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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 시살부형패(弑殺父兄牌) 수당편

by 중은우시 2015. 8. 6.

 

양광(楊廣)은 인효를 가장하고 축첩을 않는 것처럼 보여 부친 수문제 양견(楊堅)과 모친 독고황후의 환심을 사서, 결국 태자 양용(楊勇)을 몰아내고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는 태자에 오른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루빨리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한다. 인수4년(604년) 칠월, 수문제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양광은 양소(楊素)에게 서신을 보내어 수문제의 후사와 자신의 등극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물어본다. 그런데, 양소가 보낸 회신을 서신전달하는 사람이 수문제 양견에게 잘못 전달한다. 그 서신을 본 양견은 대노하여 바로 양광을 불러 그 자리에서 그를 질책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선화부인(宣華夫人) 진씨(陳氏)가 뛰어들어와 그녀가 양견의 침소로 오는 도중에 양광을 만났는데, 양광으로부터 희롱을 당했다고 울면서 호소한다. “짐승 같은 놈에게 어찌 대사를 맡길 수 있겠는가? 독고가 나를 망쳤구나!”, 양견은 대신 유술(柳述), 원암(元巖)을 불러 양광을 폐하고 양용을 다시 태자에 세우는 조서를 쓰게 한다. 양광이 이를 알고 유술, 원암을 감옥에 가두고, 장형(張衡)을 보내어 수문제의 침전을 지키게 하면서, 수문제 곁에 있던 사람을 모조리 자신의 사람으로 바꿔버린다. 얼마 후 수문제는 사망한다.

 

수문제를 과연 양광이 시해하였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당나라때 사람인 마총(馬總)은 <통력>에서 “피가 병풍으로 튀고, 원통해 하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렸다”고 적었고, 조의(趙毅)는 <대업약기>에서 수문제가 장형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었다.

 

후량태조(後梁太祖) 주온(朱溫)은 한때 주전충(朱全忠)이라는 사명(賜名)을 받은 바 있고, 황제에 오른 후에는 주황(朱晃)으로 개명한다. 말년에 그는 황음하기 그지없어 심지어 며느리들에게 시침하게 한다. 둘째인 주우문(朱友文)의 처 왕씨와 셋째인 주우규(朱友珪)의 처 장씨도 자주 불려가서 주온을 모셨다. 첫째인 주우유(朱友裕)는 주온이 황위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여, 친아들로는 주우규가 장남이고, 양자까지 합치면 주우문이 장남이 된다. 주우문은 본인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부인 왕씨가 예뻐서 주온이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주온은 비록 양자이지만 주우문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한다.  912년 주온의 병세가 위독해지는데, 어느 날 주우문의 처 왕씨에게 “우문을 불러와라. 그와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상 주우문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다. 그 자리에는 주우규의 처 장씨도 있었는데, 장씨는 이 사실을 바로 남편 주우규에게 알린다. 그러자 주우규는 며칠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후, 자신이 장악한 궁정숙위시종과 자신의 심복인 좌룡호군통군인 한경(韓勍)이 거느린 아군(牙軍)을 동원하여 주온의 침궁으로 쳐들어간다. 주온은 “내가 네놈을 의심한지 오래되었다. 일찌감치 죽여버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네가 설마 애비까지 죽일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그때 주우규의 심복인 풍정악(馮廷諤)은 검을 들어 주온을 찔러간다. 주온은 기둥을 돌면서 피한다. 검은 세 번이나 기둥을 찔렀다. 마침내 주온은 힘이 빠져 침상위에 쓰러진다. 그러자 풍정악이 검으로 그의 배를 찔러 내장이 흘러나온다. 주우규는 부황의 시신을 이불과 요로 싼 후 침상에 버려둔다. 그는 조서를 위조하여 주우문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다.

 

주온의 넷째아들 주우정(朱友貞)은 원정황후 장혜(張惠) 소생의  적자로 주우규의 배다른 동생이다. 그는 형이 부친을 시해하고 황제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온의 외손자인 원상선(袁象先)과 부마 조엄(趙嚴)등과 비밀리에 주우규를 토벌할 것을 상의한다. 원상선이 금군을 이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자, 주우규는 처 장씨를 데리고 황궁에서 도망치려하나 실패한다. 그러자 그는 풍정악에게 자신과 처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풍정악은 둘을 죽인 후 자신도 자결한다. 주우정은 후량말제가 된다. 그는 황제에 오른 후에 동생 6명을 더 죽여, 중국황제중 형제를 가장 많이 죽인 기록을 세운다.

 

왕연균(王延鈞)은 오대십국중 민태조(閩太祖) 왕심지(王審知)의 차남이다.  그는 926년, 왕심지의 양자인 왕연품(王延稟)과 손을 잡고 형인 제2대군주 왕연한(王延翰)을 죽이고 군주에 오른다. 그는 933년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용계(龍啓)라 하며, 국호를 ‘대민(大閩)’이라 한다. 왕연균은 용모가 못생겼으나 음탕하기 그지없는 비녀(婢女) 진금봉(陳金鳳)을 총애한다. 말년에 왕연균이 병석에 눕자, 진금봉은 귀수명(歸守明), 이가은(李可殷)과 사통한다. 935년 진금봉은 황후에 봉해진다. 왕연균의 병이 위중해지자, 아들 왕계붕(王繼鵬)은 황성사(皇城使) 이방(李仿)과 손을 잡고 진금봉의 세력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한다. 이방은 병사를 황궁으로 진입시킨다. 왕연균은 침상밑에 숨어 있었으나, 반란군이 칼로 몇번 찌르자 기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왕연균은 칼질에 중상을 입었으나 미처 죽지않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궁녀가 차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죽여준다. 그후, 진금봉의 일당은 완전히 제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