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청군측패(淸君側牌) 오초칠국의난

중은우시 2015. 10. 18. 22:43

 

중국 역대의 반란에서 명분으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을 꼽는다면 단연 “청군측”이다. 즉, 황제의 곁에 있는 소인/간신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물론, 거병의 목적이 단순히 소인/간신만 제거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거병의 목적은 황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다만, 거병시 ‘역적’으로 몰려 명분을 잃지 않으려는 고려에서, 직접 황제를 겨냥한다고 말하지 않고, 황제가 잘못한 것이 실은 그 곁에 있는 심복들인 소인/간신이 잘못하기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며 그 심복들을 제거하는 것이 실은 황제를 진정으로 위하고 황조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종의 지상매괴(指桑罵槐), 즉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하는 격이다.

 

진나라말기 농민반란군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데, 주(周)왕조는 아들을 제후로 봉하여 8백년간 존속하였...고, 진나라는 제후를 봉하지 아니하였다가 황실의 위기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여 멸망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개국후에 아들과 조카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였다. 이는 중앙조정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지방의 제후국이 병력을 동원하여 황조를 보위하는 구도를 구상한 것이다. 그리고, 유방은 임종시에 여러 개국공신들을 불러모아 백마의 피로 맹세를 하게 한다: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되는 자가 있으면 천하가 함께 그를 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후환을 막아낼 수있다고 기대했던 것같다. 그러나, 한나라초기 근 백년간 황조의 가장 큰 불안정요소가 오히려 이들 제후왕들로부터 나왔다는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다.

 

이후의 여러 황조에서도 유방의 방식을 본받아 제후왕을 봉하게 되는데, 서진왕조의 사마염, 명나라의 주원장이 그들이다. 이들 제후왕들은 지방각지에서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중앙조정이 위험할 때 병력을 동원하여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무장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불안정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들 제후왕들은 세력이 커지게 되면 중앙조정의 약점이 나타날 때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때 내세우는 명분은 황제의 곁에 있는 소인,간신을 제거함으로써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내고 황조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것, 즉 황조의 구세주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청군측’의 명분을 내세워 거병하면 비로소 왕국군사와 황조대군간의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서한왕조가 개국한지 50년이 지난 후 한경제 유계는 산동제후들이 너무 강하여 가지가 강하고 줄기가 약한(枝强幹弱) 국면이 형성되자 이를 타파하고자, 어사대부 조착(晁錯)의 <삭번책(削藩策)> 상소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오초(吳楚)의 제후국들 봉지(封地)를 삭탈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기원전154년 겨울, 초왕 유술이 내조하였을 때, 조착은 그가 태후복상때 음란한 짓을 했으니 주살해야한다고 말하자, 한경제는 사형을 면하게 해주면서 동해군을 삭감하는 징벌을 내린다; 조왕 유수도 죄를 지어 하간군을 삭탈당했고, 교서왕 유앙도 매관매작했다고 하여 6개현을 삭탈당한다. 이어서 한경제는 신하들과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봉지를 삭감하는 논의를 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오초지역의 제후왕들은 충격에 빠진다. 특히, “산에서 광물을 캐내 동전을 만들고, 바다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어” 천하의 호걸들을 끌어모은 오왕 유비는 원래 아들인 세자 유현(劉賢)이 조정에 갔을 때 당시 황태자이던 한경제와 바둑을 두다가 불손한 태도를 취했다고 하여 한경제에 의해 바둑판으로 머리를 찍혀 죽은 원한도 있어 이 기회에 모반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먼저 교서로 가서 교서왕 유앙과 모반을 논의하여 천하를 얻은 다음 오와 교서가 나눠서 통치하자고 제안한다. 유앙도 모반에 동의하고 제나라 옛땅의 여러 제후왕들을 끌어들이고, 오왕 유비는 초, 조등을 끌어들인다.

 

얼마후 한경제는 오왕 유비의 예장군, 회계군을 박탈하는 조서를 내린다. 오왕 유비는 즉시 오국 경내의 2천석이상 관리를 모조리 죽여버리고, “주조착, 청군측(誅晁錯, 淸君側)”(조착을 죽여 황제 곁의 소인, 간신을 제거한다)”의 구호를 내세워 교서왕 유앙, 초왕 유술, 조왕 유수, 제남왕 유벽광, 치천왕 유현, 교동왕 유웅거와 공동으로 거병하여 도성을 진격한다. 한나라초기 조정을 뒤흔든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거병초기 유비가 “나는 나이가 예순둘인데 스스로 장수가 되어 병력을 이끌겠다. 나의 막내아들은 나이가 열넷인데, 병사들의 앞장을 서겠다. 나이가 나와 같은 사람부터 막내아들과 같은 사람까지는 모두 나서라”고 호소하여 20여만의 병력을 끌어모은다. 여기에 나머지 6개 제후국과 민(閩, 지금의 복건성), 월(越, 지금의 광동성)의 도움까지 받고, 흉노에도 사신을 보낸다. 이렇게 하여 이들 반란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중원으로 밀고 들어간다.

 

이때 조착은 한경제에게 친정을 건의하고 자신은 경성을 유수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오국승상을 지낸 바 있는 원앙(袁盎)은 한경제에게 조착을 주살할 것을 건의한다. 그렇게 하면 반군의 ‘주조착’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되니 병력을 물릴 것이라는 것이다. 한경제는 원앙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를 비밀리에 오국으로 보낸다. 그 후 승상 도청, 중위 진가, 정위 장구도 연명으로 상소하여 조착을 참할 것을 청한다. 한경제는 그 주청을 받아들여 조참을 동시(東市)에서 요참(腰斬)하게 된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병사들은 전혀 철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한경제가 연약하고 무능하다고 보아, 유비는 스스로 동제(東帝)로 칭하고 원앙의 접견요청을 거부한다. 그제서야 한경제는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하겠다고 결정하고, 주아부(周亞夫)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오초칠국의 공격을 막도록 한다. 한경제의 동생인 유무(劉武)의 양국(梁國)은 한경제를 도와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이 때의 칠대공신은 한나라조정의 주아부, 두영(竇嬰), 난포(欒布), 역기(酈寄)이고, 양국의 유무, 장우(張羽), 한안국(韓安國)이다. 주아부는 이 때의 공로로 조정의 최고권신이 되나 그도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