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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양차동풍술(亮借東風術) 차목탑교패(借木搭橋牌)

by 중은우시 2015. 10. 11.

 

농업, 공업, 상업을 경영하건, 아니면 제왕의 사업을 투기적으로 경영하건 차목탑교(나무를 빌려 다리를 놓는다)의 방식은 상책중의 상책이다. 무슨 일을 하건 먼저 어느 정도의 본전을 투입해야 한다. 여불위 같이 제왕지업(帝王之嶪)을 경영하면 일본만리(一本萬利)할 수도 있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처럼 천하를 얻은 후에 부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의 재산을 둘째형과 비교하면 누가 더 많습니까?(某業所就 孰與仲多)” 이것도 역시 본전을 투입한 것이다. 유방은 종일 항우에게 쫓겨서 여기저기 낭패하게 도망쳤고, 하마터면 자신의 부친조차 항우에게 고기죽의 원료가 될 뻔했다. 그러나, 차목탑교는 강을 건너면서도 자신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이다.

 

당명황(唐明皇) 이융기(李隆基)은 당예종(唐睿宗)의 아들이며, 당중종(唐中宗)이 조카이다. 당중종이 살아있을 때건 죽고나서건 천하가 당중종의 계통으로 전승된다면, 황위는 그와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당중종의 조정은 위후(韋后)의 정치간여, 무삼사(武三思)의 권력농단, 안락공주(安樂公主, 당중종과 위후 사이에 태어난 딸)의 황위탈취음모등으로 나라가 나라같지 않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당중종의 아들인 태자(太子) 이중준(李重俊)은 경룡원년(707년) 칠월 신축일, 좌우림대장군 이다조(李多祚), 장군 이사충(李思冲), 이승황(李承况), 독고위(獨孤褘), 사타충의(沙吒忠義)등은 황명을 위조하여 우림군과 천기군 300여명을 동원하여, 무삼사, 무숭훈(武崇訓) 부자를 죽이고, 황궁으로 진격하여 당중종, 위후, 안락공주 및 상관완아등을 죽이고자 한다. 위후, 안락공주와 상관완아는 당중종을 모시고 현무문누각으로 도망친다. 이중준은 현무문누각을 공격할 때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종남산으로 도망치나, 결국 부하들이 그의 목을 잘라 당중종에게 바친다. 그가 황태자에 오른 후, 정변을 일으키기까지 기간은 딱 1년이었다. 황태자로서 이중준은 당중종의 합법적인 황위승계인이고, 이는 조정에서 공인된 자리인데, 왜 그는 황태자가 된지 1년만에 정변을 일으킨 것일까?

 

이중준은 당중종의 셋째아들고 비빈소생이다. 당중종이 복위된 후, 이중준은 706년에 황태자가 된다. 당중종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인 이중윤(李重潤)은 701년에 여동생인 영태군주(永泰郡主), 매부인 위왕(魏王) 무연기(武延基)등이 장역지(張易之)형제가 수시로 궁중을 출입하는 것에 대하여 뒷담화를 했다고 누군가로부터 모함을 받아, 무측천에 의하여 장형(杖刑)을 받고 죽는다. 차남은 이중복(李重福)인데, 위후는 그가 이중윤을 모함할 때 참여했다고 무고하여, 외지에 유배가게 된다. 709년에 당중종은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는데, 그래도 이중복은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당예종이 즉위한 후, 이중복은 병력을 이끌고 정변을 일으켜 황제위를 차지하려 하나 실패하여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넷째아들 이중무(李重茂)는 710년 당중종이 죽은 후, 위후에 의하여 괴뢰황제에 오른다. 위후가 실패한 후 이중무는 황위를 당예종에게 양보한다. 이를 보면 이중준은 이중윤이 먼저 죽고, 이중복이 경성에서 쫓겨나있는 상황하에서, 형제순서에 따라 황태자에 오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황태자가 된 이중준은 태자로서 마땅히 받아야할 존중과 권위를 얻지 못한다. 황태자인 그는 여러 방면의 위협을 받는다.

