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시습사사(時拾史事)
동탁의 난정(亂政)으로 거의 국가가 무너질 뻔했다. 초평3년(192년) 사월 이십삼일, 사도 왕윤은 여포(呂布), 사손서(士孫瑞) 등과 공모하여 동탁(董卓)을 죽이고, 한왕조의 정권을 빼앗아 오고, 왕윤이 조정을 주재하기 시작한다.
동탁이 죽자 동한의 각 세력은 서로 다른 상태에 처해진다. 마치 과녁과 같다.
골드색의 과녁중심은 중앙정부가 있는 장안(長安)이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지방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고, 왕윤과 여포가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위기가 사방에 널려 있고, 누구든지 화살을 쏘아 쓰러뜨릴 수 있다.
중심 바깥의 첫번째 써클은 양주군(凉州軍)이다. 돌연 여왕벌을 잃은 일벌들 같이, 그 자리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계속 거기에 남아 있어야할지 아니면 딴 곳으로 날아가야할지를 모르는 상태였다.
중심 바깥의 두번째 써클은 동탁토벌연합군과 지방에 할거하는 제후들이다. 그들은 멀리서 중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윤은 병주(幷州, 산서성 태원) 사람이다. 그는 주급(州級) 관리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악을 제거하고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덕과 재능이 출중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왕좌재야(王佐才也, 왕을 보좌할 인재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왕윤은 19살때 군리(郡吏)가 된다. 지방에서 횡행하고 나쁜 짓을 하던 어린 환관 조진(趙津)을 붙잡아 넣고, 매관매직하던 태수(太守) 왕구(王球)를 면전에서 공박하며, 황제에게 당시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던 태감 장양(張讓)이 황건적과 결탁했다고 상소를 올렸다. 왕윤이 보기에 모든 일은 기준에 맞아야 했고, 충군애국이 바로 그 기준이었다. 너, 장양이 황제의 부친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시비곡직을 따지겠다는 식이다. 이 일로 왕윤은 천하에 명성을 떨친다. 조정의 삼공(三公)들까지 나서서 그를 비호한다. 이를 보면 왕윤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충성스러우며, 인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한때는 환관이 권력을 잡기도 하고, 외척이 정권을 농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탁이 들어와 군인이 권력을 잡았다. 이미 오랫동안 정상적인 관리가 CEO의 자리에 앉지를 못한 것이다. 그래서, 왕윤과 같이 인품이 훌륭하고 능력도있는 사람이 조정을 주재하게 되니 조정의 상하에서는 모두 그를 인정한다. 왕윤의 편에 있는 사람들이 지지할 뿐아니라, 그의 적들까지도 왕윤을 받아들였다. 왕윤의 측에는 황제가 있고, 정의의 화신이다. 그러다보니, 동탁이 죽었을 때도 그들은 스스로를 처분대상으로 여기고 가만히 조정의 처분을 기다린다.
동탁이 돌연 피살된 후, 그의 부하 5명의 서량군 주력중에서 3명은 한나라조정에 귀순하고 2명은 죽었다. 서량군의 현상은 죽을 사람은 죽고, 투항할 사람은 투항한 것이다고 할 수 있다.
왕윤은 이런 지리멸렬해진 군대를 놓고 국면을 안정시키는 것이 국면을 교란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러나 왕윤은 더 어려운 것을 선택한다. 어떤 사람은 왕윤이 교만해서라고 한다. 아마도 그런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 그것이 핵심요소는 아니다. 사월 이십삼일 동탁을 암살한 때로부터 육월 초하루 왕윤이 체포되기까지, 모두 사십일(이 기간에는 윤달이 없다)에 불과하여 그가 교만해져서 실패하기에는 너무 짧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왕윤이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행위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경력을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서 왕윤의 성장궤적을 살펴보자, 그러면 왕윤이 어떻게 동탁암살특별행동팀의 팀장이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왕윤은 일생동안 3번 감옥에 들어간다. 그가 처음 감옥에 들어간 것은 개략 스물몇살 때의 일이다. 당시는 아직 군리였던 왕윤은 태원태수 왕구가 뇌물을 받고 관직을 시정잡배 노불(路佛)에게 팔아먹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왕윤은 면전에서 왕구를 질책했고, 왕구에 의하여 감옥에 갇혀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병주자사(幷州刺史) 사등성(史鄧盛)이 시비가 분명한 사람이어서 왕윤이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왕윤에게 자신의 별가(別駕)로 일해달라고 요청한다.
