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청군측패(淸君側牌) 정난지역편

중은우시 2015. 10. 18. 22:49

 

명성조 영락제 주체(朱棣)는 연왕(燕王)으로 있다가 황위를 차지한다. 어떻게 보면 서한때 유비(劉濞)의 오초칠국의 난과 상황이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유비는 실패했고, 주체는 성공했다는 것이다.

 

명태조 주원장이 명황조를 건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 조카, 손자 합계 32명을 각지의 왕으로 봉한다. 특히 북방에서 북원(北元, 대막으로 물러간 원황실세력)세력을 막고 있던 9명의 번왕 즉, 요왕(遼王), 영왕(寧王), 연왕(燕王), 곡왕(谷王), 대왕(代王), 진왕(晋王), 진왕(秦王), 경왕(慶王), 숙왕(肅王)은 각자 병사와 관료를 거느리고 있어, 국가 안의 국가(國中之國), 군대내의 군대(軍中之軍)이라 할 만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의 넷째아들 연왕 주체가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고, 주원장의 열일곱째아들 영왕 주권이 8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명황조의 군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 각자의 군대였다.

 

주원장의 황태자였던 주표(朱標)는 장남이면서 마황후(馬皇后)의 소생었다. 그러나, 그는 주원장보다 먼저 죽었고, 주원장은 주표의 아들로 장손인 주윤문(朱允炆)을 황태손(皇太孫)에 올린다. 그리고 주원장이 죽자 주윤문이 즉위하여 건문제(建文帝)가 된다. 만일 주표가 살아있어 황제에 올랐다면 그는 적장자의 신분에다가 풍부한 인맥과 정치적 경험을 가지고 야심만만한 제후왕들을 충분히 억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고 정치경험이 부족한 건문제는 등극하기 전부터 이들 숙부들이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이라고 느꼈다. 이들 제후왕들은 건문제의 윗사람일 뿐아니라 상당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중앙정부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리하여 등극이후, 건문제는 제태(齊泰), 황자징(黃子澄)의 “먼저 손을 써서 그들을 억눌러야지, 그들에게 억눌려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먼저 삭번책(削藩策)을 실시한다. 이때 제태는 먼저 가장 실력이 강한 연왕부터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호부시랑이던 탁경도 상소를 올려 연왕의 봉지를 북경에서 남창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황자징은 이에 반대한다. 연왕은 공로는 있으나 과오는 없으며 여론이 지지도 받고 있으니, 먼저 문제있는 번왕부터 처리하자고 주장한다. 건문제는 황자징의 의견을 받아들여 먼저 5명의 번왕을 없앤다.

 

먼저 홍무31년(1398년) 칠월, 주왕(周王) 주숙(朱橚)을 삭번한다. 주숙은 주체의 동모형제이다. 주윤문은 주숙이 주체의 편을 들까봐 우려하여 그를 먼저 삭번한 것이다. 주숙의 둘째아들 주유동(朱有㷲)은 부친에게 모반을 권한다. 그리하여 건문제는 이경륭(李景隆)을 변방방어명목으로 개봉을 지나가도록 하고, 그때 주왕의 일가족을 체포하여 남경으로 압송하고, 서인(庶人)으로 폐한다. 건문원년(1399년) 삼월, 대왕(代王) 주계(朱桂), 제왕(齊王) 주부(朱榑), 상왕(湘王) 주백(朱柏)을 삭번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든다. 상왕은 모욕을 참지 못하고 명예와 절개를 보존한다는 명복으로 일가족이 불을 질러 자살한다. 제왕은 남경에 연금되고, 대왕은 대동에 연금된다. 2달후 민왕(岷王)을 삭번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장주로 유배보낸다. 건문제의 삭번은 무계획적이고 사후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즉위후 너무 서두르는 바람이 민심이 흔들린다. 그리하여, 지방에서는 고변하여 상을 받으려는 자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주왕의 차남은 겨우 10실이었는데, 그의 말로 인하여 주왕을 삭번한다. 상왕도 무고를 당했는데, 도저히 청백을 증명할 길이 없자 불을 태워 자결해버린다.

 

홍무31년 십이월, 연왕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하여, 건문제는 공부시랑 장병(張昺)을 북평포정사로 임명하고, 사귀(謝貴), 장신(張信)을 북평도지휘사로 임명한다. 그후 다시 도독 송충(宋忠)을 개평(開平)에 주둔시키며, 북평의 원래 연왕이 관할하던 군대를 넘겨받아 지휘하도록 했다. 연왕 주체는 시간을 벌어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건문원년 주체는 거짓으로 아픈 척한다. 이렇게 하여 남경에 있던 주체의 세 아들은 병문안을 이유로 북경으로 돌아온다. 세 아들을 돌려보내는 문제를 놓고 건문제와 신하들은 고민하였지만, 황자징이 세 아들을 돌려보내면, 연왕 주체가 황제의 창끝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다고 여겨 경계를 느슨히 할 것이니, 돌려보내자고 주장하여 건문제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 후에는 주체가 미친 척을 한다. 그러나, 주체의 부하인 왕부장사 갈성(葛誠)이 그를 배신하고 건문제에 “연왕이 거짓으로 미친 척한다”고 보고한다. 그리하여, 그가 거짓으로 미친척 한다는 것이 발각된다.