 

첫째는, 위후와 안락공주가 있다. 위후는 당중종이태자일 때 그에게 시집을 갔고, 684년 당중종 이현이 황제에 등극한 후 황후가 된다. 이해에 당중종은 황제에서 쫓겨나고, 위후는 당중종을 따라 방주(房州)로 간다. 당시 당중종은 두려움과 놀라움에 불안해하고 있었고, 매번 무측천이 보낸 사자가 올 때면 겁을 먹고 자살하려 했다. 그때마다 위후가 그를 다독여준다: “화와 복은 항상 서로 의존한다. 어디 항상 한가지만 오겠는가.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뭘 그렇게 겁내는가.” 이렇게 두 사람은 함께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깊이 정을 쌓았다. 그리하여 당중종은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반드시 그녀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맹세까지 한다. 당중종이 황제로 복위한 후, 극히 멍청하고, 간신을 총애하며, 향락을 탐했다.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졌을 뿐아니라, 무삼사를 이용하여 반대자를 없앴다. 그외에 위후는 자신의 친인척을 대거 등용했고, 심지어 딸인 안락공주가 막부를 개설하고, 관리를 두도록 허용하기까지 한다. 이중준이 태자가 되어 당중종의 합법적인 황위계승자가 되었지만, 그는 위후의 소생이 아니다. 이는 위후의 정치간여욕심과 어긋난다. 그리하여 위후는 그가 황태자에 오른데 불만과 시기가 있었고, 황태자에서 쫓아내려는 생각이 날로 강해졌다.

 

안락공주는 위후의 막내공주이다. 무삼사의 아들인 무숭훈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므로, 안락공주는 이씨황실의 공주이면서, 무씨집안의 며느리이다. 바로 황실과 무씨집안간의 접점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지녔다. 안락공주는 당중종과 위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왕후장상과 권신들도 그녀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그녀는 자주 조서를 스스로 쓴 다음, 한 손으로 조서의 글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당중종의 손을 잡고 끌어 조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안락공주는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았을 뿐아니라, 사법절차에도 관여했다. 좌대시어사 원종일이 안락공주의 집에 민간자녀를 붙잡아 와서 노비로 삼은 종을 붙잡아 하옥시켰는데, 안락공주는 당중종으로 하여금 그 종의 죄를 면해주게 한다. 권력의 맛을 본 안락공주는 일개 공주에 머무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황위계승자가 되고자 한다. 황태자 이중준은 위후의 소생이아니므로, 안락공주는 자주 이중준을 “노(奴)”라고 부르며 욕했다. 심지어 당중종에게 이중준을 폐위시고 자신을 황태녀(皇太女)로 삼아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둘째는, 무삼사 부자가 있다. 무측천이 비록 죽었지만, 무삼사를 우두머리로 하는 무씨집안의 세력은 제거되지 못했다. 오히려 갈수록 강해졌다. 무삼사는 위후, 상관완아와 사통하며, 서로 결탁하여, 심복들을 거느려 조정을 좌지우지했고, 반대파를 제거했다. 신룡정변이후, 시중 경휘, 부마 왕동교등이 무씨잔여세력을 제거하고 무삼사일당을 뿌리뽑고자 계획한다. 나중에 신룡정변에 공을 세운 장간지등을 쫓아내고, 얼마 후 다시 무고하여 죽인다. 옹주사람인 무월장, 고진등은 무삼사부자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상소하는데, 무삼사는 그들의 죄를 처벌하도록 요구한다. 관련부서에서는 그의 뜻에 맞추어 위월장을 참수하고, 고진은 영남으로 유배보내기로 한다. 황문시랑 송경등은 위월장이 범한 죄는 참형에 처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무삼사는 대노하여, 송경도 외지로 좌천시켜버린다. 무삼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못해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안다.” 일시에 무삼사의 기세는 등등하게 된다. 태자 이중준을 대하는데에 있어서, 무삼사는 태자가 올린 글을 이용하여 경휘의 삼족을 멸하고, 다시 안락공주를 통하여 그를 폐위시킬 음모를 꾸민다. 무숭훈은 부친 무삼사의 세력과 안락공주의 부마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이중준을 못살게 군다. 이중준이 황태자에 오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숭훈은 태자빈객(太子賓客)이라는 관직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마구(馬球)같은 저급한 놀이로 이중준을 기쁘게 해줄 줄만 알았지, 그를 가르치고 보호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무숭훈도 자주 안락공주와 같이 이중준을 못살게 굴고, 그를 ‘노’라고 불렀다. 이중준은 이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다.

