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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청군측패(淸君側牌) 팔왕의난편

by 중은우시 2015. 10. 18.

 

팔왕지란은 서진 원강원년(291년)에서 광희원년(306년)까지 16년간 지속된 서진황실의 여러 왕들간의 중앙권력쟁탈전이다. 여기에 참가한 대표인물은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등 팔왕이다. 역사에서는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라 부른다.

 

서진초기 진무제 사마염은 조위(曹魏)의 멸망에서 교훈을 얻어 대거 동성제후왕을 봉한다. 태희원년(290년) 진무제가 죽고 백치황제로 유명한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이 즉위한다. 이후의 개략적인 진행경위는 다음과 같다.

 

- 원강원년(291년), 진무제의 황후일족인 양씨(楊氏)와 진혜제의 황후일족인 가씨(賈氏)간의 권력투쟁이 날로 치열해진다. 황후 가남풍(賈南風)은 사마위, 사마량과 연합하여 금군을 동원해서 태위 양준(楊駿, 양태후의 부친)을 죽이고, 양태후를 폐위킨다. 그 후 사마량과 진혜제의 스승인 위관(衛瓘) 보정(輔政)을 맡아 권력을 장악한다.

 

- 같은 해 유월, 가남풍은 자신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는데 불만을 품고, 사마위와 결탁하여 다시 사마량과 위관을 죽인다

 

- 그 후 사마위가 사마량과 위관을 죽인 후, 사마위의 친구인 기성(岐盛)은 그에게 이 기회를 틈타 권력을 확대하라고 권하나, 사마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이 때, 가남풍은 장화(張華)의 계책에 따라 다시 사마위가 사마량과 위관을 죽일 때 조서를 위조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 사마위를 붙잡아 죽인다. 사마위의 친구인 기성도 삼족을 멸한다. 이제 조정의 대권은 가남풍의 손에 들어가고, 그녀의 일족과 심복들이 권력요직을 차지한다. 오빠인 가모(賈模), 조카인 가밀(賈謐), 외숙인 곽창(郭彰)등이 그들이다. 가남풍은 당시의 명사인 장화는 사공에, 명문거족인 배위(裴頠)를 상서복야에, 배해(裴楷)를 중서령에, 왕융(王戎)을 사도에 앉힌다.

 

- 299년 가남풍은 태자 사마휼(司馬遹)이 자신의 소생이 아니어서 사이가 나빴다. 결국 가남풍은 태자가 모반했다고 무고하여 죽이고자 하나, 장화가 말리는 바람에 시간을 끌다가 우선 사마휼을 태자에서 폐위시키고 금용성에 연금한다. 이때 조왕 사마륜은 당시 태자태부이며 가남풍에 아부해서 가남풍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궁을 지키는 금군을 장악한다. 태자가 폐위되었을 때, 사마륜은 손수(孫秀)와 가남풍일당을 몰아낼 것을 모의한다. 이때 손수는 황태자 사마휼이 지나치게 총명하여, 만일 복위하면 손수와 같은 자들은 중용되지 못할 것이고, 사마륜도 가남풍일당으로 취급되어 중용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만일 태자를 구해주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화가 될 것이고, 가남풍은 반드시 태자를 죽일 터이니 그 때 태자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가남풍일당을 제거하면 된다고 한다. 사마륜도 그의 의견에 따른다. 그 후 사마륜, 손수는 가남풍에게 태자 사마휼을 하루빨리 죽이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얼마후 태자가 금용성에서 피살된다. 사마륜, 손수는 진혜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태자를 죽였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 금군을 동원해 가남풍과 그 일당을 체포한다. 그리고 가남풍은 폐위시켜 서인으로 만들고 건시전에 구금시킨다. 장화, 배위등도 피살되고 많은 관리들이 파면당한다. 가남풍은 나중에 금용성으로 옮겨 구금되었다가 사마륜이 다시 조서를 위조하여 독약을 내려 사사한다. 이 사건이후 사마륜은 스스로 상국(相國)에 오르고, 손수는 병권을 장악한다. 301년에는 조왕 사마륜이 황제에 오르고, 진혜제를 폐위시켜 금용성에 가둔다.

 

- 사마륜이 칭제한 후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고, 허창의 사마경은 장안의 사마옹, 업성의 사마영과 연합하여 사마륜을 토벌한다. 사마륜은 손수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나 패배하는데 이 전투의 사망자가 근 10만명에 달한다. 사마륜은 금용성에 구금되었다가 독약을 받고 사사당한다. 사마륜의 일당인 허초, 사의, 손필, 사염등도 피살당하여 사마륜 일당을 소멸된다. 사마경은 진혜제를 다시 모셔와 황제로 복위시키고, 자신이 대사마가 되어 권력을 농단한다. 사마경은 자신이 황제가 된 것처럼 행동하며 여색에 빠져 정무를 돌보지 않는다.

