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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순유(荀攸): 관도지전의 막후공신

by 중은우시 2016. 1. 31.

글: 복녕객(福寧客)


관도(官渡)지전은 동한말기 '삼대전투'중 하나이다. 또한 중국역사상 저명한 '이약승강(以弱勝强)'의 전투중 하나이다. 동한 헌제 건안5년(200년), 조조군과 원소군이 관도(지금의 하남성 중모 동북)에서 서로 대치하면서 전략적인 결전을 전개하였다. 조조는 원소군의 오소(烏巢, 하남성 봉구 서쪽)에 있는 양창(糧倉)을 기습하고 이어서 원소군의 주력을 궤멸시킨다. 이 전투는 조조의 중국북방통일의 기초를 닦아준다. 조조가 원소에게 완승을 거두도록 한 최대의 공신은 바로 순유이다. 순유는 관도지전에서 몇가지 큰 공을 세운다.


순유의 관도지전에서의 첫번째 대공(大功):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구하고, 계책을 써서 안량(顔良)을 참하다.


건안5년, 즉 200년, 이월, 원소는 곽도(郭圖), 순우경(淳于瓊), 안량(顔良)을 보내어 백마에서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을 공격한다. 사월, 조조는 친히 백마로 가서 유연을 구한다. 순유는 군사(軍師)의 신분으로 따라간다.


이때, 순유는 분석하여 말한다: "지금 우리 군은 병력이 적어 적군과 마주 싸우기 곤란합니다. 반드시 적군의 세력을 나누어야 합니다. 주공은 연진으로 가서 거짓으로 병마를 데리고 강을 건너 적군을 서쪽에서 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반드시 병력을 둘로 나누어 서쪽에서 응전할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군은 정예병으로 백마를 기습하면, 안량을 반드시 붙잡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계책대로 행하니 과연 순유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원소는 조조가 서쪽으로 강을 건넌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병력을 나누어 서쪽으로 보낸다. 조조는 그리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백마를 취하러 간다. 백마에서 십여리 떨어진 곳까지 갔을 때, 안량은 비로소 조조의 군대가 도착하는 것을 알게 되고, 크게 놀라서 급히 전투를 준비한다. 역사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조는 장료, 관우를 시켜 오르게 하여, 격파하고 안량을 참했다."


순유의 관도지전에서의 두번째 대공: 서두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게 군심을 안정시키고, 군수물자를 묘하게 버리면서 문추를 참한다.


조조는 기계(奇計)를 써서 백마를 얻고 안량을 참한다. 원소는 놀라면서 분노하여 친히 군대를 이끌고 조조와 싸우러 나선다. 당시 원소의 병력을 많고 강했다. 조조는 병력이 적어서 맞서싸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백마를 얻으면서 획득한 물자를 가지고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간다.


원소는 분노하여 끝까지 추적한다. 조조군의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조조에게 물자를 포기하여, 적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한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권했다: "마땅히 먼저 물자를 버리고, 우리는 정예기병을 이끌고 주공을 보호하여 군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저 순유만이 이렇게 말한다: "그건 좋지 않다. 지금이 바로 적을 붙잡을 때이다. 어찌 도망간단 말인가." 역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조조는 순유의 이 말을 듣자, 순유를 눈으로 보면서 웃었다고. 이는 아마도 찬탄하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조조는 순유군사의 계책을 써서 여러 장수들에게 말에서 내려 들판에 숨도록 하고, 물자는 도로에 놓아두었다. 조금 있다가 원소군의 대장 문추(文醜)와 유비(劉備)가 5,6천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기병은 온 들판에서 물자를 나눠갖는다. 순유가 말한다: 공격할 때가 되었습니다. 조조군의 기병은 모두 말에 올라탔다. 당시 조조군의 기병은 600명이 되지 않았는데, 뛰쳐나가 공격하여 원소의 기병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했다.


안량, 문추는 원래 하북의 명장인데, 이 두 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모조리 목이 베인다. 역사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원소군의 사기가 꺽였다."


순유의 관도지전에서의 세번째 대공: 혜안이 빛나서 허유(許攸)가 투항하러 온 것이 진짜이고 거짓이 아님을 알아내다.