왕윤은 이렇게 하여 주급의 지방정부에 들어가게 된다.
왕윤은 나중에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지낸다. 그리고 동한의 마지막 두 명의 명장인 황보숭(皇甫嵩), 주준(朱儁)과 함께 현지의 황건적을 격패시킨다. 전장을 수습하다가 왕윤은 장양의 문객이 황건적과 결탁한 서신을 발견한다. 장양은 당시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던 세력의 대표이고, 황상과의 관계는 가족과 같았다. 한영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장상시(장양)는 나의 부친이다. 조상시(조충)는 나의 모친이다." 왕윤은 마음 속에 그저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만 있고, 개인의 안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결연하게 장양을 고발한다.
물론 왕윤의 고발로 장양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양에 의해 왕윤이 감옥을 간다. 그리고 사형을 받는다. 다행히 대사면을 받아서 석방될 수 있었다. 관직도 원직에 복직한다. 그러나, 겨우 10일이 지나서, 다시 장양에 의하여 태옥(太獄)에 갇힌다. 이를 보면 장양은 반드시 왕윤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정에서는 그를 구하려고 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모두 왕윤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고 권했다. 사태가 조금 완화되면 옆에서 알선해서 구해줄 수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두 여러가지 방법으로 왕윤을 설득하려 했다. 애절하게 간청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왕윤은 모두 거절한다.
하루는 왕윤이 정위(廷尉)로 가서 심문을 받는다. 감옥문을 나서서 죄수수레에 오르기 전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선다. 그는 사도 양사(楊賜)의 종사(從事)이다. 그는 소식을 듣고 왕윤이 사형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왕윤이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권하다가 말을 듣지 않으니, 아예 독주를 한 잔 왕윤에게 건네며 말한다: "대인, 당신이 이렇게 고집세고 강직하니 아예 이 독주를 마셔서 뜻을 분명히 하시지요." 왕윤은 독주가 든 잔을 받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원래 국가의 대신이다. 현재는 죄인이다. 이는 내가 국가의 법률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당연히 국법의 처벌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설사 사형일지라도.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만일 내가 스스로 독주를 마셔서 죽는다면, 국가의 법률이 집행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아니다." 말을 마치고, 독주를 땅 바닥에 쏟아버린다. 그리고 자신은 죄수수레를 타고 정위의 심문을 받으러 간다.
나중에 삼공이 계속하여 천자에게 말을 해서, 왕윤은 사형을 면한다. 다만 장양이 계속하여 그의 출옥을 막았다. 대사면령이 내릴 때도 왕윤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다음 해가 되어서야 왕윤은 석방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강직불아(剛直不阿)하고 질악여구(嫉惡如仇)하며, 충심위국(忠心爲國)하는 왕윤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인생처지는 그가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을 결정했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비록 그는 이미 성공하여 고위직에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동탁을 암살한 것이다. 옥쇄(玉碎)할지언정 와전(瓦全)을 구하지는 않는다.
왕윤은 타협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의 인생에서 두번 타협한 바 있다. 한번은 세번째로 감옥에서 나온 후 장양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한동안 이름을 감추고 살았던 것이다. 다른 한번은 동탁의 잔혹한 행위를 보면서 그는 계속 도광양회(韜光養晦)했다. 결국 그렇게 하여 동탁의 신임을 얻어낸다. 이를 보면 강대한 압력하에서는 왕윤도 타협을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윤이 만일 되돌아본다면 타협이 가져온 것이 모두 나쁜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동탁이 죽자, 왕윤에게는 더 이상 강대한 압력이 없었다.
왕윤의 정직은 조정을 발란반정(拔亂反正)시킨다. 조정의 안정은 정치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에는 정직을 필요로 하지 않고, 더욱 필요한 것은 타협이다. 각 방면과 타협하는 것이다.
왕윤은 비록 국가지도자가 되었지만, 적시에 조정하지 못하고 원래의 사고방식대로 채옹(蔡邕)을 죽인다. 채옹은 그저 동탁의 죽음에 탄식의 소리를 한번 내뱉었을 뿐이다.
