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후 왜 손권은 조조에게 투항했는가?

by 중은우시 2016. 1. 19.

글: 장공성조(長空星照)

 

적벽대전 이전에, 동오의 대부분 관리는 모두 손권에게 조조에 투항하라고 권했다. 왜냐하면 당시 쌍방의 역량이건 전쟁형세이건 모두 조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만, 손권은 노숙의 건의하에, 조조에 맞서싸우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주유의 주장하에 동오군신의 생각을 통일시킨다. 결국 적벽에서 조조를 격패시키고, 적벽대전의 승리를 거둔다. 그 때의 손권은 얼마나 호장(豪壯)했던가! 그러나, 손권은 적벽대전후 다시 형조의 강북남군을 탈취하고, 건안20년에는 다시 유비의 손에서 강남삼군을 빼앗아 온다; 같은 해, 손권은 유수에서 다시 조조가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만든다. 바로 이같은 각 방면에서 모두 유리한 형세하에서, 손권은 건안22년, 조조에 투항한다. 이 해에, 동오는 큰 전투도 없었다.

 

손권은 왜 이 때 조조에 투항하였을까?

 

손권이 당시에 처한 형세

 

당시 손권의 동오정권은 강남과 회하(淮河)유역의 대부분 지구를 점유하였고 당시의 중국에서 조조를 제외한 가장 중요한 정치, 군사역량이었다. 마찬가지로 손권은 조조의 가장 주요한 공격목표가 된다.

 

적벽대전은 건안13년(208년)에 끝나고, 그 후에 조조와 손권은 어디에서 교전을 했을까?

 

건안14년 봄, 조조군이 초현(譙縣)에 도착하여, 쾌선(快船)을 만들고, 수군을 조련시킨다. 가을에는 과수(涡水)에서 회하로 진입하고 비수(肥水)를 넘어 합비(合肥)에 주둔한다. 건안17년 겨울 조조는 손권을 공격한다. 다음 해 봄에 군대를 유수구까지 진격시킨다. 조조는 손권의 강서대영을 격파하고, 손권 수하의 도독 공손양(公孫陽)을 붙잡고 철군해서 돌아간다. 건안19년 칠월, 조조는 병력을 이끌고 손권을 친다. 그러나 쌍방간에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는다. 건안20년 팔월, 손권은 군대 10만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한다. 당시 합비를 수비하는 조위의 주장은 장료였다. 전체 합비성에는 겨우 7천여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 장료는 손권을 이기고, 거의 손권을 산채로 붙잡을 뻔했다. 건안21년 겨울,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거소(居巢)로 간다. 다음 해 봄 손권의 유수구를 맹공한다. 손권은 패퇴하여 도망친다.

 

조조는 이때 다른쪽에 무슨 큰 전투가 있었는가?

 

건안16년(206년) 칠월, 조조는 관중의 마초, 한수를 친히 정벌하여 연말에 평정한다. 건안20년 삼월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고, 십일월 장로는 투항한다.

 

이를 보면 알 수 ㅇㅆ는 것은 조조가 이 방면에서 주요 진공방향은 손권이었다는 것이다.

 

그외에 다시 유비와 손권의 전투를 보자.

 

건안20년(215년), 손권은 유비가 이미 익주를 취득했다는 것을 이유로 유비에게 형주를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적벽대전때, 유비는 자신의 토지가 너무 적다는 것을 이유로, 손권에게 형주의 남군을 빌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유비는 계속 미루고 돌려주지 않았다. 양주를 얻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손권은 화가 많이 나서 여몽을 보내어 장사, 계양과 영릉의 3개군을 탈취한다. 유비도 원래 손권이 통제하던 공안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조조가 한중을 점령했으므로, 언제든지 성도로 진격할 수 있었다. 유비는 손권과 강화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둘은 형주를 나누어 갖는다: 강하, 장사, 계양은 동오에 귀속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유비에 귀속된다.

 

이 기간, 유비와 조조는 단지 한중에서만 전투가 있었다. 조조가 한중에 남겨둔 대장은 하후연, 장합이다. 유비의 대장은 장비였다. 건안23년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여, 다음해 수복한다. 이는 손권이 조조에게 투항한 이후의 일이다.

 

이상의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손권의 전투가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형세가 가장 심각했다. 그는 전선이 길 뿐아니라, 양대적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런 위협은 모두 치명적인 것이다.

 

유비는 이미 그와 강화하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하에서, 유비는 그의 위협일까?

 

형주는 동오의 명맥이다. 유비는 동오의 잠적인 위협으로 점점 더 심각해졌다.

