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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차도살인술(借刀殺人術) 승기타겁패(乘機打劫牌) 유장편

by 중은우시 2015. 11. 1.

 

황위승계를 노리는 황자는 시시때때로 기회를 노리면서, 스스로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한편으로 현덕(賢德)하다는 것과 군주의 풍도를 보여 부친이 자신에게 안심하고 권력을 넘겨줄 수 있도록 하여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목을 여러 곳에 심어서 부친 정책의 문제점을 파악해서, 적절한 시기에 간언하여 충효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때는 대신들의 현실정책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아예 궁정정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서한초기 유방이 죽은 후 여후가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여후는 한편으로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는 자가 있으면 천하가 함께 그를 칠 것이다”라는 유비와 개국공신들과의 맹세를 공공연히 어기고 그녀의 조카, 조카손자들을 왕에 봉하며, 세력을 키웠고, 다른 한편으로 유씨자손을 대거 제거했다. 유방, 한혜제 두 황제를 모셨던 신하들에 대하여는 “나를 따르는 자는 흥하고 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원칙하에 대거 죽이거나 좌천시켰다. 이렇게 여대(呂臺), 여산(呂産), 여록(呂祿), 여가(呂嘉), 여통(呂通)등 여러 여씨들이 하나하나 왕에 봉해지고, 그들이 군정대권과 조정대권을 모조리 장악한다. 이렇게 여후의 일가가 유씨들이 가진 권력을 모조리 빼앗아가니, 유씨제후왕들과 대신들 중에서도 불평불만을 가진 자들이 적지 않았다.

 

유방의 장남 유비(劉肥)의 아들인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여록의 딸과 결혼했고, 당시 스무살의 나이로 혈기방장했다. 하루는 여후가 연회를 베푸는데, 유장을 주리(酒吏)로 임명하여 연회의 술자리를 감독하게 한다. 유장은 장계취계(將計就計)로 여후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은 장군집안의 후손이니, 군법으로 술자리를 감독해도 되겠습니까?” 여후는 그렇게 하라고 동의한다. 술자리의 흥이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 유장은 여후에게 농요를 본떠서 자신이 만든 <경전가(耕田歌)>를 불러 흥을 돋구자고 청한다. 그러자 여후는 “불러보라”고 한다. 유장이 부른 <경전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심경기종(深耕穊種), 입묘욕소(立苗欲疏),
비기종자(非其種者) 서이거지(鉏而去之)

씨를 깊이 뿌릴 때는 조밀하게 뿌리고,
모종을 심을 때는 성기게 심어야 한다.
같은 씨가 아닌 것이 심어져 있으면,
호미로 파내서 없애야 한다.

 

앞의 두 구절은 유씨자손을 많이 낳고, 사방에 넓게 분포시켜야 한다는 것이고, 뒤의 두 구절은 여씨는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후도 그 노래의 가사가 의미하는 바를 눈치챌 수 있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농요를 부른 것이므로 뭐라고 질책하기도 어려웠다.

 

조금 있다가, 여씨자제중 한 명이 술에 취하여 아무 말도 없이 술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유장이 바로 그를 쫓아가서 죽여버린다. 여후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유장은 돌아와서 여후에게 보고한다: “술자리를 함부로 떠난 사람이 있어서 신이 군법에 따라 참했습니다.” 여후는 그가 군법으로 술자리를 감독하라고 동의한 바 있고, 군법으로 처리한 것이라고 하니 추궁하기 어려웠다. 이후 여씨들은 유장을 꺼리고 겁냈으며, 유씨에 충성하는 대신들은 유장의 용기있는 행동에 고무되어 유장의 주위로 모여들어 여씨세력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다.

 

여후8년(기원전180년) 칠월 여후는 병세가 악화되어 스스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느낀다. 지략이 뛰어난 여후는 양왕(梁王) 여산(呂産)을 상국에 앉혀 북군(北軍)을 지휘하게 하고, 조왕(趙王) 여록(呂祿)을 상장군(上將軍)에 앉혀 남군(南軍)을 지휘하게 한다. 그리고 그녀는 여산과 여록을 불러 이렇게 당부한다: “여씨가 왕이 된 것에 대하여, 대신들은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는 반드시 병력을 장악해서 황궁을 지켜야 한다. 장례때도 자리를 비워서, 딴 사람이 군대를 장악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후가 죽은 후, 병권은 여산, 여록의 수중에 있었다. 그들은 장안에서 유씨를 제거하고 황제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나 즉시 착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주허후 유장은 당시 장안에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여록의 딸이었으므로 여록, 여산의 음모를 알게 된다. 유장은 형인 제왕(齊王) 유양(劉襄)에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리고, 거병하여 장안으로 오도록 요청한다. 그리고, 그 자신과 동모후(東牟侯) 유흥거(劉興居)가 장안에서 호응하여 여씨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제왕 유양은 즉시 거명하면서 제후왕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여씨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씨성의 제후왕들에게 힘을 합쳐 왕이 되어서는 안되는데도 왕에 오른 여씨를 주살하자고 호소한다. 여산은 이 소식을 듣자, 대장군 관영(灌嬰)을 보내어 유양을 막게 한다. 관영은 형양(滎陽)에 도착한 후 부장들을 불러서 논의한다: “여씨가 대군을 통솔하면서 유씨의 천하를 빼앗으려 한다. 만일 우리가 제왕을 공격하면, 그것은 여씨의 반란을 도우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이들은 상의후 병력을 움직이지 않기로 결정하고, 암중으로 제왕에게 통지하여, 그로 하여금 제후들과 연락하여 시기가 성숙되기를 기다려, 함께 거병하여 여씨를 토벌하자고 한다. 제왕도 통지를 받은 후 잠시 병력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

