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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위연과 조운: 누가 대장이 되기에 더욱 적합할까?

by 중은우시 2016. 2. 16.

글: 이치아(李治亞)


둘 다 촉한(蜀漢)의 명장이다. 소설에서 조운은 아주 대단하다. 촉한 오호장에 들어가고, 또한 유비의 결의형제이다. 사람들이 사천세(四千歲)라고 부른다. 도원삼결의를 나중에 조자룡이 잇는다. 사실상 위연은 조운보다 더 우수했다.


유비는 사람을 잘 알아보았고, 창업단계의 유비는 반드시 개척성향을 지닌 장수를 중용해야 했다. 위연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조운은 성격이 조심스럽고, 수성을 잘한다. 유비가 살아 있을 때, 두 사람의 승진을 가지고 설명해보자: 조운은 건안5년 유비군에 참가하고, 건안14년까지 9년동안 편장군(偏將軍)을 지낸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승진한다. 5년후인 건안19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승진한다. 그런데 위연은 건안19년에 유비군에 참가하며 아문장군이 된다. 5년만인 건안24년 진원장군(鎭遠將軍)으로 승진하여 한중태수(漢中太守)가 된다.


이치대로라면, 조운은 원로급의 장수이고, 위연은 배분이 아래이다. 조운과는 경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비는 그러나 영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이를 보면 위연은 일반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연이 한중태수가 될 때의 말을 생각해보라: 건안24년(219년), 유비는 개양에서 한중왕이 된다. 그리고 치소를 성도로 정한다. 그래서 대장을 남겨서 한중을 지켜야 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은 장비가 한중태수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비도 그 자리는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비는 의외로 위연을 발탁하여 한중도독, 한중태수를 맡긴다.그리고 위연을 아문장군에서 진원장군으로 승진시킨다. 전군의 상하는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하루는 유비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위연에게 묻는다: "오늘 너에게 이런 중임을 맡겼는데, 뭐 할 말이 없느냐?" 위연이 낭랑하게 대답한다: "만일 조조가 전군을 몰고 오면, 제가 대왕께 그를 막아달라고 청하겠습니다. 만일 장수가 십만대군을 이끌고 온다면, 저는 대왕께 그들을 집어삼키라고 청하겠습니다." 유비가 그의 말을 듣고 크게 만족하고, 여러 신하들도 위연의 말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위연이다. 만일 조운이었다면, 이렇게 호기롭지 못했을 것이다.


조운은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다. 인품에 하자가 없다. 그러므로 같은 성의 조범(趙范)이 자신의 형수인 미녀 번부인을 조운에게 소개했을 때, 조운은 죽어도 응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때문에 사이가 틀어진다. 이 일이 만일 유비에게 벌어졌다면 유비는 바로 어린 손권의 여동생도 취하고, 다른 사람의 처인 유장의 며느리도 취했다. 여자를 옷처럼 여겼다.매번 전쟁때마다 유비는 토끼보다 먼저 도망쳤다. 그러나 조운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절개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위연은 담량과 식견이 있었고, 모략이 있었다. 저명한 것은 자오곡기계이다. <삼국지> 보주(補注) <위략>에 이런 기록이 있다: 제갈량이 제1차북벌을 할 때, 위연은 군사회의때 건의를 내놓는다. 장안의 수비장수인 하후무는 겁이 많고 모략이 없으므로, 자신에게 정명5천을 주면, 자오곡에서 직접 장안으로 쳐들어가서 취하겠다고. 그러면 하후무는 반드시 성을 버리고 멀리 도망칠 것이라고. 그러나 제갈량은 이 계책이 위험하다고 보고 채택하지 않는다. 위연은 모험을 즐기고, 조운은 모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운은 유비에게 동오를 치라고 건의하지 않았다. 당시 위연은 한중태수이고, 촉한의 번방을 지키고 있었다.


위연은 명장이다. 사병을 잘 길렀고, 용맹하기 그지없었다. 즉 사병들은 그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조운은 규칙을 잘 지켰다. 유비부자의 곁에서 충성스러운 시위로 있었고, 나중에는 향총에게 그 자리를 넘겨준다.


위연은 촉한에서 관직이 전군사(前軍師),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양주목(凉州牧)에 이르고,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진다; 국가와 군대의 최고지도자중 한 명이다. 조운은 그러나 일생동안 진동장군에 불과했다. 건흥6년(228년) 제갈량의 제1차북벌때 가정에서 참패하고, 조운은 3급이 내려가서 진군장군이 된다. 이에 화병으로 쓰러져 다음해에 병사한다. 그리고 순평후(順平侯)에 추존된다.


조운을 좋아한 사람은 제갈량이다. 그러나 조운은 총사령관의 재목이 아니었다. 위연을 좋아한 것은 유비이다. 아쉽게도 유비는 일찍 죽었다. 만일 위연도 촉한을 보위하는 전투에서 일찍 죽었다면 위연은 분명히 관우, 장비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장수에 속했을 것이다.


위연은 조운보다 우수했다. 그는 대장이다. 대장에게 필요한 것은 전투에 나서서 적을 죽이는 것이고,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는 것이다. 위연과 조위의 명장 곽회가 싸울 때, 책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팔년, 위연으로 하여금 강중(羌中)으로 들어가게 했다. 조위의 후장군 비요, 옹주자사 곽회가 위연과 양계에서 싸운다. 위연은 곽회등을 대파한다. 그리고 전군사, 정서대장군이 된다"; 바로 이 곽회가 바로 제갈량의 후계자인 강유를 속수무책으로 만든 사람이다.


그런데, 재주가 있는 사람은 모두 성깔이 있다. 제갈량은 성깔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관우가 있고, 또 위연이 있다. 그래서 전투를 잘하는 위연이 결국은 참사한다. 만일 유비가 아직 살아있었더라면, 분명 위연에게 큰 상을 내렸을 것이나, 아쉽게도 역사에 만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