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홍(盧虹)
그는 일찌기 여포(呂布)와 나란히 이름을 떨쳐, "한말쌍절(漢末雙絶)"이라 불리웠다.
그는 자신의 용맹으로 병력을 이끌고 조조의 군대에 맞서서 조조의 군영을 박살내고 하마터면 조조의 목숨까지 빼앗을 뻔했다.
삼국의 영웅인물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은 모두 그 얼굴은 관옥(冠玉)같고, 눈은 낭성(朗星)같으며, 이름은 촉의 '오호상장'중 하나인 마초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초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적은 211년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거병하여 조조와 싸운 것이다. 나중에 조조는 패배하여 수염을 자르고 겉옷을 벗고 겨우 도망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나중에 마초는 조조의 이간계에 걸려 패배한 후, 유비에 투신한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모조리 주살당한다.
마초는 삼국에서 첫째 둘째가는 맹장이다. 그의 조상은 한(漢)의 명장 마원(馬援)이다. 삼국연의에서 마초는 관옥처럼 생기고, 눈은 유성과 같으며 몸은 호랑이같고 팔은 원숭이 같으며 배는 표범같고, 허리는 늑대같다고 하였다. 백마에 앉아서 장창을 손에 들고 사자투구를 쓰고 짐승허리띠를 했으며, 황금색 갑옷에 금포를 입었다. 멋진 모습과 영웅기개는 가히 삼국제일명장이라 할 만하다. 사람들은 "한말쌍절"이라는 말로 여포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촉한에 귀순한 후에는 유비 막하의 관우, 장비, 조운, 황충과 함께 오호상장의 네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금마초(錦馬超)'라는 멋진 별명도 얻는다.
마초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삼국에서 비교적 이른 편이다. 17세에 부친 마등(馬騰)을 따라 이각, 곽사의 난을 평정하는 전쟁에 참가한다. 진영의 앞에서 왕방을 찌르고 이몽을 붙잡는다. 이 일전으로 그는 천항 명성을 떨친다. 삼국초반기의 유명한 소년영웅이며, 호장으로 명성을 떨치는 서곡이 울린 것이다.
그의 명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된 계기는 부친의 복수를 위하여 출정한 "위교육전(渭橋六戰)"이다. 그때 부친 마등은 조조에 붙잡혀 경성으로 가서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 마초는 부친을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하여, 서량의 20만대군을 이끌고 중원으로 쇄도한다. 첫번째 전투에서 종요(鍾繇)를 쫓아내고 장안을 차지하며, 두번째 전투에서는 조홍, 서황을 격파하고 동관으로 진격하여 조조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위교전투에서, 경천동지하고 귀신이 울고갈 일을 벌인다. 서량명장의 위명앞에 조조군영의 장수들이 모조리 패배한다; 우금은 전투에 나서자마자 패배하고, 장합은 싸우지도 않고 도망치고, 이통은 창을 맞고 망혼이 되며, 허저와 싸우고, 단창필마로 조조를 추격하여 수염을 자르고 겉옷을 벗고 도망쳤다. 실로 "영웅천하사(英雄天下射), 위맹수여쟁(威猛誰與爭)"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인 마초가 촉에 귀순한 이후로 한 일은 별로 없다. 삼국초반기의 마초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라 할 수 있다. 그가 한 일과 그에 대한 기록은 너무나 적다. 원래 유비와 마초, 두 군신이 만나면 용호풍운이 일어야 하는데 무슨 원인으로 마초가 조용해진 것일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는 것같다:
마초가 투항할 때 유비의 촉국의 판도는 거의 완성되었다. 위,오,촉의 삼국정족지세는 거의 형성되었다. 이때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 황충, 위연등 형주의 영걸과 법정, 안엄, 이엄, 오의, 뇌동등 사천의 호걸들이 하나로 뭉쳤고 유비의 한왕조 재건사업은 가장 휘황한 시기에 도달했다. 그의 기세는 중천에 뜬 태양과 같았다.
