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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 시살부형패(弑殺父兄牌) 송명편

by 중은우시 2015. 8. 6.

 

송나라를 건국한 송태조 조광윤은 960년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오른 후 17년간 황제로 지내다가, 976년 십월 십구일 밤에 갑자기 사망하는데, 그가 병을 앓았다는 기록은 없다. <송사>에는 그의 죽음을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황제께서 만세전에서 붕어하시니 나이 오십이었다.” “두태후의 명을 받들어, 송태종(조광의)에게 황위를 전한다.”

 

송태조의 사망과 송태종의 즉위와 관련하여서는 역사상 “촉영부성(燭影斧聲)”이라는 천고의 수수께끼가 전해 내려온다. 조광윤이 죽을 때 조광의만이 곁을 지켰고, 바깥에 있던 태감이나 궁녀들은 춧불에 일렁이는 사람의 모습과 조광윤이 옥도끼(玉斧)를 휘두르며 ‘좋다. 좋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조광의가 형인 조광윤을 죽인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역대 이래로 논쟁이 계속되지만 정설이 없는 이슈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보면 조광의가 조광윤을 시해하였을 가능성이 좀더 커 보인다:

 

그 이유는 심상치 않은 촉영부성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외에, 조광윤에게는 이미 성년(30살, 26살)이 된 아들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례를 벗어나 동생인 조광의가 황위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조광의는 등극한지 5년이 지난 후에 소위 ‘금궤지맹’이라는 것을 자신의 즉위를 합법화하는 근거로 내놓는다. 그 내용은 961년 조광윤, 조광의, 조정미의 모친인 두태후는 병이 위중할 때, 조광윤을 불러 “어린 황제를 내세워 망국에 이른 후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황위를 동생 조광의에게 물려주고, 조광의는 다시 동생 조정미에게 물려주며, 조정미는 다시 조광윤의 장남인 조덕소에게 물려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 조광윤도 동의하여 그 자리에 입회해 있던 당시 승상 조보(趙普)에게 그 내용을 적어서 금궤에 넣어두게 했는데, 조보가 조광윤이 죽은지 5년이 지난 후에 조광의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조보의 말 이외에는 아무런 방증이 없고, 조보는 조광윤이 죽은 후 바로 이를 내놓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험해진 5년후에 비로소 이를 내놓았다는 점에서 진위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금궤지맹 당시 조광윤의 나이 겨우 34살에 아주 건장했고, 조광윤의 장남 조덕소가 이미 14살이어서….후주와 같은 상황을 우려한다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기도 하다.

조광의가 황위에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광윤의 장남 조덕소가 자살하고, 차남 조덕방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 뿐 아니라, 조정미는 모반의 죄를 뒤집어 쓰고 유배를 간다. 그런데, 그 후의 진행도 재미있다. 조광의의 장남은 부친의 행위에 불만을 품고 궁중에 불을 지르는등 반항을 하여 할 수 없이 차남을 태자에 봉하나, 차남은 집안싸움끝에 첩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하여 막내아들이 황위를 물려받으니 그가 송진종이다. 북송의 황제는 송태종의 후손이 오른다. 그런데, 북송멸망 후 겨우 남쪽으로 도망친 조구는 남송을 개국하여 송고종이 되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는 송태종 조광의의 후손에서 후계자를 찾지 않고 송태조 조광윤의 둘째아들 조덕방의 6대손에게 황위를 물려주니 그가 송효종이다. 남송은 송태조의 후손이 황제에 오른다.

 

서하(西夏)의 개국황제 이원호(李元昊)는 당항족으로 원래 탁발씨였다. 말년에 주색에 빠져 민심이 이반하고 조정의 기강도 흔들린다. 그는 황후 야리씨(野利氏)와 태자 이녕령가(李寧令哥)를 폐위시키고, 태자와 결혼한 며느리 몰이씨(沒移氏)를 새로이 황후로 삼는 황당한 일을 저지른다. 중국역사상 며느리를 빼앗은 군왕은 네명 중 한 명이 된다: 위선공(衛宣公), 당현종(唐玄宗) 이융기, 후량태조(後梁太祖) 주온, 그리고 이원호.  1048년 정월 초이틀, 이원호는 술에 취해 궁으로 돌아온다. 이녕령가는 그가 술취한 틈을 타서 코를 베어버리고, 이원호는 실혈과다로 사망한다. 이녕령가도 이원호의 정부인 몰장흑운(沒藏黑雲)과 그녀의 오빠인 국상(國相) 몰장와방(沒藏訛龐)의 반간계에 당해 주살당하고, 결국 이원호와 몰장흑운의 사이에서 태어난 1살짜리 막내아들 이량조(李諒祚)가 황제에 오른다.

 

봉건시대에 황제인 부친을 시해하려고 시도한 마지막 사건은 명나라 명성조 영락21년(1423년)에 발생한다. 명성조 주체의 셋째아들인 주고수(朱高燧)는 주고치(朱高熾)와의 태자다툼에서 실패한 후, 그해 오월, 명성조가 병석에 눕자, 호위지휘 맹현(孟賢), 흠천감관(欽天監官) 왕사성(王射成) 및 내시 양경(楊慶)의 양자와 모의하여, 약에 독을 넣어 명성조를 죽이려고 계획한다. 동시에 조서를 위조하여 주체가 죽으면 바로 조서를 반포하여 태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태자가 되어 황제에 오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음모는 가담자중 한 명이 주체에게 고변하는 바람에 발각되고 만다. 태자 주고후가 동생 주고수를 극력 비호해주어 주체는 주고수를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부친을 시해하려 했다는 오명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한편 야사에서는 청왕조의 옹정제 윤진이 부친 강희제의 유조를 위조하였다는 설 외에 윤진이 강희제를 독살했다는 판본도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