 

- 익군교위 이함(李含)은 장안으로 가서 황제의 밀지를 받았다고 거짓말로 사마옹에게 사마경을 치도록 요구한다. 태안원년(302년), 사마옹은 이해관계를 교량해본 후 승락하고, 사마경이 죄상을 적은 상소를 올린다. 그리고 병력을 동원하여 도성 낙양을 치겠다고 하면서 당시 낙양에 주둔하고 있던 사마예가 호응한다고 말한다. 사마경은 그 소식을 듣자 바로 장군 동애를 보내어 사마예를 공격하게 한다. 사마예와 100여명의 부하들은 황궁으로 달려가 천자의 명의로 사마경을 공격한다. 사마경의 저택은 불에 타고, 사마경은 피살당한다. 그의 아들은 금용성에 구금된다. 이렇게 사마경의 일당도 소멸된다.

 

- 사마옹은 자신이 계책을 썼는데 오히려 사마예가 정권을 독점하는 상황이 되자, 사마옹은 여러 번 자객을 보내 사마예를 죽이려 하나 실패한다. 대안2년, 사마옹은 부하장수 장방(張方)으로 하여금 7만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영의 20만대군과 함께 낙양을 토벌하게 한다. 진혜제는 사마예를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응전한다. 몇 달간의 전투끝에 사마예가 사마옹, 사마영군대를 물리치고 6.5만명을 포로로 잡는다. 그런데, 전투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보니 사마예의 군대는 양식이 부족하여 그저 낙양성을 지키기만 한다. 장방은 승리를 거두기 힘들다고 보고, 사마옹에게 장안으로 회군할 것을 건의한다. 이 때가 영안원년(304년) 초인데, 조정내에 사공(司空)으로 있던 사마월은 사마예의 군대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일부 금군장령들과 결탁하여 밤에 사마예를 체포하여 금용성으로 보낸다. 진혜제에게 사마월을 중용하도록 하고, 사마예를 면직시키게 한다. 사마영은 이때 조정내외에 명망이 있었고, 군사력도 강했다. 낙양으로 들어온 후 20군을 추가로 봉지로 받고, 승상이 된다. 사마옹은 태재(太宰)의 관직을 받고 사마월은 상서령이 된다. 사마옹은 상소를 올려 사마영이 황위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얼마 후 진혜제는 황태자 사마담을 폐위시키고, 사마영을 황태재(皇太弟)로 삼는다.

 

- 진혜제는 사마월을 대도독으로 삼아, 좌위장군 진진, 유곤, 구희, 성보 및 사마예의 옛부하장군인 상관사와 함께 10만여명이 군사를 모아, 사마영을 토벌하러 나선다. 사마영은 크게 놀라 도망치려 하나, 부하들이 말린다. 그래서 사마영은 사람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하는데, 동안왕(東安王) 사마요(司馬繇)는 황제가 친히 토벌하러 왔으니 투항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마영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참군 최광(崔曠)은 사마영에게 맞서 싸울 것을 권하고, 사마영도 그에 찬동한다. 분무장군 석초(石超)로 하여금 5만의 병사를 이끌고 탕음으로 가게 한다. 사마영은 또한 두 동생 사마광(司馬匡)과 사마규(司馬規)를 사마월의 군중으로 보내어, 업성에 있는 사마영의 부하들은 황제의 군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마월은 그들의 말을 믿고 경계를 소홀히 한다. 석초가 탕음에 도착하여 사마월의 군대를 대파하고, 진혜제는 포로로 잡힌다. 석초는 진혜제를 업성으로보내고, 사마영은 연호를 건무로 고치고, 이전에 사마영에게 투항하라고 권했던 사마요를 죽여버린다. 사마월은 패전할 때 하비로 도망치는데, 당시의 서주도독, 동평왕 사마무(司馬茂)는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사마월은 다시 동해(산동성 담성북쪽)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마영은 종실의 형이 된 입장에서 사마월을 용서하는 조서를 내리고, 조정으로 돌아오라고 하나, 사마월을 겁을 먹고 돌아가지 않는다.

