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며느리의 이혼사유

중은우시 2014. 9. 8. 17:33

글: 위석아(危石兒)

 

지금의 사회를 옛날의 사회와 비교하면, 여자의 지위는 완전히 다르다. 현재의 여자들이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고대에는 달랐다.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간 후, 남자들은 처를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이혼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른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닭을 맞이하면 닭을 따르고, 개를 맞이하면 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일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오대(五代)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처인 하씨(夏氏)가 적극적으로 잠편 돌욕(突欲)에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혼'을 요구하는 사유가 아주 놀라웠다.

 

돌욕이 하씨를 취하다.

 

돌욕이라는 이름은 한번 들으면 바로 한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원래 역사상 거란족의 그 유명한 황제 야율아보기의 큰아들이다.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 황위계승자는 원래 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모친 술진(述津)씨는 또 다른 아들 야율덕광(耶律德光)을 너무 좋아했고,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 술진씨가 섭정을 하게 되어서 그는 눈앞에까지 다가온 황제의 보좌를 동생인 야율덕광에게 빼앗기고 만다.

 

황위를 빼앗긴 돌욕은 아주 화가 났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야율덕광은 황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돌욕을 베재하고 탄압했다. 동단왕(東丹王)으로 있던 돌욕은 딴 생각을 품는다. 그런데 마침 이 때, 중원 후당(後唐)의 이사원(李嗣源)이 이 일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회유한다. 돌욕은 당시의 처지를 생각해보고, 이해관계를 따져본 후에 결국 후당에 의탁하기로 한다.

 

돌욕이 후당에 온 후, 황제로부터 열정적인 환대를 받는다. 그에게 동단모화(東丹慕華)라는 성명을 하사한다. 이어서 그를 회화군절도사(懷化軍節度使, 서신등주관찰사(瑞愼等州觀察使)가 된다. 돌욕은 후당에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마음이 조금 좋아졌다. 그러나 돌욕은 어쨌든 이민족이다. 이사원은 그가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해서, 동생인 전황제 이존욱의 후궁희첩을 돌욕에게 하사하여 처로 삼게 한다. 이를 통하여 그의 마음을 회유하고,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게 하려 한 것이다.(주: 이사원은 이극용의 의자(義子)이고, 이존욱은 친자이다. 사원은 존욱보다 나이가 많다)

 

이러헥 돌욕은 하씨와 부부가 된다. 황제가 중매를 서준 것이다.

 

하씨가 이혼을 요구하다.

 

황제가 맺어준 혼인인데, 왜 처인 하씨는 나중에 적극적으로 돌욕과의 '이혼'을 요구하게 되었을까? 원인은 이러하다.

 

원래 돌욕은 어려서부터 문화수준이 중원보다 낮은 거란부락에서 자랐다. 주위환경의 영향으로, 그에게는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버릇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마시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돌욕은 자주 자신의 희첩의 팔뚝에 구멍을 내서 피를 빨아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노비나 시첩이 조그맣ㄴ 잘못만 저질러도 살을 베어내어 구워서 먹었다. 어떤 때는 그녀들의 눈알을 빼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씨는 돌욕에게 시집간 후, 그의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마시기를 좋아하는" 잔혹한 행위에 놀라서 거의 반죽음이 된다. 그녀는 평소에도 감히 돌욕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저녁에 그를 모실 때면 더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이혼하고 비구니가 되겠다'고 얘기한다.

 

기실 하씨가 이혼을 요구할 때는 이미 죽을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돌욕의 반응은 하씨의 예상을 전혀 벗어났다. 아마도 북방소수민족의 호방한 기질 때문인지, 아니면 하씨는 황제가 하사한 여인이기 때문인지, 그에게 억지로 싫은 일을 하게 강요하지 않고, 돌욕은 그녀의 '이혼'요구를 등락한다.

 

이렇게 하여 하씨와 돌욕간의 황제가 중매를 선 짧은 혼인은 끝이 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