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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명나라말기 동림당(東林黨)은 국가를 위하여 무슨 일을 했는가?

by 중은우시 2016. 4. 9.

글: 정만군(程萬軍)


천계원년부터 천계4년까지는 동림당의 휘황했던 시절이다. 명사(明史)에는 이 시기를 묘사하는데 네 글자를 썼다: 동림독성(東林獨盛). 이때 명나라의 정계, 내각, 중앙6부등 핵심부서는 모조리 동림당인들이 차지했다. 명실상부한 "동림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동림당은 야당에서 여당이 되기까지 17년의 시간을 들였다. 이 분투기는 짧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긴 것도 아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동림당은 당(黨)이 아니라고. 심지어 엄격한 의미에서의 '단체'라고도 할 수 없다고. 일본학자인 성정융지(城井隆智)는 일찌기 통계를 내서, 묘당전쟁(廟堂戰爭)때 동림당을 따른 관리들중 개략 5분의 1이 동림서원(東林書院) 출신이다. 이는 동림당이 묘당전쟁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우세의 근원이 '당'이 아리나는 말이다. 그렇가면 우세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여론, 도리.

후인들이 동림당을 평가할 때, 일부 사람들은 그들을 당쟁집단과 동일시 한다. 동림당인들이 참가한 당쟁을 권력투쟁으로 본다. 만일 초기의 동림당을 이렇게 본다면 그것은 너무나 용속화(庸俗化)한 것이다. 동림당에도 이익,권력을 추구하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동림당은 신앙집단이다. 유가를 굳건한 신앙으로 했다. 그들의 당쟁은 권력투쟁이면서 신앙투쟁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도덕의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묘당전쟁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림독성'시대에 동림대신들은 어떤 정치적 업적을 냈는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동림당은 대명의 정계에서 당쟁에 열중하고, 자신과 생각이 같은 자들을 모으고, 생각이 다른 자들을 배제하는 외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상, 천계원년부터 천계4년까지, 이 4년의 동림당이 가장 휘황했던 시기에, 우국우민의 동림당인은 정치적으로 4가지 큰 일을 해낸다.


그렇다면, 어떤 네 가지 큰 일인가. 첫번째 큰 일은 바로 언론개방이다.

동림당의 첫번째 정치적 주장은 바로 언론개방이었다. 일찌기 만력연간에, 고헌성(顧憲成)은 "개언로(開言路)"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권력을 잡은 후에 동림내각은 선명한 기치를 내걸고 언론개방을 추진한다. 동림당인은 대부분 언관 출신이므로, 그들은 언로를 여는데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동림당인들이 전면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명나라의 언로는 관료들에게만 개방되어 있었다. 주로 언관의 언론을 보장하는 것이다. 다만, 동림당이 집권한 후, 언로개방은 전국범위로 늘어나고, 관료에서 백성에게로 넓혀갔다.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언관만이 아니고, 조정의 관료만이 아니고, 재야에 있는 서민도 포함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고, 정치를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개언로"로 동림당인들이 전국백성의 정치에 대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전국민의 "의정붐(議政熱)"이 일어난다. 동시에 의정붐은 또 다른 붐 독서붐도 불러온다.

사서의 묘사에 따르면, 천계원년 즉 1621년, 동림서원은 17번째 추회(秋會)를 맞이한다. 이전의 동림 추회는 기껏해야 수백명이 와서 강연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규모가 사상유례없이 많았다. 참가한 학자는 오호사해에서 수천수만이 몰려왔다. 그리고 오지 않은 학자들도 동림서원을 본받아 각지에서 독서, 강학열풍을 일으켰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동림당의 집권은 전국적으로 독서붐을 불러일으킨다. 동림당인은 하나하나가 모두 학문이 깊은 지식부자이다. 그들이 집권을 하니 사람들은 지식과 문화에 대한 갈구가 심화된다. 글을 잘 읽어야 비로소 관직에 나갈 수 있고, 인생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서생은 정치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인과 책바보는 다르다. 책바보는 정치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가 있으면, 분명 문화가 없는 사람보다는 자질이 좋다. 이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언론개방은 의정붐을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동림당인들이 이룬 첫번째 큰 일이다.


그렇다면, 두번째 큰 일은 무엇인가?

관료사회를 정돈한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명나라 중,후반의 관료사회는 부패가 심했다. 매관매직은 이미 반공개화되었다. 명나라의 백화소설 <성세인연전>은 당시 매관매직에 대하여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사효라는 늙은 수재가 있었다. 그는 관직에 나가고 싶어했으나 과거에 계속 낙방했다. 그래서 3천냥 은자를 모아, 지부 관직을 얻고자 한다. 처음에 늙은 수재는 돈이 아까워서 2천냥은자만 가지고, 중간사람을 통하여 두 명의 중요인물에게 뇌물을 바친다. 그러나. 중요인물은 2천냥은자를 돌려주며 말한다; "이건 5천냥짜리 자리이다." 최서 3천냥이다. 어쩔 수 없이 조사효는 다시 천냥을 꺼내서 모조리 바친다. 그렇게 하여 원하는대로 관직을 얻는다.

이것은 백화소설이다. 명나라관료사회의 거래를 더 이상 자세히 묘사할 수 없다. 명나라의 모든 관직은 암중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이런 인사부패는 동림당 집권시기에 통제된다. 조직인사임명권을 장악한 동림당인은 간부선발의 첫번째 표준을 청렴(淸廉)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고반룡(高攀龍)과 양련(楊漣)같은 사람들은 모두 청백리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탐관오리를 뼛속깊이 미워한다. 명나라에서 간부를 고찰하는 것에는 "외찰(外察)"과 "경찰(京察)"의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즉 중앙순시조가 지방을 순시하며 조사하는 것과 관리가 북경으로 와서 직무수행보고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고찰방식은 동림당시기에 가장 엄격하게 집행된다. 관리가 일단 품덕(品德)고찰에서 불합격하면 파면되고 평생 다시 기용되지 못한다.


