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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이세탈인술(以勢奪人術) – 적장신분패(嫡長身分牌)

by 중은우시 2015. 7. 28.

 

맹자의 말에 “지혜가 있어도 기세를 이기지 못한다(雖有智慧, 不如乘勢).” 손자는 이런 말도 했다: “물이 거세면 돌도 쓸어갈 수 있다(激水之疾, 至於漂石)” 아무리 머리를 써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세는 어찌할 수는 없는 법이다.

 

황자들간의 황위다툼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춘추>에서 정한 적장자(嫡長子)계승의 원칙이다. 한나라때 <춘추>를 재판의 준거로 삼았던 <춘추결옥(春秋決獄)>에서 보듯이 <춘추>의 원칙은 중요했다. <춘추>에서 규정한 적장자계승의 원칙은 이러하다: “후계자를 정할 때는 적자인지 여부를 따져야지 나이가 많은지 여부를 따져서는 안된다 적자들 중에서는 나이가 많은지 여부를 따져야지 어진지 여부를 따져서는 안된다(立子以嫡不以長, 立嫡以長不以賢).” 중국고대에 원, 청과 같은 이민족이 세운 왕조를 제외하고는 적장자계승원칙이 중국에서 3천여년간 지속되어왔다.

 

그러므로, 황위계승전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적장자”라는 신분이다. 적장자의 신분을 등에 업고 군왕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사람은 바로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한 은왕조의 마지막 군왕 주왕(紂王)이다. <사기.은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을(帝乙)의 장자는 미자계(微子啓)이다. 계의 모친은 천인이어서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 어린 아들 신(辛)의 모친은 정후(正后)여서 신이 후계자가 된다. 제을이 붕어한 후 아들 신이 왕에 오르니 제신(帝辛)이고, 천하에서는 주(紂)라고 불렀다.”

 

서주초기의 주공단(周公旦)은 주무왕(周武王)의 동모제(同母弟)로서 무왕이 죽은 후 나이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각종 반란을 진압하는 등 서주정권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워 최고의 현상(賢相)으로 후세에 전해진다. 그런데, 노신 같은 사람들은 관련기록의 행간에서 주공이 성왕에게 권한을 주지 않고 무시하며 심지어 조카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뜻을 가졌다고 본다. 다만, 관숙, 채숙등 여러 동생이 의심하고, 소공석과 같은 대신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천하대권을 성왕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적장자가 승계하여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즉 세(勢)를 주공 같은 인물도 어찌해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주유왕(周幽王)은 포사를 얻은 후 그녀를 총애한다. 포사가 아들 희백복(姬伯服)을 낳자 주유왕은 포사와 희백복을 더욱 총애하여, 왕후 신후(申后)와 신후 소생의 태자 희의구(姬宜臼)를 쫓아내고, 포사를 왕후로 삼고 희백복을 태자로 삼는다. 이로 인하여 서주(西周)는 멸망하고, 제후들이 폐태자 희의구를 옹립하니 그가 주평왕(周平王)이고 동주(東周)가 시작된다.

 

진(晋)나라의 태자 신생(申生)은 어려서부터 부친 진헌공(晋獻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게다가 서모 여희(驪姬)의 괴롭힘을 받아 결국 10여년만에 적장자이지만 후계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태자를 바꾸더니 삼세가 불안해졌고(晋易太子, 三世不安)”(이사의 말), 이국을 전전하던 신생의 동생 중이(重耳, 晋文公)가 돌아와 수습하고 나서야 안정된다. 이 사건들은 모두 적장자를 폐위시키게 되면 나라에 혼란이 올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긴다.

진시황의 사후 장남 부소(扶蘇)는 호해, 조고, 이사의 음모하에 자결함으로써 원래 자신이 올라야 할 진이세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호해 본인도 음모를 꾸밀 때 “형을 폐하고 동생이 오르는 것은 불의(不義)이다”라고 토로했듯이 적장자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인의 마음 속에 뿌리깊었다. 그 후, 진나라말기 진승오광의 난때 진승, 오광이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중의 하나도 “호해가 진이세에 올라서는 안되었고 공자 부소가 진이세가 되어야 했다”였으며, 자신이 부소라고 사칭까지 한다. 이를 보면 당시 신하들과 백성들의 마음 속에 적장자 부소가 후계자가 되었어야 마땅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은 여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유영을 태자로 세우지만, 총애하는 척희의 아들 유여의로 바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신 장량, 주창, 숙손통등이 극력 반대하며, ‘적장자’승계원칙을 주장하는데 이때 근거로 드는 것이 주유왕, 진헌왕 그리고 진시황의 사례였다. 즉, 적장자를 후계자로 삼지 않았을 경우에 나라가 혼란에 빠지거나 망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의 제도를 정비한 숙손통은 “태자는 천하의 본(本)입니다. 본이 한번 흔들리면 천하가 흔들립니다. 어찌 천하를 가지고 장난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결국 유방은 태자를 바꾸지 못하고 만다.

 

동한말기 조비와 조식이 위왕세자의 자리를 놓고 벌인 후계다툼은 상당히 치열했다. 조식 본인의 칠보시에 따르더라도,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煮豆燃萁, 相煎何急)” 지경에 이르렀다. 조비가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조식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심계가 뛰어난 점도 있지만, 적장자(嫡長子, 그의 형인 장남 조앙은 이미 죽었다)라는 신분상의 우세가 큰 역할을 한다.

