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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무장탈위술(武裝奪位術) – 시살부형패(弑殺父兄牌) 춘추전국편

by 중은우시 2015. 8. 4.

 

황제가 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황제를 죽여버리고 자신이 황제에 오르면 된다.

 

주양왕26년(기원전626년) , 중원의 여러 제후들이 진문공(晋文公)의 통솔하에 주왕을 알현할 때, 남방의 초나라의 왕궁에서는 무력찬탈의 일막이 벌어진다. 원래 초성왕(楚成王) 웅운(熊惲)은 장남 웅상신(熊商臣)을 태자로 삼으려 하면서 영윤(令尹) 자상(子上)의 의견을 물었다. 자상은 이렇게 말한다: “군왕의 나이가 아직 많지 않고, 총애하는 처첩이 많다. 만일 나중에 다시 상신을 폐위시키고 다른 태자를 세우려 하면 반드시 화란이 생길 것이다. 초나라에서 태자를 세울 때는 항상 젊은 사람을 선택했다. 그리고 상신은 눈이 말벌같고, 목소리가 승냥이같아서 잔인한 사람이다. 태자로 세워서는 안된다.” 그러나 초성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상신을 태자로 삼는다.

 

초성왕46년(626년), 초성왕은 상신을 폐위시키고, 왕자직(王子職)을 태자로 삼고자 한다. 상신에게 그 소문을 들어가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스승인 반숭(潘崇)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보니, 반숭은 “초성왕의 여동생 강미(江羋)를 불러서 연회를 베풀면서 고의로 불경하게 행동하라”고 한다. 상신이 반숭의 말대로 하자 강미가 노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런 천한 놈! 이러니 군왕이 너를 죽이고 왕자직을 태자로 삼으려 하지.” 그는 강미에게 들은 말을 반숭에게 얘기하자 반숭은 이렇게 반문한다. “너는 왕자직을 모실 수 있겠는가?” “없다.” “그럼 나라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겠는가?” “없다.” “그럼 정변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할 수 있다.”

 

그 해 10월, 상신은 궁중의 병사를 이끌고 초성왕을 포위한 후, 초성왕에게 자결할 것을 요구한다. 초성왕은 웅장(곰발바닥)요리를 먹은 다음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의도는 시간을 끌어서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신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십월 십팔일, 초성왕이 목을 매어 자결하고, 상신이 즉위하니 그가 초목왕(楚穆王)이다.

 

초목왕의 아들 초장왕(楚莊王)을 거쳐 손자 초강왕(楚康王) 웅초(熊招)는 왕위를 아들 웅원(熊員)에게 물려주니 그가 초겹오(楚郟敖)이다. 재위4년째 되는 해에 초겹오는 병석에 눕게 되는데, 당시 영윤을 맡고 있던 초강왕의 동생 웅위(熊圍)는 관을 묶는 끈으로 조카인 초겹오를 목졸라 죽이고 초겹오의 아들인 웅모(熊慕), 웅평하(熊平夏)까지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초령왕(楚靈王)이다. 

 

초령왕의 최후도 비참했다. 그가 서국(徐國)을 정벌하기 위하여 건계(乾溪)에 머무는 도중에 그의 동생인 웅기질(熊棄疾)은 초령왕이 수도에 없는 틈을 타서, 초령왕의 아들 태자 록(祿)과 공자 파적(罷敵)을 죽인 후 초령왕이 초겹오를 죽이자 진(晋)나라로 망명가있던 공자비(公子比)를 모셔와 왕으로 세우니 그가 초자오(楚訾敖)이다.  그러나 초자오도 얼마 후 동생 웅기질의 협박에 자결하고, 웅기질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초평왕(楚平王)이다.  초령왕은 수하병사들은 수도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모두 도망쳐버리자 혼자서 쓸쓸히 여기저기 떠돌다가 자결한다(일설에는 굶어죽었다).

 

오왕 합려(闔閭)도 왕인 사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왕에 오르기 전에 그는 공자광(公子光)으로 불리었고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이다. 원래 오나라는 오왕 수몽(壽夢)때부터 강성해지는데 오왕 수몽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제번, 여제(餘祭), 여매(餘昧), 계찰(季札)가 그들이다. 이들 중 막내인 계찰이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덕망이 뛰어나서 왕위를 이을 만하다는데, 수몽과 다른 형제들간에 컨센서스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계찰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하는데 계찰이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할 수없이 제번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제번이 죽을 때도 계찰이 사양하자, 여제가 왕위에 오른다. 여제가 죽은 후에도 계찰이 또 사양하자 할 수 없이 여매가 왕위에 오른다. 여매가 죽고나서 이제는 오나라사람들이 계찰을 왕에 오를 때가 되었다고 여겼으나, 그는 왕위에 오르지 않으려고 아예 순과산(舜過山)으로 들어가 은거한다.  계찰은 계자(季子)라고도 불리는 공자의 스승이며 공자와 나란히 성인으로 이름을 떨친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무덤은 강음(江陰)에 있는데, 무덤앞의 십자비(十字碑)는 공자가 친히 썼다고 한다: “오호유오연릉계자지묘(嗚呼有吳延陵季子之墓).”

 

여매는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는데 그가 오왕료(吳王僚)이다. 그런데 공자광은 오나라의 왕위는 마땅히 계찰이 올라야 하고, 만일 계찰이 오르지 않는다면 장남인 제번의 아들인 자신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암중으로 인재들을 끌어모아 오왕료를 치고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 기원전516년 초평왕이 죽자, 오왕료는 동생 2명에게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치게 한다. 그런데, 초나라의 군대에 퇴로가 막히게 된다. 그러다보니, 오나라의 국내는 헛점이 생겼다. 공자광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초나라에서 망명한 오자서(伍子胥)로부터 추천을 받은 중국고대 4대자객중 하나인 전제(專諸)을 시켜 오왕료를 암살한다. 이때 전제는 유명한 어장검(魚腸劍)을 생선요리의 뱃속에 숨겨서 연회때 오왕료를 죽이는데, 그 후 공자광은 왕위에 올라 오왕 합려가 된다.