 

연왕이 남경에 보고하러 보낸 사자(使者)를 제태가 붙잡아 심문하고, 연왕 주체의 이상행동들을 진술하게 한다. 이에 근거하여 조정에서는 장병, 사귀에게 연왕부의 인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하고, 장신에게는 연왕을 체포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장신은 모친과 상의한 후, 이 일을 주체에게 보고한다. 그리하여, 조체는 요광효(姚廣孝)등과 거병계획을 세우고, 장옥(張玉), 주능(朱能)으로 하여금 8백병사를 이끌고 집안에 잠복하게 한다. 장병, 사귀는 건문제의 밀지를 받은 후, 칠월 초사일, 연왕부를 포위한다. 주체는 거짓으로 수하들을 모조리 포박해 놓았으니, 두 사람에게 집안으로 들어와 확인하라고 유인한다. 두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오자 집안에 숨겨둔 병사들로 하여금 이들을 체포하게 하고, 연왕부내에서 배반한 갈성, 노진(盧振)까지 한꺼번에 처형한다. 그날 밤 주체는 북경의 구문을 점령하여 북경성을 장악한다.

 

주체는 건문원년(1399년) <황명조훈(皇明祖訓)>을 인용하여 “청군측(淸君側)”의 기치를 내건다. 즉, 황제의 곁에 있는 제태와 황자징이 간신으로 황실친족을 모해하므로 제거해야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거병은 나라를 위하여 “정난(靖難, 국난을 평정한다)”하기 위한 것이라고 건문제에게 상소를 올린다.

 

연왕의 군대가 북경을 장악한 후, 칠월 초육일, 통주가 스스로 귀순하고, 계주는 함락시키고, 준화, 밀운도 귀순한다; 칠월 십일일, 거용관을 함락시킨다; 칠월 십육일, 회래를 함락시키고 송충등을 체포하여 죽인다; 칠월 십팔일, 영평부(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진황도시에 속함)가 귀순한다; 칠월이십칠일, 대녕군대가 송정관으로 북경을 기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간계를 써서 송정관의 내분을 일으키고, 수비장수 복만을 하옥시킨다. 이렇게 하여 북평주위는 완전히 장악하고, 연왕 주체의 병력은 수만으로 급격히 불어난다. 그 후 건문제는 진정(眞定, 지금의 하북 정정)에 평연포정사(平燕布政使)를 두고, 65세의 노장 경병문으로 하여금 13만병력(대외저으로 30만이라 함)을 이끌고 북상하게 한다. 이곳에서 1년간 대치하지만, 결국 경병문이 패배한다.

 

건문2년(1400년) 주체는 진정전투에서 경병문에 승전한 후 건문제에게 상소를 올려 제태, 황자징을 극력 비난한다. 건문제는 제태, 황자징을 면직시키나, 여전히 암중으로 두 사람과 협의한다. 그해 12월 동창전투에서 승리한 후, 건문제는 다시 제태, 황자징을 복직시킨다. 건문4년(1402년) 주체의 연군이 남경으로 몰려오자, 건문제는 주체에게 강화(講和)를 청하며 제태, 황자징을 외지로 유배보낸다. 이렇게 하면서 건문제는 주체에게 군대를 되돌릴 것을 청한다. 그러나, 주체는 “이는 지연책이다”라고 하면서, 군대를 더 빠른 속도로 진군시킨다. 이미 목표가 제태, 황자징이 아니라, 황위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의 사료를 뒤져보면 건문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명나라건국의 공로가 가장 큰 세 집안인 서달(徐達)집안, 상우춘(常遇春)집안, 이문충(李文忠)집안은 모두 건문제의 편에 섰다. 서달은 명나라건국에 가장 공로가 큰 최고군사지휘관이고, 명나라군대를 이끌고 북벌하여 원황조를 무너뜨렸다. 서달은 살아 있을 때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고, 죽은 후에 중산왕(中山王)에 추증된다. 서달의 장남 서휘조(徐輝祖)는 전투에 능했고,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연왕 주체의 군대를 제미산에서 격파한 바 있다. 만일 건문제가 서휘조를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정난지역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주체가 권력을 찬탈할 후에도 서휘조는 주체에게 충성하는 것을 거절한다. 원래 주체의 황후는 바로 서달의 딸이다. 그런데도 서휘조는 서달의 정통후계자로서 건문제를 극력 지지했다.