 

당시 조정의 중신들은 대체로 적장자승계를 주장했다. 특히 상서 최염(崔琰)은 형의 딸이 조식의 처라는 인척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식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개인에게는 이롭겠지만, “<춘추>의 뜻은 장남을 후계자로 하는 것입니다. 오관장(즉, 조비)은 인효하고 총명하니 대통을 이을 만합니다. 나 최염은 죽음으로 그를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상서복야 모개(毛玠)는 “가까이는 원소가 적서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다가 집안과 나라를 거덜냈습니다”라고 말하고, 승상부 동조(東曹) 형옹(邢顒)은 더욱 직접적으로 말한다: “서자로 종사를 잇게 하는 것은 선대에 꺼렸던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깊이 살펴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지만 조조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는 신하들을 모두 물리고 가후(賈詡)만 남게 해서 후사에 관한 일을 물어보는데, 가후는 못들은 척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조조가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물어보는데 경은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그제서야 가후가 대답한다: “신이 곰곰히 생각하느라 듣지 못했습니다.” 조조는 가후가 이끄는대로 끌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단 말이냐?” “원본초(袁本初), 유경승(劉景升) 부자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조조에게 장남을 폐하고 동생에게 물려주었다가 망한 당대의 인물 원소, 유표를 다시 거론한 것이다. 신하들이 이렇게 나오자 조조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적장자라는 지위가 적장자에게는 황위승계의 가장 유력한 패가 되지만, 그의 경쟁자에게는 넘사벽이 된다. 당고조 이연에게는 장손황후와의 사이에 낳은 적자(嫡子)가 4명 있었고, 당나라를 개국한 후에 생존해 있는 적자는 장남 이건성(李建成), 차남 이세민(李世民), 막내 이원길(李元吉)이 있었다. 이연은 어느 정도 학문과 역사에 조예가 있었으므로 아무런 망설임없이 장남 건성을 태자로 삼는다. 이건성은 성격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형제들에게도 잘 대했다. 뿐만 아니라 당군의 장안진입에 발판을 마련한다든지, 돌궐의 침입을 막는다든지, 두건덕의 반란을 진압한다든지 하는 면에서 모두 남다른 능력을 보였다. 결국 권력욕에 눈이 먼 이세민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고 보고 무력으로 차지할 결심을 굳히고, 결국 기회를 노리다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게 된다. “활을 들어 형을 쏘고, 소리를 지르며 동생에게 달려가 칼질한다. 이때의 흉악함과 참혹함은 극에 이르러, 인간으로서의 마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왕부지 <독통감론>권20). 이세민은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의 어린 자식까지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부친을 협박하여 태자의 자리에 오르고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 후 그는 실록의 기록을 뜯어고치고, 이건성과 이원길의 작위를 추봉해주고, 자신의 아들을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의 양자로 보내어 대를 잇게 하는 등 온갖 방법으로 그의 추악한 행동을 감추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은 화근이 되어 돌아온다. 아들인 태자 이승건(李承乾)은 정관17년(643년) 대장 후군집(侯君集)과 공모하여 현무문의 변을 재연하여 부친 이세민을 몰아내고 황위를 차지하려 했으나, 그는 부친처럼 운이 좋지 못해 실패하고 폐위당한다. 당나라는 그 이후에도 궁정정변이 끊이지 않았는데 모두 이세민이 뿌린 유독(遺毒)이라 할 수 있다.

 

적장자승계원칙이 정착된 과정은 대체로 이러하다: 하(夏), 상(商)의 두 왕조에서는 “먼저 형이 죽으면 동생이 뒤를 이었다(兄終弟及)”. 이 방식의 장점은 나이어린 군주가 왕위에 오르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왕위를 다시 그 아래 동생에게 물려주어야 할지, 형의 아들(조카)에게 물려주어야 할지,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지가 문제이다. 그리하여 권력투쟁과 궁중정변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점점 군주는 후계자를 확정하는 것이 국가의 바탕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고, 태자는 국지본(國之本)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상왕조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군주인 제을은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대를 잇는다(父死子繼)”는 원칙과 적자(嫡子)가 잇는다는 원칙을 확정하게 된다. 이 방법이 상왕조에서는 1번밖에 시행되지 않았지만, 그 이후 주(周)왕조의 주문왕, 주무왕, 주성왕, 주강왕의 수대를 아무런 문제없이 이어가고, 중간에 주공단의 찬탈음모도 분쇄하면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춘추오패중 최초의 패자인 제환공(齊桓公)은 주왕실의 주혜왕이 태자 정(鄭)을 폐위시키고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 대(帶)를 태자에 올리려고 하자, 규구(葵丘)에 제(齊), 노(魯), 위(衛), 정(鄭), 송(宋), 허(許), 조(曹)등 당시의 중요한 국가와 주왕실의 대표 주공을 모아 회맹을 하여 다섯가지 제도를 확립하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불효자는 죽인다. 한번 세운 후계자는 바꾸지 않는다. 첩을 처로 삼아서는 안된다(誅不孝, 不易樹子, 不以妾爲妻)”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적장자의 지위는 더욱 공고하게 되는데, 나중에 모친이 폐위되더라도 그의 후계자의 지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