이때의 마초, 마대(馬垈) 형제는 동관, 기성에서 대패했고, 원래 서량의 명장이었던 그는 갈 곳이 없는 상태였다. 그저 잠시 한중의 장로(張魯)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유비가 성도로 진군할 때 마초형제는 명을 받아 사천으로 들어가 유장을 도와서 형주의 병사들을 막는다. 금마초는 비록 용맹하기는 하지만, 제갈량, 법정의 지모와 장비, 조운, 황충, 위연의 옹맹앞에 형주의 병사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양송, 양백 형제가 뒤에서 그의 발목을 잡아서 더욱 곤란했다. 이렇게 진퇴양난의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이회의 말 한마디에 마초는 유비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다. "지금 주공을 만나니, 마치 구름이 걷히고 맑은 하늘을 보는 것같습니다."
마초 형제가 유비에 투항한 후, 선봉장이 되어 금관성으로 가서 유방으로 하여금 성문을 열고 투항하게 만든다. 긓 한중을 취하고, 동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유비 휘하의 장수들은 기세를 떨치며 앞다투어 공을 세웠다: 맹장 장비는 와구관을 취하고, 노장 황충은 정군산을 위엄으로 벌벌 떨게 만들며, 조자룡은 한수에서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물리쳤다. 마초는 제갈량의 휘하 일개 부대로서 양평을 취하는 전투에서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비가 한중왕을 칭할 때, 마초는 비로소 관우, 장비, 조운, 황충과 나란히 오호상장의 반열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의 마초는 삼국시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여러번 '삼국연의'를 읽어보면서 그 원인을 찾아보았는데, 필자의 생각으로 네 가지가 있는 것같다.
첫째, 마초가 '오호상장'에 봉해지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촉국은 첫번째 거변을 맞이한다. 즉 관우, 장비가 죽고 유비는 동생의 복수를 위하여 오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촉국의 강적은 여전히 북쪽의 조위였다. 그래서 제갈량은 특별히 마초와 위연으로 하여금 함께, 전략요충지 한중을 지키게 한다. 이야기의 중점이 오나라토벌로 옮겨가다보니, 독자들이 마초가 무엇을 했는지 알기 어렵게 된 것이다.
둘째, 유비가 죽은 후, 조비는 사마의의 계책에 따라, 다섯갈래의 길로 촉을 토벌한다. 이때, 촉국은 공전의 위기를 맞이한다. 다행히 제갈량의 묘계로 다섯갈래의 적을 모두 막아낸다. 그리고 강왕 가비능의 10만 서강군대를 물리친 것은 바로 대대로 서량에 살며 '비장군'으로 불리던 마초이다. 특히 나중에 남방을 평정하는 전투에서 마초는 더더욱 한중을 수비하고 서강을 견제하는 중임을 맡는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삼국연의의 중심이야기축선이 아닌 것이다.
셋째, 마초가 촉한에 온 후, 비록 무용, 명망, 가문등으로 '오호상장'의 반열에 오르지만, 유비의 사업에 대한 공헌은 관우, 장비, 조운과 황충에 훨씬 못미쳣다. 관우, 장비는 유비와 수십년간 환난을 함께한 도원결의형제이고, 친밀한 정도는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다; 조운은 유비가 곤경에 빠졌을 때 충성심을 가지고 따랐고, 두번이나 후주를 구해준 공로가 있다. 황충은 장사에서 유비에게 귀순한 후 동천,서천을 취하는 전투에서 여러번 공로를 세운다. 이 모든 것은 마초가 갖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임무는 항상 관우, 장비, 위연이 맡았고, 그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기회는 적었다.
넷째, 특히 중요한 점이 있다. 마초는 동관, 기성의 패배이후 교훈을 얻는다. 유비의 휘하에서 자신의 지위, 공헌이 관우, 장비, 조운, 황충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게다가 그는 사람됨이 자신의 무공을 믿고 오만하면서, 누군가 참언을 할까 우려했다. 그래서, 천중의 명사인 팽양이 유비에 대한 불만으로 마초를 찾아가서 반란을 일으키자고 했을 때, 마초는 즉시 그가 한 말을 유비에게 보고하여 혐의를 벗는다. 이를 보면 그는 조심하며 스스로를 지키려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벌을 할 때, 마초라는 이 삼국의 명장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향년 겨우 47세였다. 그래서 마초의 일생의 운명은 필자가 보기에 비극적인 색채가 있다. 그래서 항상 금마초를 떠올릴 때면 마음 속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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