 

상우춘은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할 때 또 다른 고굉지신이고, 전설저기 인물이다. 상우춘도 북벌하여 원나라군대를 물리치는데 공로가 크다. 그도 살았을 때 악국공(鄂國公)에 봉해지고 죽은 후에는 개평왕(開平王)에 추증된다. 상우춘의 딸은 건문제의 부친 주표에게 시집을 가서 정실부인이 된다. 상우춘의 작위를 승계한 상승(常升)은 건문제 주윤문에게 외삼촌이 된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상승은 일찍이 서휘조와 함께 포자구에서 주체의 군대에 맞서 싸웠다고 되어 있다.

 

이 두 집안 이외에 주원장의 조카인 이문충의 장남 이경륭(李景隆)은 주윤문의 심복이었다. 이문충은 가장 중요한 개국공신중 하나이고 일찍이 대도독부 좌도독(군대내의 2인자)을 지낸 바 있다. 생전에 조국공(曹國公)에 봉해지고 죽은 후에 기양왕(岐陽王)에 추증된다. 이문충이 죽은 후 장남 이경륭이 작위를 승계하여 좌군도독부를 장악한다. 이경륭과 주윤문은 죽마고우라 할 수 있다. 정난지역때 이경륭이 군사업무를 책임지는데, 그는 뜻은 크나 재주가 부족한 인물이어서, 연전연패한다. 심지어 방효유는 건문제에게 그를 죽여버리라는 건의를 할 정도였다. 주체의 군대가 장강을 건넌 후, 건문제를 그에게 주체에게 가서 강화를 하라고 보낸다. 그런데 그는 금천문을 열어 주체의 군대를 영접하여 건문제를 배신한다. 그러나, 그도 결말이 좋지는 않았다. 영락연간에 탄핵을 받아 작위는 박탈당하고, 재산도 몰수당한다.

 

명나라의 작위는 “주씨성이 아니면 왕에 봉하지 않는다(異姓不封王)”는 원칙을 지켰다. 아무리 공로가 크고, 지위가 높더라도 주씨가 아닌 공신은 최대한 국공에 봉해질 수 있었고, 죽은 후에 비로소 왕에 추존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서달, 상우춘, 이문충의 세 사람은 개국공신중에서도 지위가 가장 높은 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세 집안을 제외하고도 주표, 주윤문 부자는 많은 다른 개국공신과 그 후손드로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장 경병문(耿炳文)의부친인 경군용(耿君用)은 초기에 주원장을 따라 장강을 건넌 바 있다. 경군용이 전사한 후, 경병문이 직위를 승계했고 전공으로 장흥후(長興侯)에 오른다. 경병문의 장남 경선(耿璇)은 주표의 장녀 강도공주를 처로 취한다. 그는 주체가 거병한 후 진정(眞定)전투에서 주체의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한다.

 

여남후(汝南侯) 매사조(梅思祖)의 조카인 매은(梅殷)은 문무를 겸비했다. 그는 주원장의 딸 영국공주를 처로 취한다. 주체가 거병한 후, 그는 건문제의 명을 받아 회안(淮安)을 수비한다. 주체가 즉위한 후, 영국공주에게 혈서를 쓰게 하여 매은을 불러들인다.

 

대장 목영(沐英)은 주원장이 가장 총애하던 양자이다. 마황후, 주표와도 관계가 좋았다. 마황후가 병사한 후, 목영은 피를 흘릴 정도로 곡을 한다. 주표가 죽은 후 목영은 너무 슬퍼하다가 병이 들어 사망한다. 사망후에는 검녕왕(黔寧王)에 봉해진다. 목영의 후처가 바로 경병문의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목씨집안의 정치적 입장도 아주 분명하게 건문제를 지지했다. 목영은 멀리 운남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체가 즉위한 후에도 그를 어떡하지 못하고, 정략결혼의 방법으로 회유할 수밖에 없었다.

 

주윤문과 그의 부친 주표는 개국공신 및 그 후손들과 인맥을 널리 쌓아두고 있었다. 그들은 2대 심지어 3대와도 정략결혼관계, 전우관계, 동향관계를 유지하며, 명나라건국초기 최대의 세력을 형성한다. 당시의 ‘태자당’이라 할 만하다. 건문제 본인이 바로 그 ‘태자당’의 지도자이다. 그는 즉위후 개국공신집단의 이익을 보호해주고, 군사대권을 태자당에 넘겨준다.

 

주체의 편에 선 인물들을 살펴보면, 또 다른 특색이 있다. 주체는 비록 서달의 사위이지만, 서달의 작위를 승계한 서휘조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달의 막내아들인 서증수(徐增壽)는 정난지역때 주체와 내통하다가, 건문제에게 처형당한다. 주체는 즉위한 후 서증수를 정국공에 봉하고 그의 자손들이 작위를 세습하게 해준다.