 

- 사마월이 패전한 후, 그의 친동생인 병주자사, 동영공 사마등(司馬騰)은 왕준(王浚)과 함께 사마영이 임명한 유주자사 화연(和演)을 죽인다. 그래서 사마영은 병력을 동원하여 사마등을 토벌하러 나선다. 사마등과 왕준은 외족인 오환(烏丸), 갈주(羯朱)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사마영을 공격한다. 사마영은 새로 임명한 유주자사 왕빈(王斌)과 석초, 이의(李毅)등을 보내어 사마등과 싸우게 하나, 갈주에 격패당한다. 패전소식이 전해지자, 업성은 인심이 흉흉해지고 관료들과 병사들이 속속 도망친다. 사마영도 공황상태에 빠져, 야밤을 틈타 수십명의 장군과 함께 진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도망친다. 갈주의 군대는 사마영등을 조가(朝歌)까지 추격하나, 따라잡지 못하자 포기한다. 낙양은 사마옹의 부하인 장방이 장악하고 있었다. 장방은 진혜제와 사마영을 장안으로 데려가고, 사마옹은 사마영을 황태제에서 폐위시키고, 스스로 백관을 임명한다. 사마옹은 다시 진혜제에게 조서를 내려, 멀리 동해에 있는 사마월을 태부에 임명하여, 조정으로 돌아와 태재 사마옹과 공동으로 보정하게 하나, 사마월이 명을 받들지 않는다.

 

- 사마월은 영흥2년(305년) 다시 대군을 결집시켜 사마옹을 토벌하러 나선다. 그러자, 예전에 사마월이 도망칠 때 받아주지 않았던 사마무는 두려움에 빠져 서주를 사마월에게 넘겨준다. 사마월은 자신의 부하를 서주도독에 임명하고, 사마무를 연주자사로 보내버린다. 사마월의 세 동생도 각지에서 병력을 일으켜, 사마월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많은 관리들이 사마월에게 투신한다. 사마옹은 진혜제를 끼고, 사마월등의 관직을 파직한다. 사마월은 “장방이 황상을 납치하여, 천하의 공분을 샀다. 황상을 다시 모셔와서 낙양을 다시 도성으로 회복시킨다”는 명목으로 계속 진군한다. 사마월은 사람을 보내어 사마옹을 설득하기도 한다. 사마옹이 황제를 낙양으로 보내주기만 하면 사마옹과 천하를 나눠서 다스리자고. 사마옹은 그에 따르려 하나 장방이 반대한다. 장방은 이렇게 제안한다: “장방 자신이 사병 십여만을 데리고 있으니, 친히 진혜제를 낙양의 황궁으로 모시고 간다고 하여 사마월이 딴소리할 수 없게 막고, 그 후에 사마영으로 하여금 업성으로 돌아가 권력을 장악하고, 사마옹은 관중에 남아서 지킨다. 그 후에 장방이 병력을 일으켜 북벌한다. 이렇게 하면, 국면은 안정되고, 천하에서 더 이상 사마월을 도우려는 자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마옹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주자사 유교(劉喬)를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사마영으로 하여금 누포, 왕선등을 이끌고 하교에서 사마월을 막도록 한다. 사마월은 친히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소현까지 서진한다. 유교는 아들 유우(劉佑)를 보내 사마월과 싸우게 하여, 사마월군을 격패시킨다. 이때 범양왕 사마효(司馬虓, 팔왕의 한 명은 아니다)가 전휘(田徽)로 하여금 8백기병을 이끌고 가서 사마월을 돕게 한다. 전휘는 초(譙)에서 유우와 만나서 유우의 부대를 궤멸시킨다. 사마월의 군대는 순조롭게 양무에 주둔한다. 이 소식이 장안에전해지자, 인심이 흉흉해지고, 사마옹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장방의 부하장수인 질보에게 장방을 암살하도록 명하고, 사람을 시켜 장방의 수급을 사마월의 군중으로 보내게 한다. 이렇게 하면 화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옹은 다시 후회하고, 질보가 장방을 죽인 것을 질책하며 질보를 죽인다. 그 후에 조묵(刁默)을 동관으로 보내어 지키게 한다. 장방의 죽음은 사마옹에게 크게 불리했다. 예를 들어, 범양왕 사마효의 부하인 유곤이 장방의 수급을 형양수비장수 여랑에게 보여주니, 여랑은 즉시 투항한다. 사마월의 군대에 있는 선비족장수 임신(壬辰), 기홍(祁弘)등이 조묵이 지키는 동관을 함락시키고 관중으로 들어간다. 그러자 사마옹은 두려움에 빠진다. 다시 마첨, 곽전등을 보내어 패수에서 사마월의 군대를 막게 하나, 마첨의 군대도 패배한다. 사마옹은 단기필마로 장안을 빠져나와 태백산으로 도망친다. 사마월의 군대가 장안으로 진입하고, 임신, 기홍의 선비족부대는 장안을 대거 노략질하고 2만여명을 죽인다. 하교의 사마영군대쪽에서는 사마월을 지지하는 안북장군 왕준이 유근으로 하여금 3백기병을 이끌고 하상으로 가게 한다. 왕선이 출전하나 유근에게 죽임을 당한다. 사마영은 하교를 고수하려 하나, 범양왕 사마효가 선비족 기병을 보내어 하교를 습격하게하니, 누포의 군대가 서쪽으로 도망친다. 신안까지 도망치면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다. 사마월의 군대는 장안에 진입한 후, 양류를 진서장군에 임명하여 관중을 지키게 한다. 광희원년(306년), 사마월은 제후 및 선비족 장수 허부력, 구차숙등의 군대를 이끌고 진혜제를 낙양으로 모셔간다. 진혜제는 사마월을 태부녹상서로 하고, 하비, 제양의 2군을 봉지로 추가로 내린다. 범양왕 사마효도 사공이 된다.