채옹의 중국역사에서의 문화적 지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너무 높다. 대기층을 뚫고 올라갈 정도로 높다. 그는 딸 채문희(蔡文姬)를 낳았다. 그가 벽에 칠하는 솔로 쓴 글자까지도 일본에 가 있을 정도이다.
왕윤이 채옹을 죽이는 과정은 모두 알고 있을테니, 다시 말하지 않겠다. 왕윤은 채옹을 죽였다(비록 나중에 후회는 했지만), 그 결과는 아주 심각했다. 죽은 것은 채옹이지만, 잃은 것은 인심이다. 채옹은 고관이고, 왕윤은 조정동료관리들의 마음을 잃었다. 채옹은 사대부이고, 왕윤은 사대부의 마음을 잃었다. 채옹은 동탁을 탄식했다가 죽었다. 그래서 투신해오려던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다. 적을 팔백 죽이면서 자신은 일천을 잃었다. 손해본 것이다. 그가 죽인 것은 적이 아니라, 둘러싸고 있던 관중이기 때문이다.
왕윤은 아마도 잊었나보다. 채옹이 원래 동탁을 위하여 관직에 나갈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동탁이 채씨집안 삼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하여 비로소 관직을 맡았다는 것을. 왕윤은 아마도 잊었나보다. 채옹의 한 마디 탄식은 왕윤의 집에서 왕윤의 면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고 솔직한 것이라는 것을. 동탁은 확실히 채옹에게 잘 대해주었고, 3일동안 3번이나 관직을 승진시켜 주었다. 왕윤은 아마도 잊었나보다. 자신도 동탁에 빌붙은 세력안에 들어 있었고, 그래서 사도(司徒)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을.
동탁은 비록 죽었지만, 왕윤의 긴장한 신경은 즉시 풀어지지 못했다. 더욱 관심을 가진 것은 동탁잔당의 반응이었다. 이때 채옹이 반응한 것이고, 이런 반응에 왕윤이 자극을 받았다. 비록 채옹은 동탁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나가는 표정을 보여준 것일 뿐이지만.
차를 모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교통사고의 한 가지 유형에 조치부당이 있다. 운전사는 책임을 져야 한다. 예를 들어 고속으로 달리는 차량에서 타이어가 터지면, 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핸들을 꽉 잡아서 최대한 안전하게 정지시켜야 한다. 만일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아버린다면 아마도 차도 부서지고 사람도 죽거나 다칠 것이다.
채옹은 바로 왕윤의 조치부당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왕윤은 브레이크를 잘못 밟은 것이다. 방향도 틀렸다. 그의 방향은 마땅히 군권을 장악하고 군대를 통제하는 쪽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정의를 펼치는 쪽으로 갔다.
동탁이 비록 죽어씨만, 그의 군대는 아직 남아 있다. 순간적인 혼란만 있으며, 예를 들어 심야에 북경에 스모그가 몰려오면, 아침에 깨어난 시민들이 졸지에 방향감과 안전감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왕윤이 스모그가 사라지기 전에 방향을 가리키면 서량군을 잘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윤도 스모그에 빠졌고, 서량군보다 더욱 짙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왕윤의 현상은 아주 위험했다. 그의 손에는 군대가 없었다. 예를 들어, 동탁을 암살한 후, 왕윤이 미현에 동탁이 지은 성으로 병력을 보내어 동탁의 일가를 죽이고 가산을 몰수했는데, 그때 사용한 군대는 장안의 금위군이 아니라, 황보숭이 자신의 옛 부하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왜냐하면 금위군은 모두 서량병이었기 때문이다.
왕윤과 서량군은 스모그 속에서 서로 멍하니 있었다.