 

주체는 정난지역때 군사적으로 두명의 뛰어난 조력자가 있었다. 한 명은 장옥(張玉)으로 원래 원나라조정의 추밀원에서 일했고, 원나라조정을 따라 막북으로 도망쳤던 인물이다. 홍무18년(1385년), 그는 명나라에 귀순한다. 나중에 전공을 세워 제남위부천호가 된다. 주체가 거병한 후 그는 주체를 적극적으로 도우고 동창의 전투때 전사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장남 장보(張輔)는 승진을 거듭하여 영국공(英國公)이 되고, 그 후에 자손들이 작위를 승계한다. 이 집안은 명나라에서 가장 혁혁한 귀족가문의 하나가 된다.

 

또 한 명의 대장은 주능(朱能)이다. 그의 부친 주량은 일찍이 명태조를 따랐다. 전공으 로 연산호위부천호가 된다. 주능은 부친의 직위를승계한 후, 주체의 거병때 적극 참여한다. 그도 전공으로 성국공(成國公)이 되고, 자손은 숭정년간까지 작위를 세습한다.

 

이처럼 주체의 권력기반은 분명하다. 군대내의 소장파이다. 그리고 이들은 명나라의 건국과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 만일 정난지역의 배후에서 각축하는 세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건문제의 배후에는 개국공신의 2세대(태자당)이 있고, 연왕 주체의 배후에는 신흥군사집단(소장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천시,지리,인화를 모두 장악한 건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태자당은 결국 소장파에 일패도지하고 말았다.

 

연왕의 병사들이 남경을 포위하고, 건문제는 황궁에 불이 나고 행방이 불명해졌을 때, 저명한 유학자 방효유(方孝孺)를 불러, 조서를 초안하도록 명한다. 방효유가 거절하자, “나는 주공을 본받아 성왕을 보좌하려 하는 것이다.” “그럼 성왕은 어디에 계십니까.” “성왕은 스스로 불에 타서 죽었다.” “그러면 왜 성왕의 아들을 세우지 않습니까.” “나라는 나이 있는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 “그럼 왜 성왕의 동생을 세우지 않습니까.” “이건 짐의 집안 일이다.” 그리고 다시 방효유에게 조서를 초안하라고 하나 거절당한다. 그래서,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구족을 멸하겠다”고 말하자, 방효유는 “십족이면 어떠냐”고 답한다. 그러자, 주체는 방효유를 걸형(桀刑)에 처하고, 문하생들이 십족이라고 하여, 방효유의 문하생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린다.

 

여기에서 우리는 방효유처럼 태조의 적자 적손에 충성할 필요는 없고, 더더욱 주체가 황위를 적법한 방법으로 취득했는지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다. 다만 사료를 보면 우리는 주체의 “청군측”, 즉 간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주장이나, “주공을 본받겠다”는 주장은 모두 가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체가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그는 거병초기에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는 짐의 집안일이다”라고 하여 외인들이 간여하지 못하게 막았을 뿐아니라, 천하의 백성들이 그를 ‘국적(國敵)’으로 볼 수 없게 하였다. 결국 붉은 깃발을 끌어올리고, 붉은 깃발을 끌어내린 셈이다.

 

당태종의 현무문사변이 그후 당나라에서 황자의 권력쟁탈전이 계속 재연되게 만든 것처럼, 주체의 정난지역은 그의 자손들로하여금 청군측의 명분을 내걸고 권력을 탈취하게 만드는 선례가 된다.

 

선덕원년 팔월,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는 청주(靑州)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도 부친 주체와 마찬가지로 간신을 제거할 것을 기치로 내건다. 그는 선덕제가 보내온 사신 후태(侯泰)에게 간신 하원길(夏元吉)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선덕제는 건문제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었고, 주고후도 부친 주체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정덕5년(1510년) 안화왕(安化王) 주치번(朱寘鐇)은 영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도 숙고조 주체를 본받아 반란의 이유를 만든다. 주치번은 손경문에게 격문을 만들게 하여 유근(劉瑾)의 열가지 죄를 천하에 고한다. 유근을 토벌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반란이 18일만에 평정되기는 하지만, 그가 유근을 토벌한다고 내세운 명분은 여러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낸다. 이는 사실상 명무종이 유근을 제거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도 공헌이라면 공헌이다.

 

역사상 “청군측”을 명분으로 내건 거병은 목적이 모두 “청군(淸君)”에 있지 “청군지측(淸君之側)”에 있지 않다. 그런데도 ‘청군측’이라는 기치를 내거는 것은 바로 역사에서 자신의 거병이 조정에 대한 불충이라는 죄명을 뒤집어 쓰고 싶지 않고, 또한 자신의 반란에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어내고 많은 동조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그럴 듯한 명분, 핑계일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