세번째 큰일은 공상업을 보호한 것으로 상인의 지위를 제고한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중국역대왕조는 모두 중농경상 즉,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경시했다는 것을. 상인의 지위는 아주 낮았다. 명나라초기 주원장은 이런 규정을 내놓는다. 상인은 돈이 있더라도 농민보다 잘 입을 수 없다. 거친 베로만든 옷을 입어야 한다. 다만 이런 국면은 명나라말기에 이르러 바뀌게 된다. 동림당의 원로이자 이부상서인 조남성(趙南星)은 명확히 얘기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생인의 본업이다(生人之本業)" 즉, 공상업과 농업은 모두 국민생계에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들은 공상호에게 세금부담을 가중시키는데 반대하고 황제에게 "애상휼민(愛商恤民)"할 것을 요구한다.

동림당의 상인보호조치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개인적인 이익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자기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들은 강소절강의 공상지주집단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하나의 정책이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데 '주심론(誅心論)"을 써서는 안되고, 그것의 큰 방향을 보아야 한다고 본다. 실사구시적으로 말해서, 동림당이 상인을 보호한 것은 객관적으로 근대중국자본주의의 맹아를 촉진시켰고, 큰 방향은 진보적이었따.

이것이 동림당이 한 세번째 큰 일이다.


그리고 네번째 큰 일이 있는데, 가장 중요하다. 즉 동림당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격탁양청(激濁揚淸), 즉 혼탁한 것을 없애고 청렴한 것을 키웠다. 사회도덕의 기풍을 바로잡은 것이다.

천계시기의 대명은 이미 병이 뼛속까지 파고 들었다. 국가의 도의는 땅에 떨어지고, 도덕은 무너졌다. 비록 치국의 도리에서 동림당인들은 장거정과 같은 개혁이나 변법도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도덕과 절개에서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더라도 초기 동림당인들은 정인군자라 할 수 있다.

집정기간동안 동림당인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솔선수범했고, 도덕이 무너진 대명에 정풍(政風)과 세풍(世風)에서 회춘현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여러분들은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가정(嘉靖)연간에 저명한 청백리가 있었다. 해서(海瑞). 양련등 동림당인들의 행위는 선배인 해서와 비교해도 전혀 못하지 않았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해서는 고행승(苦行僧)이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苦)?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그가 입은 것은 포포(布袍), 즉 베로 만든 옷이고, 먹는 것은 거친 쌀이었다. 한번도 부정부패를 한 적이 없고, 공금으로 주식투자를 하지도 않았다. 야채도 거리에서 사질 못하고, 하인들이 집에서 심어 길렀다. 오랫동안 고개를 먹지 못해서 한번은 모친의 생일이었는데, 그가 마침내 거리에서 고기 두 근을 샀다. 그때 정육점주인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십년만에 한번 생길 일이다. 내가 평생 해대인의 돈을 다 벌어보다니.

양련을 대표로 하는 동림당의 중견역량은 선배인 해서보다 더욱 청고(淸苦)하게 보낸다.

명나라때의 학자 오응기(吳應)는 <누산당집(樓山堂集)>에서 양련이 북경중앙정부 관료가 된 후의 집안형편을 이렇게 묘사했다:

"(양)련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가도사벽(家徒四壁) 즉 집안에 아무 엇도 없고, 양수청풍(兩袖淸風)했다. 모친을 고향인 호남으로 내려보내고자 해도, 그럴듯한 옷을 갖추어줄 수가 없었다. 언관으로 있으면서 양청격탁하여 사람들이 보내온 선물을 모조리 거절하고, 한소지풍(寒素之風)으로 여전히 집안에는 돈되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좌광두(左光斗)등의 처지도 양련과 대동소이했다. 관료로서 청렴했다.


묘당의 피비린내 속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양련등 동림육군자는 중국십자군의 선봉기사임에 분명하다. 1604년에 동림서원이 성립되고, 1621년 천계원년에 동림당이 대명의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17년간의 분투로 그들은 마침내 구세주가 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어떻게 세상을 구할 것인가? 육군자의 회답은 스스로 몸으로 실천해서 도덕적인 모범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선배 고헌성과 해서와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충실한 유가의 신도이다. 그들은 도덕의 역량이 무궁하다고 믿었다. 유학은 천지간에 불변하는 진리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유가도덕학설에 따라 자신에 엄격하면 사회기풍은 정화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들의 이런 생각은 같은 조정의 봉건노관료들이 보기에 너무 천진했다. "연극에 너무 깊이 빠졌다" "가짜 연극은 진짜로 하는 것"이다. 동림육군자는 그러나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했다.

인정해야 할 것은 도덕적 품격에 있어서 동림당인들은 확실히 역사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이에 대하여 당시 사회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동림열전>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비록 어린아이, 오인, 부인, 여자들도 모두 동림당인들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사 시정의 잡상인도 싸울때 이런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네가 동림의 현자이냐. 어떻게 그렇게 청백할 수 있느냐?"

남녀노소는 모두 동림당인들 중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시민들이 싸울 때도 동림당인을 예로 들었다. "네가 동림당이냐> 그렇게 청백하냐?"

동림당인들이 해낸 네 가지 큰 일은 네 글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정본청원(正本淸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