 

이때 주발(周勃)은 태위의 신분이지만 군영에 들어가지 못하여 군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고, 진평(陳平)은 승상이지만 정무를 전혀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의 관직은 허울뿐이었다. 두 사람은 육가(陸賈)의 권유로 우호관계를 강화하고, 유장등과 같이 대처방안을 논의한다. 이들은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의 아들 역기(酈寄)가 여록과 친한 것을 알고, 역상을 통하여 역기에게 여록을 속여서 이렇게 말하게 한다: “여씨가 왕에 봉해진 것은 여러 신하들이 다 알고 인정한 것이므로 골치아픈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의 문제는 당신이 병력을 거느리고 장안에 남아 있어 사람들의 의심을 사는 것이다. 왜 하루빨리 장군인을 내놓지 않느냐. 군권을 태위에게 넘겨주고, 양왕으로 하여금 상국인을 내놓게 한 다음에 대신들과 결맹하고, 봉국으로 돌아가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면 제왕도 병력을 거두고 돌아갈 것이고, 대신들도 편안할 것이다. 당신도 편안히 왕위에 남아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록은 역기의 말에 설득당하여 사람을 보내어 여산과 다른 여씨들에게 말한다. 여씨들 중에서 반대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록은 역기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팔월, 누군가 관영이 이미 제왕 유양과 한편이 되었다고 보고한다. 이 일을 조줄(曹窋)이 알게 된다. 조줄은 조참(曹參)의 아들이고 조참은 진평, 주발의 옛 전우, 동료이다. 집안끼리 아주 가까운 편이다.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들으니 바로 말을 타고 달려가서 주발과 진평에게 알려준다. 주발은 먼저 북군(北軍)을 장악하려 했으나 군영에 들어가질 못한다. 그런데 이때 부절(符節)을 관장하는 기통(紀通)이 결정적인 순간에 주발에게 기울어, 주발이 북군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역기등은 다시 주발의 분부에 따라 여록을 설득한다: “황제께서 태위에게 북군을 지키게 하고, 그대를 봉국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빨리 장군인을 내놓지 않으면 화가 닥칠 것이다.” 그러자 여록은 즉시 장군인을 내놓고, 병권을 태위 주발에게 넘긴다.

 

주발은 군영에 들어서자 즉시 북군에 명령을 선포한다: “여씨를 지지하면 오른팔을 걷고, 유씨를 지지하면 왼쪽팔을 걷어라.” 전군이 모두 왼쪽팔을 걷는다(左袒). 주발은 이로써 북군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남군(南軍)은 장악하지 못했다. 주발은 유장(劉章)에게 군영을 지키도록 명하고, 다시 조줄에게는 위위(衛尉)로 하여금 여산을 궁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한다. 이때 여산은 아직 주발이 북군을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미앙궁으로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궁문에 도착한 후 궁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주발은 이런 상황을 알고난 후에도 아직 승리한다는 확신은 없어, 공개적으로 여씨들을 제거하라고 선포하지 못하고, 유장에게 이렇게 명한다: “빨리 궁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지켜라.” 유장은 주발이 내어준 1천의 병사를 이끌고 미앙궁으로 진입하다가 여산이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바로 공격한다. 여산은 도망친다.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여산을 따르던 관리들은 혼란에 빠져서 어느 한 명도 나서서 싸우지 못한다. 유장은 여산을 추격하여 낭중령 관아의 화장실에서 그를 죽인다. 이어, 유장은 다시 장락위위(長樂衛尉) 여경시(呂更始)를 죽인다. 그 후 북군으로 돌아와 주발에게 보고한다. 주발은 아주 기뻐하며 말한다: “걱정되던 사람은 여산뿐인데, 이제 그를 죽였으니, 천하가 안정되겠다.” 이어서 여록과 여러 여씨들을 붙잡아 죽인다.

 

이렇게 되자 대신들은 담량이 커지게 된다. 그들은 “이전에 여후가 세운 황상(후소제)은 한혜제의 아들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여씨를 몰아냈는데, 이런 가짜태자를 황제에 오르게 놔두면, 어른이 된 다음 여씨의 일당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유씨 제후왕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을 골라서 황제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대신들이 상의를 거쳐, 대왕(代王) 유항(劉恒)이 한고조의 여러 아들중에서 나이도 가장 많고, 인품도 훌륭하다고 보아, 사람을 대군(代郡, 지금의 하북성 울현)으로 보내어 장안으로 모셔와서 황제로 앉힌다. 그가 바로 한문제(漢文帝)이다.

 

대왕 유항이 황제에 오르고, 제왕 유양이 황제에 오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운명의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유씨에게는 되로치나 메로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한왕조의 최고통치권을 여씨의 손에서 유씨가 빼앗아 온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