 

- 사마월의 조종하에 진혜제는 진남장군 유홍, 남중랑장 유도로 하여금 사마영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리하여, 사마영은 모친과 처를 버리고, 혼자서 두 아들 여강왕 사마보(司馬普), 중도왕 사마곽(司馬廓)과 함께 조가로 도망친다. 도중에 옛부하장수와 사병 수백명을 모으고, 업성의 옛부하 공사번(公師藩)에게로 가려 하나, 범양장사 유여에게 체포되어 피살당한다. 사마옹의 부하들은 관중을 지키던 양류를 죽이고, 사마영을 도와서 재기하려고 하나 다시 전투에서 패배하고 겨우 장안성 하나만을 지킨다.

 

- 진혜제가 돌연 사망하고 사마치(司馬熾)가 즉위하니 그가 진회제(晋懷帝)이다. 진회제는 등극하자 마자, 사마옹을 사도로 삼는 조서를 내린다. 사마옹은 이를 의심하지 않고 수레를 타고 길을 나서나, 신안 옹곡에 도착했을 때, 남양왕 사마모(司馬模)가 파견한 장수 양신(梁臣)에 의해 수레속에서 목졸려 죽는다. 그의 세 아들도 피살당하여, 사마옹의 후사는 끊기게 된다. 진회제는 얼마후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영가로 고친다. 그리고 태부 동해왕 사마월이 보정을 한다. 결국 팔왕지란의 최종승자는 사마월이고, 그가 조정대권을 장악한다.

 

팔왕의 난은 서진의 멸망을 가져오는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1명의 여인과 8명의 남자의 이야기”이다. 1명의 여인은 바로 가남풍이고, 8명의 남자는 바로 팔왕이다. 기실 여기에 참여한 사람은 8명만이 아니다. <진서>에서는 그중 8명을 모아서 하나의 열전으로 실었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팔왕의 난”이라 칭하는 것이다. 그 안의 이야기는 아주 복잡하다. 그러나, 간단한 한 가지 흐름만 알면 된다. 그것은 바로, A가 먼저 대권을 장악하였다가, B에게 살해당한다. B는 다시 C에게 살해당한다. 이런 식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미국영화 헝거게임에서 차례로 죽임을 당하다가 마지막에 예쁜 여주인공만 남는 것처럼. 사마량은 사마의의 넷째아들인데 사마위에게 피살당한다. 이는 조카손자가 작은할아버지를 죽인 것이다. 사마위는 사마염의 아들인데, 사마충의 처인 가남풍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는 형수가 시동생을 죽인 것이다. 사마륜은 사마의의 아홉째 아들인데, 형인 양왕 사마동이 진혜제에게 상소 올려 사사당한다. 사마경은 사마예에게 죽임을 당하고, 사마예는 사마옹에게 죽임을 당하며, 사마옹은 부하장수 양신에게 죽임을 당하고, 사마영은 범양장사 유여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들 팔왕 중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한 자는 오로지 조왕 사마륜이다. 그는 모사 손수와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을 써서 가남풍으로 하여금 사마휼을 죽이게 만들고, 다시 태자를 위하여 복수하고 사마씨가족정권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제왕, 양왕과 연합하여 영강원년(300년) 사월, 공공연히 병력을 이끌고 궁으로들어가 가남풍과 그녀의 심복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렇게 하여 진혜제 사마충은 사마륜의 괴뢰가 된다. 이렇게 1년동안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하나하나 제거한 후 영녕원년(301년) 정월, 그는 진혜제 사마충으로 하여금 옥새를 내놓게 한 후, “선양”조서를 위조하여 황제에 오른다. 그가 걸은 노선도 바로 “청군측”의 노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