 

유비는 19년 성도로 진격하고, 유장은 투항한다. 유장은 그다지 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익주를 장악하던 기간동안 큰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익주는 부유한 편이었다. 여기에 익주의 각군은 대부분 투항해서 유비가 전체 익주를 차지하는데, 그다지 많은 힘을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익주를 얻은 것은 유비로 하여금 큰 이익을 보게 했다. 익주를 가진 유비는 형주의 강북부분을 합쳐서 이미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삼국정립국면이 정식으로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손권, 유비는 비록 강화했지만, 손권에 대하여, 서촉의 형주는 그의 목에 채워진 족쇄이다. 언제든지 그의 목을 조를 수 있는 것이다.

 

손권의 전선은 동,서 두 개의 선으로 나뉘어 있다. 동쪽 전선의 전투는 주로 거소를 둘러싸고 있다. 즉 현재으 안휘 소호 지구이다. 이 지역은 조조에게 아주 중요했다. 손권은 여기에서 북상하면, 직접 중원의 핵심지역을 직접 위협할 수 있다. 이는 유비가 한중을 얻은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동오에 있어서 조조보다 가벼웠다. 왜냐하면 이곳의 장강수면은 넓고, 조조가 강을 건너려고 한다면, 아마도 장기간 준비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당연히, 토지는 크면 클수록 좋다. 공격은 가장 좋은 방어이다. 이 지구를 잃는 것은 손권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그저 손권은 더욱 큰 우환이 서쪽 전선이었기 때문이다.

 

서쪽전선은 형주이다. 유비가 사천으로 들어간 후, 관우로 하여금 형주를 지키게 했다. 건안20년, 손권, 유비의 둘은 전투를 벌인다. 비록 화해합의를 이루었고, 토지는 각각 귀속시켰지만, 이 곳은 여전히 위오촉이 서로 다투는 곳이고, 손권에게는 마음의 병인 곳이다. 형주지구는 손권에 있어서 자신의 목과 같다. 유비이건 조조이건 이곳을 가지게 되면 자신의 목의 명맥을 쥐게 되는 것이다. 만일 형주지구에서 동오를 공격하려면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그러면 손권은 우세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완전히 피동적인 처지에 처하게 된다. 둘을 비교하면 서부전선이 동부전선보다 훨씬 중요하다.

 

형주의 관우는 유비의 일반적인 장수가 아니다. 그는 전투결정권을 지닌 장군이다. 서주에 있을 때도 유비는 관우를 남겨서 독립적으로 소패를 지키게 한 적이 있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할 때, 관우는 독립적으로 수군을 이끈 바 있고, 유비가 면수를 건너 잠시 위험을 벗어난 후, 다행히 관우와 만나게 되었다. 유비집단을 되돌아보면, 유비를 제외하고 관우만이 독립적으로 병력을 이끌었다. 그래서, 동오가 서부전선에서의 공격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는 완전히 유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 큰 것은 관우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손권은 반드시 양쪽 전선에서 모두 응전을 준비해야 했다. 나중에 손권은 관우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시도한다. 사신을 보내어 자신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정략결혼시키자고 한다. 이것은 그의 우려를 표시한 것이다. 이는 형주가 손권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동부전선에서 조조를 상대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주로 관우를 방어하는 것이다. 동오의 역량으로는 막아내는데 피곤할 것이다. 만일 전투를 잠시 정지시킬 수 있다면, 손권은 한편으로 숨을 쉴 수 있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서부전선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바꾸어 말하자면, 동쪽전선에서 전투를 중단시키는 것은 서부전선의 전투에 집중하기 위한 것이다.기회를 얻어 형주를 공격해 빼앗으려는 것이다. 이는 손권이 조조에 투항한 원래 의도일 것이다.

 

손권의 투항은 당시의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그저 임시변통이고 진심은 아니다. 그렇다면 조조는 왜 동의했을까? 당시의 상황으로 보자면, 유비는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으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관우는 형주에서 언제든지 양번으로 진격할 수 있었다. 손권은 또한 수시로 합비를 노렸다. 이렇게 되니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되고 피곤에 지치게 된다는 의미이다. 비록 조조는 나라가 크기는 하지만, 다만 바깥의 장군들은 손에 병력을 쥐고 있으면, 조조는 장기간 그들이 '독립자주'적이 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면 그 혼자서 뛰어다녀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하자면, 이번 투항은 실제적인 의미가 일종의 화해이다.

 

손권의 투항은 그가 나중에 형주를 기습하여 성공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관우를 공격하는데 '조조'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받은 바 있었다. 그가 내건 것은 조정을 위한 것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했다. 혹은, 조조는 손권이 형조를 공격하여 승리하도록 방임한 것이 바로 건안22년 투항해왔다는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형주를 기습하여 손에 넣은 것은 손권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는 동오의 역량을 더욱 강화한다. 손씨정권은 더욱 안정된다. 다만 나중에 황제가 되는 사람에 있어서, 이는 절개의 면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사람들은 주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주유가 살아 있다면, 그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이런 국면에 대응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