 

셋째는 상관완아이다. 그녀는 당고종때의 재상 상관의(上官儀)의 손녀이다. 664년, 상관의는 당고종의 지시로 무측천을 폐출시키는 조서를 썼다가, 나중에 무측천에게 피살당한다. 막 태어난 상관완아는 모친 정씨(鄭氏)와 함께 액정(掖廷)에 보내어진다. 상관완아는 시서를 익혔고, 관리로서의 업무도 배웠으며, 총명하고 기민하기 이를데 없었다. 677년, 무측천은 그녀를 궁중으로 부르며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리고 궁중의 조서를 관장한다. 얼마후 상관완아도 무측천의 뜻에 어긋나게 조서를 써서 죽을 죄를 짓는다. 그러나 무측천은 그녀의 재주를 아껴 특별히 사면하고, 경면(黥面)의 형만을 내린다. 그후 상관완아는 무측천을 잘 모시고, 그녀의 뜻을 잘 따라, 무측천의 환심을 산다. 696년부터 백관이 올린 문서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정무에 참여하여 권세가 날로 커진다. 당중종이 즉위한 후에는 소용(昭容)에 봉해진다. 상관완아는 위후에 충성을 다했을 뿐아니라, 무측천의 일을 가지고 위후를 부추긴다. 그리고 무삼사와는 사통하여 음란한 짓을 저지른다. 매번 황제의 칙명을 하달할 때면 다른 일을 가지고 황실을 끌어내리고 무씨집안을 끌어올리곤 했다. 이중준은 그녀를 아주 미워했고, 나중에 황성을 공격할 때는 아예 상관완아의 이름을 특정해서 부르며 찾아다니기까지 한다.

 

위후, 안락공주, 무삼사 부자 및 상관완아가 조직한 정치적 실체는 심각하게 이중준의 황태자지위를 위협했다. 일국의 군주로서 당중종은 멍청하였고, 위후를 방종하게 내버려두고, 안락공주를 극히 총애하는 바람에, 황태자 이중준에 대하여 전혀 보호작용을 하지 못한다. 결국 당중종도 위후와 안락공주에 의하여 독살된다. 이들 위협과 압력하에, 이중준은 자신의 황위계승권이 도전을 받고 있고, 자신의 황태자라는 신분은 아마도 이들 권력자들에 의하여 폐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중준은 자신의 황위계승권이 도전을 받는 것을 보자, 자신의 황태자 자리가 결국은 권력자들에 의하여 쫓겨날 것이라고 여긴다.

 

진인각 선생은 <당대정치사술논고>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중준이) 거병을 하게 된 이유는 실로 무삼사부자 및 안락공주등의 괴롭힘과 질시를 당해, 그의 황위계승권이 불확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결국 이런 모험적인 일을 벌이게 된 것이다”

 

