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들이 장기를 둘 때, 차(車)의 득실은 전체 판의 승부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들이 장(將, 중국장기에서는 帥)을 공격하여 위기에 빠지게 되면, 진정한 고수라면 차를 버려서 장을 구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목숨을 부지해야 나중에 승리를 거둘 희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장을 죽여서 게임을 지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사회는 큰 장기판이다. 너무 커서 그 안의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갈 길을 가면서 서로 부딛치면 싸울 뿐, 판 전체를 보지는 못한다. 주차보수의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머리를 많이 굴리고 마음을 세심하게 써서 판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를 바둑으로 말하자면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사소취대(捨小取大) 혹은 위기에 처하면 버려라는 봉위수기(逢危須棄)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십육계에 나오는 복숭아를 대신하여 오얏을 말려죽인다는 이대도강(李代桃僵)도 같은 취지이고, 최근 조국 교수가 말했다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는 육참골단(肉斬骨斷)도 같은 취지라 할 것이다.
황위경쟁을 장기판으로 비유하자면 황자는 장수이다. 상대편의 장수를 죽이던지, 자신이 죽어야 끝나는 장기판과 유사하다. 그는 전체 판을 지휘하여야 하고, 개별 전투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목적은 전체 판의 승리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장수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직진만 할 것이 아니라 우회해야 할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중요한 심복이라도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동한의 광무제 유수(劉秀)의 첫번째 황태자는 유강(劉疆)인데, 원래 모친 곽성통(郭聖通)이 황후여서 황태자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동한정권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유수에게 더이상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揚)의 지지가 절실하지 않게 되자, 유수와 유양의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던 곽성통은 점차 총애를 잃게 된다. 대신 유수와 애정이 깊은 음려화(陰麗華)가 총애를 독차지한다.
게다가 유수 수하의 장군, 권신들은 다수가 완(宛, 지금의 하남성 남양) 출신이어서 음려화와 같은 고향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유수가 젊었을 때 음려화에 완전히 매료되어, “위관당작집금오(爲官當作執金吾), 취처당득음려화(娶妻當得陰麗華)”(관리가 되려면 집금오가 되어야 하고, 처를 취하려면 음려화를 취해야 한다)고 맹세한 바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음려화가 황후에 오르고, 음려화 소생인 동해왕(東海王) 유양(劉陽)이 황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남양출신의 황족, 고관들의 이익을 유지하는데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건무17년(41년), 유수는 곽성통을 황후에서 폐위시키고, 음려화를 황후에 올린다. “자이모귀(子以母貴, 자식의 귀천은 모친의 귀천에 따라 정해진다)”의 원칙에 따라, 이미 황후가 아닌 곽성통이 아들인 유강보다는 황후인 음려화의 아들인 유양이 더 ‘귀’해지게 되었다. 이제 유양이 유강을 밀어내고 황태자에 오르는 것은 명약관화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유수는 황태자를 바꾸지 않고 유강의 지위를 지켜준다. 오히려 유강의 동모동생인 중산왕(中山王) 유보(劉輔)의 봉지를 늘려주는등 애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유강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태자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위험은 시시각각 그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는 유수의 사주를 받았을 질운(郅惲)의 조언을 듣고,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심정을 간절한 글로 써서 올린다. 유수가 바로 허락하지 않자, 재삼재사 사의를 표명하는 간절한 글을 계속 올린다. 그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다. 결국 유수도 그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들여, 유강과 유양의 자리를 맞바꾼다. 유양이 황태자가 되고, 유강이 동해왕이 된 것이다. 결국 유강은 비록 태자의 자리를 잃었지만 더 중요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당현종 이융기는 무장정변을 일으켜 부친 당예종을 황위에 복위시킨 공으로 태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자신의 형인 송왕 이성기가 적장자원칙을 내세워 황위계승권을 주장할까봐 걱정했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 황태자의 자리를 이성기에게 양보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그것도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삼재사 그런 뜻을 표시한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일거양득을 노렸다. 자신이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지 않고, 형인 이성기로부터 확실하게 황위를 포기한다는 의사표명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이융기는 그의 정치적 파트너인 고모 태평공주와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정치고수인 태평공주는 “태자는 형이 앉아야지 동생이 앉아서는 안된다”는 말을 널리 퍼트린다. 그리고, 이융기의 곁에 심복을 심어두고, 수시로 이융기가 잘못하는 것을 수집하여 황제에게 밀고한다. 심지어 술사들을 동원해서 “태자가 황제에 오르려 한다”는 말을 퍼트리게 하여 이융기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까지 퍼트린다. 목적은 황제로 하여금 이융기를 제거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융기와 그의 부하들은 불안에 빠져 대책을 강구한다. 그 중 재상 송경(宋璟)이 먼저 나선다: “동궁(이융기)은 천하에 큰 공을 세웠고, 종묘사직의 진정한 주인이신데, 공주께서는 어찌 바꾸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또 한명의 재상인 요숭(姚崇)와 함께 당예종에게 밀주(密奏)를 올린다: “송왕(宋王) 이성기(李成器)와 그의 아들 빈왕(豳王) 이수례(李守禮)를 외직인 자사(刺史)로 내보내고, 기왕(岐王) 이범(李範)과 설왕(薛王) 이업(李業)을 우림장군에서 동궁속관으로 소속을 바꿔주며, 태평공주를 동도(東都) 낙양으로 옮겨 거주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융기를 지지하는 대신들은 황제에게 태자감국(太子監國, 태자가 국사를 처리하는 것)을 청한다.
태평공주는 이 상황을 보고 격노하여, 이융기가 배은망덕하여, 강을 건너고 나더니 다리를 부숴버리는 격(過河拆橋)이라고 욕한다. 이융기는 당시 태평공주의 세력이 아직 강하여, 아직은 그녀와 직접 싸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아, 황제에게 스스로 글을 올려, “송경, 요숭은 황실을 이간질했으니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해 주십시오”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 왼팔을 다 잘라내면서 겨우 태자의 자리를 지켜냈다. 그가 암중으로 적극 활동한 덕분에, 송경과 요숭은 단지 신주자사, 초주자사로 좌천되는 선에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이융기는 위험한 시기를 잘 넘긴 후, 부친으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우 1년이 지난 개원원년(713년) 팔월, 이융기는 태평공주의 세력을 제거해버린다. 태평공주도 집에서 사사당한다. 당현종 이융기는 그 후 바로 송경, 요숭을 불러들인다. 송경과 요숭은 모두 당송8대현상(唐宋八大賢相)에 꼽히는 인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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