여포는 어쨌든 무장출신이고, 군사적인 두뇌가 있었다. 그는 먼저 왕윤에게 한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동탁 수하의 여러 장수를 죽이자고 한다. 그러나 왕윤은 안된다고 한다. 이들은 무고하기 때문에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여포는 다시 말한다. 동탁의 돈과 재물을 공로가 있는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어 응집력을 강화하자고 한다. 왕윤은 또 안된다고 한다. 그것은 국가재산이므로 나눠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왕윤은 원래 모든 서량군을 사면하려고 했다. 여포도 찬성한다. 그런데, 왕윤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게 하면 서량균이 소란을 일으킬 수 있겠다고 생각되어, 먼저 악의 세력은 징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기실 여포의 방안은 시행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여포의 사심이 들어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왕윤은 여포를 싫어하므로 그의 객관적인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군대를 통제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왕윤과 여포는 모두 병주 출신이다. 왕윤은 여포의 고강한 무예를 인정했고 여포를 후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가치관은 전혀 반대였다. 왕윤은 정의를 중시하고 이익을 경시하는데, 여포는 이익을 중시하고, 정의는 경시했다. 이런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다. 동탁이 살아있을 때, 자신의 거대한 신체로 두 사람의 차이를 막을 수 있었다. 이제 동탁이 없어지니, 두 사람의 갈등이 시작된다. 왕윤은 조조처럼 용인술이 뛰어나 모을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모아서 단결시키는 능력이 없었다.
왕윤의 여포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평가는: "여포는 검객이다"라는 것이다. 왕윤의 마음 속에 여포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 하지만 나머지는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포는 사대부를 경외했다. 자신을 멸시하는 왕윤의 앞에서도 그냥 무릎꿇고 인사를 했을 뿐이다.
기실 가장 급히 배치해야할 부대는 장안의 동쪽에 있는 각 관문에 주둔하고 있는 서량군이다. 이들 군대는 동탁이 동탁을 토벌하려는 맹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배치해놓은 것이다. 누군가 왕윤에게 건의한다: "양주사람 황보숭을 보내어 이들 동탁의 옛 부하들을 지휘하게 하여, 먼저 그들을 통제하고, 다시 동탁토벌맹군과 천천히 얘기를 하자." 왕윤이 말한다: "그건 아니다. 맹군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두 한왕조를 회복하려는 충성심을 가진 이들이다. 만일 우리가 돌연 이들 군대를 갖게 되면, 맹군은 우리가 동탁과 마찬가지로 할거하려는 것으로 알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초심이 아니다. 통일대업에 방해가 될 것이다."
왕윤의 맹군에 대한 판단은 틀렸다. 맹군은 동탁을 토벌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극소수 관리들만이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대부분의 제후는 자신의 일을 하는데도 바빴다. 어떤 사람은 식사자리에 초청하여 파티를 열고, 어떤 사람은 서로 분노하여 싸웠고, 어떤 사람은 서로 영토를 다투었고, 어떤 사람은 새로 황제를 세웠다.
왕윤의 군대에 대한 인식도 틀렸다. 그는 양주군을 해산하려고 했다. 그는 반군의 존재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군대는 정의의 군대이다. 깨끗해야 했다. 반군은 그의 눈에 악의 세력을 대표한다. 기실 군대는 그저 국가의 기기이고,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작용을 할 수 있다. 식칼과 마찬가지로 하룡 원수의 손에 쥐어지면 혁명을 일으킬 수 있고, 나의 모친의 손에 쥐어지면 고기를 다지는데 쓰는 것이다.
왕윤이 서량군을 대하는 것은 죽이지도 않고 사면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사람으로 바꾸어 장악하지도 않았다. 그는 식칼이 더럽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식칼을 잡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동탁의 잔여부대에서 가장 실력있는 자는 이각(李傕), 곽사(郭汜)이다. 정변초기, 이각, 곽사는 대표를 파견하여, 왕윤에게 사면을 요청한다. 왕윤은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성격이 다시 나타난다. 그들에게 한바탕 욕을 해서 쫓아보낸다. 이렇게 평화적 해결의 길은 날려버린다.