당중종의 황태자 이중윤은 반란을 일으켰다 죽임을 당하지만, 아직도 당중종의 아들은 이중복, 이중무의 2명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더라도 이융기에게 순서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융기는 ‘광복사직(匡復社稷)’의 꿈이 있었고, 결코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지 않겠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만으로 성공을 얻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실망의 와중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보였다. 상왕(相王)인 그의 부친 이단(李旦)의 존재를 생각해낸 것이다. 그의 부친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이단은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의 여덟째아들로 막내아들인데, 당고종과 무측천(武則天)사이에 태어난 4명의 아들 중 하나로 당중종(唐中宗) 이현(李顯)과 동모소생이다. 당고종과 무측천의 사이에서 태어난 4아들은 모두 황태자에 오르는데, 위의 두 형은 황제에 오르지 못한다. 황제에 오른 인물은 형인 당중종 이현과 그 두 명이다. 그는 원래 당고종이 죽은 후 무측천이 황제에 오르기 전에 당중종을 대체하여 684년 22살의 나이로 황제에 오른 바 있다(당예종). 그리고, 무측천이 황제에 올라 이당(李唐)을 무주(武周)로 바꾸어 왕조가 바뀐 후, 무측천은 그를 황태자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이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왕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리하여, 황태자의 자리는 그의 형인 당중종 이현에게 넘어갔다. 그리하여 당예종 이단은 천하를 형에게 양보했다는 미명(美名)도 얻고, 무측천의 무주정권에 연루되지도 않아 청명(淸名)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중종도 황제에 오른 후 황위를 양보한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에 그를 황태제(皇太弟)에 앉히려 하나 그가 또 다시 사양한다. 그러다보니, 당중종이 죽은 후, 천하의 인심을 얻고 있었다.

 

이융기는 이런 부친을 가졌다는 것에 깊이 감사해야 했다. 이처럼 간판으로 내세울 수 있는 부친을 가졌다는 것은 고아과부(위후와 이중무)를 핍박하여 천하를 빼앗을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된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목표를 이루러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었고, 단계를 나누어 진행해야 했다.

 

첫번째 단계는 부친 이단을 원래 그가 앉았던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 된다. 두번째 단계는 그가 황태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다만, 당예종의 장남 이성기, 차남 이성의가 있으므로 그 난관을 넘어야 했다. 그와 함께 무장반란에 참여한 일당들을 황제가 된 부친의 신변에 심어놓고, 계속하여 그의 공로를 내세워 황태자로 삼도록 간청하여 황태자로 세우게 해야 했다. 세번째 단계는 부친으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모두 이루려면, 그가 끌어모은 ‘재용지사(才勇之士)’와 평소에 교분을 맺어놓은 좌우우림군, 만기영의 인원들만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승부의 관건은 이융기의 고모이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태평공주(太平公主)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세력을 분화시키고, 종친과 대신들의 지지도 얻어내야 했다. 그래야 그는 당형인 이중준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모두 생각한 이융기는 자신의 병력을 끌어모으는 동시에, 고모인 태평공주를 찾아간다. 위후가 권력을 농단하고,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태평공주와 그녀의 아들인 위위경(衛尉卿) 설숭간(薛崇暕)은 전혀 망설임없이 이융기의 요청에 따라 반위후진영에 가담한다. 이제 이융기는 실력이 배가되었다. 그러나, 이융기도 잘 알고 있었다. 태평공주가 그에게 가담한 것은 그녀 나름대로 원하는 목적이 있고, 그것을 얻어내지 못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이 때는 그녀와 손을 잡아야 했다. 나머지는 모두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다

 

이융기는 당중종 경룡4년, 즉 당예종 경운원년(710년) 유월 경자일부터 행동을 개시한다. 그의 일당인 갈복순(葛福順), 이선부(李仙鳧), 유유구(劉幽求)등은 검을 뽑아들고 우림영으로 쳐들어간다. 먼저 위후가 파견하여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위선(韋璿), 위파(韋播) 및 위씨에 빌붙은 고숭(高嵩)등을 죽이고, 그들의 수급을 높이 걸어 병사들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위후가 선제(先帝, 당중종을 가리킴, 이때는 이미 이중무가 신황제로 즉위하였기 때문임)를 독살하여, 사직이 위기에 처했다. 오늘 밤에 같이 위씨일당을 주살하고, 상왕을 황제로 올려 천하를 안정시켜야 한다. 만일 딴 마음을 먹는 자가 있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사서에는 “우림의 병사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고 되어 있다. 생각해보라.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나서서 그에 반대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여기서 손을 들어 동의하기만 하면, 나중의 부귀영화가 보장되지 않는가. 상왕을 옹호하는 병사들이 대거 황궁으로 몰려들어가서, 도망치는 위후를 죽여버리고, 화장대 앞에서 안락공주를 죽인다. 그 후에 위씨, 무씨세력을 모조리 제거한다.