건안5년, 십월. 허유는 원소를 배반하고 조조에 투항한다. (본문은 순유군사에 관하여 쓰는 것이므로, 허유가 조조에 투항한 원인은 상술하지 않겠다)


허유가 원소를 배반하고 조조에 투항한 것은 전체 관도지전에서 하나의 관건이다. 그중 가장 관건적인 포인트는 허유가 조조집단에 가져온 원소군에 관한 중요한 군사정보 하나이다. 즉, "원소는 이미 순우경에게 만여명을 이끌고 군량미를 운송하도록 보냈고, 오소에 주둔하고 있다. 장군은 교만하고 병사들은 게으르니, 공격하는 것이 좋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좋은 기회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전장에서 순식간에 변화가 많다. 기회를 잃어서는 안되고, 잃으면 다시 오지 않는다.


전투기회를 놓치면 적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 될 뿐아니라, 아군에게도 잔인하다. 중요한 전투기회를 하나 잃은 것때문에 전체 전투의 승리를 잃은 사례는 수두룩하게 많다.


특히, 당시 병세가 비교적 약했던 조조의 편에서 보자면 더더욱 기회란 기회는 모두 붙잡아야 했다. 특히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가져온 이 중요한 군사정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허유가 가져온 "원소는 이미 순우경에게 만여명을 이끌고 군량미를 운송하도록 보냈고, 오소에 주둔하고 있다. 장군은 교만하고 병사들은 게으르니, 공격하는 것이 좋다!"는 이 유혹적인 군사정보에 대하여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조군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의심했다"고 한다. 즉 허유가 투항하러 온 것이 진실인것인지, 그리고 가져온 이 군사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었다.


오로지 순유와 가후(賈詡) 두 사람은 허유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조조에게 오소를 기습하도록 권한다. 조조도 믿는다.


나중에 일어난 일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조조는 순유와 조홍(曹洪)을 남겨서 군영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보병,기병 5천을 이끌고 간다. 말의 입을 가리고, 보병은 장작을 안고 밤을 새워 오소를 급습한다. 순우경은 날이 밝을 때 어지러운 가운데 참살당한다. 오소에서 큰 불꽃이 올라가면서 조조는 전체 관도전투에서 가장 관건적인 중대승리를 취득한 것이다.


순유의 뒷 이야기도 있다. 건안8년, 조조가 남쪽의 유표를 정벌하고자 할 때, 원수의 두 아들 원담, 원상이 기주에서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조조는 하북을 평정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남쪽으로 유표를 정벌할 것인지 아니면 북쪽으로 기주를 평정할 것인지의 문제를 앞에 놓고, 조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어본다. 신하들중 다수는 유표가 강하다는 이유로 먼저 평정하자고 한다. 그리고 원담, 원상은 걱정할 게 없다고 하였다. 눈앞의 시급한 문제는 먼저 유표를 평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기주를 공격하였다가 유표가 뒤에서 기습하면 큰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오로지 순유만이 시세를 분명하게 보고 있었다. 그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한다: "천하에 일이 있을 때도 유표는 강,한의 사이에 앉아서 있었다. 이를 보면 그는 사방을 경략할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만일 기주를 토벌하면, 유표가 후방에서 공격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것이다.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따라, 북으로 기주를 정벌한다. 건안9년 칠월, 원상을 대파하고, 팔월, 심배(審配)를 업에서 참한다. 건안10년 정월, 원담을 남피에서 참한다.


기주를 평정하고, 조조는 한헌제에게 글을 올려 순유를 칭찬한다: "군사 순유는 신을 보좌하기 시작하면서 전투때마다 계속 따라다녔고, 전후로 적을 이긴 것은 모두 순유의 계책입니다." 그 뜻은 승리한 전투는 모두 순유의 공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순유를 능수정후(陵樹亭侯)에 봉한다.


건안12년, 식읍 칠백을 늘여주고, 중군사(中軍師)로 삼는다. 위나라를 만들면서, 순유는 상서령이 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칭찬했다: "순영군지인(荀令君之仁), 순군사지지(荀軍師之智). 그는 근세의 대현군자(大賢君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