이각, 곽사는 초안(招安)을 받지 못하자, 상심한다. 군대를 해산해서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반쯤 진행하였을 때 가후(賈詡)가 나타난다. 가후는 머리가 맑았다. 그는 이각을 저지하며 말한다. 국가의 사면을 받지 못하면 바로 죄인이다. 만일 현재 모두 흩어진다면, 아무런 저항능력도 없게 된다. 마을의 민병이나 촌장도 그들을 체포할 수 있다. 차리리 부대를 모아서 장안을 치는 것이 낫다. 쳐서 이기지 못하면 그때 도망쳐도 늦지 않다.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은 돌연 깨닫는다. 이각, 곽사는 부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더 많은 병졸들을 끌어모으기 위하여, 그들은 도처에 선전한다: "조정은 사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를 동정하던 채옹 장군은 피살되었다. 우리 양주병은 아마도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 만일 장안을 함락시키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함락시키지 못하면, 가는 길에 여자와 재물을 약취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도 늦지 않다."
그리고 구호를 내놓아 장병들의 사기를 돋군다: "채옹의 복수를 하자!" "사면은 정부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장안을 점령하여야 평안해 진다." "네가 돈을 신경쓰지 않으면, 돈이 너를 신경쓰지 않는다." "양주, 양주, 네가 최고야!"같은 류의.....이들 양주병들은 하나 둘 씩 모여들었고, 이각은 처음에 수천명으로 시작하는데, 군대가 장안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십수만에 이른다.
왕윤은 서량군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이들 군신관념이 없는 반군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두 명의 동탁의 옛 부하장수를 불러온다: 호진(胡軫)과 양정(楊定). 그들 둘에게 이각 일당을 만나서 질문하라고 시킨다: "이 법도도 모르는 쥐새끼같은 자들이 뭘 하려는 거냐. 불러와서 나에게 보고하게 해라." 이 두 사람은 이각에게 가서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성을 나선 다음에 몇몇 본대에서 떨어진 병사 몇을 붙잡아 장안으로 돌아가서, 왕윤에게 이각이 오지 않으려 한다고 보고한다.
반군이 장안에 더욱 가까워지자, 왕윤은 급히 서량에서 투항해온 장수 호진, 서영(徐榮)을 임동(臨潼)으로 보내어 응전하게 한다. 서영은 전사하고, 호진은 반군에 투항한다. 반군이 장안성의 바깥까지 밀고 들어온다. 여포가 나가서 싸워, 곽사를 부상입히고, 반군의 공격을 일시 막을 수 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 반군의 진격을 막는 효과밖에 없었다.
다음 날 반군은 계속 공격한다. 장안성은 견고하여 함락시키기 어려웠다. 그러나 십일째가 되자 여포 수하의 수족(叟族)사병이 반기를 든다. 몰래 장안성 외성의 성문을 열어준다. 그리하여 장안성은 무너진다. 여포는 시가전을 펼치며 혈로를 뚫었다. 떠나기 전에 왕윤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데, 왕윤이 말한다: "황제가 아직 어리다. 나의 책임은 황상을 보호하는 것이다. 만일 실패하면 나는 나라를 위하여 순국할 것이다. 너는 먼저 떠나라. 여장군, 맹군의 제후에게 국가를 먼저 생각해달라고 전해달라."
멀리 떠나가는 여포를 보면서 왕윤은 황궁으로 되돌아간다. 그 후에 어린 황제와 함께 내성의 선평문 성루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반군과 대화한다. 반군은 동탁의 복수를 원할 뿐,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흉수만 내어주면, 조정에서 처벌하게 하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 왕윤은 천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루를 한 걸음 한걸음 걸어내려간다.
세상은 일시에 조용해진 것같았다. 그저 왕윤의 발자국소리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망루위에서 그를 관심갖고 내려다보는 사람을 잊었고, 그는 눈앞에 기세등등한 걷도 잊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로지 그 한 사람의 그림자만 있었다. 그는 담담하게 갔고, 당당하게 갔다. 그가 매번 악의 세력과 싸울 때처럼 그가 매번 감옥에 들어갈 때처럼....왕윤은 알았다. 실패하면 죽음으로써 의(義)을 취해야 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결말이라는 것을 그래야 자신이 견지한 일생의 신념을 모조리 펼칠 수 있다고.
눈을 들어보니 하늘의 노을빛이 성아래 사병의 갑옷과 장창에 비추었다. 또한 성위의 천자와 대신의 의관에도 비추었다. 더더구나 왕윤의 얼굴에도 비추었다. 그의 얼굴에는 성결한 빛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비록 무기를 쥐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신념과 자신을 홍영장창으로 삼아 영원한 하늘가를 향해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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