삼일이 지난 유월 갑진일, 이융기, 태평공주의 주도하에 당중종 관이 있는 태극전에서는 이중무가 상왕에게 황위를 선양하는 의식이 거행된다. 이단은 첫번째 등극이후 27년만에 두번째로 황제에 등극한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이 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갑진일, 소제(少帝, 이중무)는 태극전의 동쪽귀퉁이에서 서쪽을 향하고, 상왕은 관의 옆에 서 있었다. 태평공주가 말한다: ‘황제가 황위를 숙부에게 양위하고자 하는데, 괜찮겠느냐?’ 유유구가 말한다: ‘국가에 어려움이 많은데, 황제께서 인효하여, 요, 순을 본받으려 하니 성의가 있고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상왕이 황위를 대신 맡으시면 임무가 중하며, 자애가 더욱 두터울 것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상왕에게 양위한다. 그때 소제가 여전히 어좌에 앉아 있자, 태평공주는 ‘천하의 마음이 이미 상왕에게 돌아갔다. 이곳은 네가 앉을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아래로 끌어내린다. 예종이 즉위한다.”

 

이제 이융기의 계획에서 제1단계는 성공했다. 이어서 유유구는 황제에게 이렇게 간한다: “신이 듣기로 천하의 화란을 제거한 사람은 마땅히 천하의 복을 누려야 한다고 합니다. 평왕(이융기)은 사직을 위기에서 구하고, 군왕을 어려움에서 구했으니 공으로 따지면 더 클 수가 없습니다.” 이융기의 일당들과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아는 다른 신하들도 모두 이융기를 황태자로 앉히도록 권하자, 당예종은 어쩔 수 없이 공로를 기준으로 태자를 세운다는 원칙에 따라 유월 정묘일에 이융기를 황태자에 정식 책봉한다.

황태자에 오른 이융기가 해결해야 할 일은 세 가지가 남았다. 하나는 당예종 이단의 적장자이자 그의 형인 송왕(宋王) 이성기(李成基)와의 관계이고, 둘은 황제인 당예종과의 관계이며, 셋째는 태평공주와의 관계이다. 앞의 두 가지는 해결하기 비교적 쉽다. 그의 심복을 조정에 많이 심어놓으면 된다. 그러나 태평공주를 상대하는 것은 골치아팠다.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그는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하는데 성공하고, 당예종으로부터 재위 2년만에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황제위를 양보한 당예종은 고조부인 당고조 이연과 마찬가지로 적막하고 무료한 태상황의 생활을 보내야 했다. 당예종은 중국역사상 황제로 2번 등극하고 황제위를 3번이나 양보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모친 무측천에게 양보하고, 다음으로 형인 당중종에게 양보하고, 마지막으로 아들 이융기에게 양보한 것이다. 마침내 이융기는 원하던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생각해보면, 이융기가 당초 무장반란을 일으킨 의도가 단순히 부친을 황제에 앉히고, 다시 그의 형이 황제위를 물려받고, 또 다시 조카가 물려받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천하의 인심을 얻고 있던 부친을 내세워 부친이 황제의 자리에 앉힌 다음, 자신이 황태자가 되어, 황제에 오르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방안이 비록 예법(禮法)에는 어긋나지만, 정리(情理)에는 부합한다. 자고이래로 공로를 기준으로 하여 황태자에 오른 선례도 많기 때문이다. 만일 이융기가 황제에 오르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종일관 이융기가 부친을 내세운 것은 단지 부친의 명성을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거사 전에 그가 상왕에게 말한 것은 그의 진실된 마음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사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는 것입니다. 일이 성공하면 복은 왕(상왕)께 돌아갈 것이고, 일이 실패하면 제가 죽고, 왕에게까지 연루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