芋頭), 산약(山葯)이 있는데, 고구마는 없다.

 

명나라이전에 출판된 지방지와 지방지 비슷한 저작들 에를 들어, <함순임안지>, <순희삼산지>, <보경운양지>, <영외대답>, <영표녹이>등등의 문헌에도 고구마에 관한 기록은 없다.

 

고추, 옥수수, 감자, 담배, 땅콩등의 작물과 마찬가지로, 고구마는 중국의 토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미주대륙에서 왔고, 컬럼비아의 대항해이후에 발견된 새로운 작물이다.

 

컬럼부스는 15세기말 미주대륙을 발견한다. 그후 유럽식민자들은 미주를 그들의 식민지로 삼는다. 미주의 고구마는 이로 인하여 식민자들의 발걸음을 따라 유럽, 동남아, 일본과 중국으로 전해진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식민자들은 여송도(呂宋島) 지금의 필리핀으로 들어간다. 한편으로 현지의 물산을 약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여송도는 무역중개지로 중국과 통상을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고구마를 널리 심는다. 개략 1570년을 전후하여, 고구마는 이미 여송에 널리 보급되어 온산 온들판에 고구마줄기가 보인다. 토착민들은 땅에서 이를 캐서 식량의 부족분을 메웠다.

 

중국은 여송과 무역한지 오래 되었다. 남송, 원나라, 명나라전기에 중국의 상선은 여송과 중국연해의 각 항구 사이를 오갔다. 일부 상인들은 여송에 정착해서 일가를 이루고 사업을 하며 자녀를 낳았다. 현재 말하는 화교이다.

 

화교는 여송도에서 고구마의 우월성을 알아본다. 가뭄을 견디고, 척박한 땅에도 자라며, 쉽게 옮겨심을 수 있고, 쉽게 번식하며, 영양은 풍부하고 맛은 달고 좋다. 그래서 화교들은 고구마를 중국으로 가져온다.

 

고구마가 중국에 전래된 데 대하여는 널리 알려진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복건성 복주부 장락현에 진진룡(陳振龍)이라는 선비가 있는데 과거에 불합격한 후 장사로 방향을 바꾼다. 복건과 여송을 오가면서 무역을 했고, 예전에 여송에 정착하여 산 적도 있다.

 

진진룡은 여송에서 고구마가 '어디에 심든 잘 자란다'는 것을 발견한다. 고구마줄기에서 몇 자의 줄기를 잘라서 짧게 자른 후, 그것을 가지고 복건으로 돌아가려 했다. 당시 여송을 통치하던 스페인 식민자들은 고구마수출을 금지했다. 중국상인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진진룡은 아이디어를 내서 그는 고구마줄기를 밧줄 속에 넣어서 꼬았고, 그렇게 하여 스페인인들의 관문을 통과한다. 7일 밤낮의 항해를 거쳐 마침내 고구마를 중국으로 가져간다. 이 해가 바로 만력21년, 즉 1593년이다.

 

귀국후, 진진룡은 자기 집 주위의 빈터에 고구마를 십는다. 성공한 후 복건순무 아문에 보고를 하고 고구마의 좋은 습성과 재배방법을 알려주며, 관청에서 이를 보급해달라고 한다. 지방관리는 진진룡의 선행을 표항하고 널리 보급한다. 이렇게 하여 중국에서 고구마는 뿌리를 내린다.

 

이 전설은 진진룡의 후손이 편찬한 <금서전습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고구마의 전래와 보급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 사실일 것이다.

 

다만, 복건에서 온 진진룡이 고구마를 도입한 첫번째 인물이 아닐 수 있다.

 

가정연간에 책으로 만들어진 <광동통지> 물산부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광동에 서류의 식물은 홍서(紅薯), 감저(甘藷), 첨서(甛薯)와 산서(山薯)가 있다고 했다. 당시에 홍서는 현재의 홍서 즉 고구마가 아니다. 다만 감저는 아마도 지금의 고구마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광동통지>는 1558년에 책으로 만들어 진다. 만일 이 책에서 말하는 감저가 확실히 고구마를 가리킨다면, 복건인 진진룡은 1593년에 여송에서 복건으로 고구마를 도입하기 전의 일이다. 이를 보면 광동인들은 이미 고구마를 심고 있었던 것이다.

 

선통연간에 만들어진 <동관현지>의 물산부문에는 더욱 상세한 기록이 있다. 일찌기 만력8년, 즉 1580년, 진익(陳益)이라는 동관의 무역상인이 번서(番薯) 즉 고구마를 국내에 도입했다고 적고 있다.

 

만일 <동관현지>가 비교적 늦게 만들어 졌다면 나중에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명나라때 사학가인 소염(蘇琰)은 <주서송>에서 이런 말을 적고 있다: "갑신,을유연간(만력12년에서 만력13년)에 장주, 호주의 사이에 섬이 있는데 남오라고 한다. 복건 천주의 무역상인인 온릉은 남오도에서 잠시 쉬다가 고구마를 발견하고 이를 진강현 영수향으로 가져가 서 십고 이웃 마을에도 보급하다. 나중에 만력22년과 만력23년에 천주에서 가뭄이 일어 양식이 부족했는데 고구마만은 많이 생산된다. 천주의 열명중 칠,팔명은 고구마를 먹으면서 이 재해를 견딘다."

 

만력12년은 즉 1584년이고, 만력13년은 1585년이다. 소염의 기록에 따르면, 1584년 연말과 1585년 연초에 천주의 상인이 남오도에서 고구마를 도입했다는데, 이 시기는 여전히 진진룡이 여송에서 고구마를 도입한 때보다 8,9년이 빠르다.

 

그외에 우리는 알고 있다. 남오도는 이전에 광동, 복건으로 나뉘어 귀속되어 있었고, 현재는 광동에 귀속되어 있다. 천주의 무역상인이 1584년과 1585년 사이에 남오도에서 고구마를 발견했다는데, 이는 광동주민이 고구마를 도입한 시기는 그보다 이르다는 것이다. 이를 가지고 추론해보면, <동관현지>에 동관무역상인 진익이 일찌기 1580년 여송에서 고구마를 도입하였다는 기록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존 문헌으로 보면, 고구마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시간은 전설에 나오는 것같이 1593년이 아니라, 1580년이라는 것이다. 최초에 고구마를 도입한 대공신도 복건사람 진진룡이 아니라 광동사람 진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