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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 시살부형패(弑殺父兄牌) 남북조편

by 중은우시 2015. 8. 4.

 

진나라때 만리장성 바깥에는 흉노(匈奴)가 있었다. 흉노의 군주는 선우(單于)라 부르는데, 당시의 두만선우(頭曼單于)는 새로 맞아들인 어지(瘀氏)를 총애하면서, 태자 묵돌(冒頓)을 폐위시키고 어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새로 태자에 올릴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두만선우는 악독한 방법을 생각해 내는데, 태자 묵돌을 월지(月氏)에 인질로 보낸 후, 며칠 후 바로 월지를 공격하였다. 그렇게 되면 월지에서 인질 묵돌을 죽일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묵돌은 말을 훔쳐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다. 묵돌의 이러한 용감함에 흉노의 신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따른다. 묵돌은 수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하면서 명적(鳴鏑, 소리를 내는 화살)을 쏘면서 명적이 향하는 곳을 모두 쏘도록 하고, 만일 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참하겠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아끼는 애마에 명적을 쏘고는, 자신을 따라 쏘지 않는 자를 참했다. 또 한번은 자신이 사랑하는 애첩에게 명적을 쏘고는, 자신을 따라 쏘지 않는 자를 참했다. 그러자, 수하들은 그가 명적을 쏘면 조건반사적으로 활을 쏘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부친 두만선우와 사냥을 나섰는데, 그가 두만선우를 명적으로 쏘았다. 수하들도 모두 화살을 쏘아 두만선우는 즉사한다. 그는 어지와 동생을 죽이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도 죽이고 선우에 오르니, 그 해가 바로 진시황이 죽은 다음 해이다. 그가 바로 백등산에서 한고조 유방을 포위하고, 여후를 모욕하는 국서를 보낸 인물이다.

 

송문제 유의륭(劉義隆)은 남북조시대 유송(劉宋)왕조의 세번째 황위로 송무제 유유(劉裕)의 셋째아들이며 30년간 재위한다. 그는 일생의 정력을 북위(北

魏)와의 투쟁에 쏟았으며, 정무에 공정하여 조야가 화목했다. 그러나, 그의 태자인 유초(劉劭)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무당 엄도육(嚴道育)을 시켜 무고술(巫蠱術)을 써서 옥으로 황상의 모습을 깍은 후 함장전에 묻어두고, 밤낮으로 저주했다. 이 일이 발각되어 부황으로부터 질책을 받고서도 개과천선하지 않고, 엄도육을 동궁에 숨겨둔다. 송문제가 유초를 폐위시키려 하자, 유초는 그 소식을 먼저 알고 선발제인(先發制人) 으로 먼저 동생 유준(劉濬)과 공모하여 원가30년(453년) 정월 이십일일, 조서를 위조하여 “노수(魯秀)가 모반하였으니, 네(유초)가 병력을 이끌고 진압하라”는 내용으로 만들어 장초지(張超之), 소빈(蕭斌), 원숙, 은중소, 왕정견등과 함께 동궁의 병력 2천여명을 이끌고 황궁으로 들어간다. 이때 송문제는 상서복야 서담지(徐湛之)와 태자를 폐위시키는 일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유초의 부장 장초지가 궁전으로 들이닥친다. 유의륭은 본능적으로 등자(凳子)를 들어 막았으나, 먼저 다섯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결국 장초지에게 피살당한다. 유초는 부친을 죽이고 황위에 오르니 송원제(宋元帝)이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100일가량 있다가 송문제의 셋째아들인 유준(劉駿)이 이끄는 토벌군에 피살당한다. 유준이 황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중국고대에 가장 음탕한 황제로 알려진 효무제(孝武帝)이다.

 

진후주(陳後主) 진숙보(陳叔寶)는 왕위를 힘겹게 얻어낸다. 부친 진선제(陳宣帝) 진욱(陳頊)은 아들만 42명을 두어 중국역사상 아들을 가장 많이 둔 황제이다(딸이 몇 명인지 불분명하다). 참고로 기록을 보면, 송휘종이 80명(아들 38명, 딸 42명), 당현종이 59명(아들 30명, 딸 29명), 강희제가 55명(아들35명, 딸 20명)이다. 진선제의 병이 위중할 때 태자 진숙보와 동생 시흥왕(始興王) 진숙릉(陳叔陵) 그리고 동생 장사왕 진숙견(陳叔堅)등이 병상을 지킨다. 진숙릉은 부친이 병석에 있을 때 딴 뜻을 품고 전약리(典藥吏)에게 약도(藥刀)가 무디다고 날카롭게 갈아놓게 한다. 태건14년 정월 초5일, 진선제가 붕어한다. 진숙릉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밖으로 나가 칼을 가지고 오라고 명한다. 그러나, 심복들은 그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의장용으로 쓰는 목검을 차고 오는 바람에 정변을 일으키지 못한다. 다음 날인 초6일, 부친의 시신을 앞에 두고 진숙보는 땅바닥에 엎드려 곡을 하고 있었는데, 진숙릉이 약도를 들고 진숙보를 베어가고 뒷목부분을 찌른다. 현장에 있던 진숙보의 생모 유황후, 태자의 유모 오씨, 진숙견등이 달려들어 진숙릉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궁에서 도망쳐 나와 반란을 일으키지만 장군 소마가(蕭摩訶)에게 진압당한다.

 

북위(北魏)의 개국황제 탁발규(拓跋珪)는 처음에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만년에는 주색에 빠져 정무에 소홀히 하고, 대신들을 마구 죽여 원성을 샀다. 409년 십월 십삼일, 탁발규는 차남 탁발소(拓跋紹)의 모친인 하부인(賀夫人)이 잘못을 저지르자 궁중에 연금시키고 죽이려고 하였다. 이 탁발소는 문제아였다. 그는 태아가 어떤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임산부를 죽여 배를 가른 적이 있다. 이 일로 탁발규는 대노하여 탁발소를 우물에 거꾸로 매달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끌어내 준 적이 있다. 하부인은 비밀리에 아들 탁발소에게 연락하여 구해달라고 요청하고, 탁발소는 수위와 환관과 내통하여 그날 저녁 사람을 이끌고 담장을 넘어 천안전(天安殿)으로 뛰어든다. 탁발규를 모시던 시위가 ‘도적이야’라고 고함을 지르자, 탁발규는 잠에서 깨어 활과 요도를 찾았으나 모두 손에 잡히지 않아, 결국 탁발소에게 시해당한다. 이때 태자인 형 탁발사(拓跋嗣)는 궁에서 쫓겨나 있었다. 태자를 세우면 생모를 죽이는 북위의 법도에 따라 탁발사가 태자에 오르면서 생모인 유귀인을 죽였는데, 이를 알고 태자가 비통해 하자, 탁발규가 노하여 그를 궁에서 내보낸 것이다. 탁발소가 부황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탁발사는 병력을 모아 탁발소를 제압하고 탁발소 모자를 죽여버린다. 탁발소가 죽을 때 나이 겨우 16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